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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한 선물로 누리라 (욘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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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논산 훈련소에서 장병 합동세례식이 있었습니다. 논산 훈련소는 1년에 약 12만명 가량의 장정들이 훈련을 받고 늠름한 군인이 되어 전국 각지의 부대로 배치되는 매우 중요한 국가 훈련기관입니다. 각 지역에 있는 사단 신병교육대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장병들이 거쳐가는 훈련소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명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훈련소에 갔더니 군종목사님이 우리에게 물어봐요. "목사님, 훈련소에서 하루에 먹는 쌀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몇분이 10가마 혹은 20가마 혹은 50가마나 먹을려나... 그랬는데 놀랍게도 하루에 400 가마를 먹는다는 말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한 달이면 만2천 가마, 일년이면 14만 4천 가마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규모이지요.

한 달에 1만 명가량이 체류하면서 4주 훈련을 받는데, 들어오며 나가며 걸리는 대기시간 까지 합쳐도 5주를 넘기지 않는 짧은 기간에 주님을 모르는 젊은 청년들이 군인교회를 나와서 예수믿고 세례를 받겠다고 자원하는 것은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는 축복된 모습인줄로 믿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논산훈련소에서 세례 받은 형제들이 5만 9천명이었는데 그것은 훈련병의 약 50%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군에 오기전에는 신앙에 무관심하였던 이들이 단 4- 5주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에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영접하면서 세례까지 받는다는 일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는 2,100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군종목사님 말로는 세례 받아야할 예상 기대치보다는 조금 줄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다름아닌 훈련병들의 상황이었는데, 일반적으로 2년간의 군복무를 해야하는 정기 사병들보다는 4주 훈련후에 집으로 복귀하는 공익근무요원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모함이나 간절함이 일반 병사들에 비해 휠씬 못미친다는 것입니다. 정상이면 약 3천명 정도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대로 배치받고 나면 종교 구분을 할 때 기독교인으로 구분되어 군생활동안 교회생활에 보장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전역후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도의 점촉점이 되는지 모릅니다. 군종목사님은 이를 두고서 "군선교는 황금어장이 아니라 가두리 양식장"이라고 하여 모두가 웃었습니다. 논산에서만 한해에 6만명 가까운 청년들이 세례를 받고 사회로 복귀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젊은이교회가 청년 부흥과 전도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까? 최고로 멋지고 훌륭한 목사님을 모셨지요. 청년 사역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제도와 시스템을 준비하고 온 교회가 전심으로 후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에 10명을 전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기에, 군 선교의 열매는 기적이라고 해야 할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나서의 마지막 시간을 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과 연초에 우리는 요나서를 통하여 참으로 귀중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자책감과 부끄러운 심정으로, 때로는 눈물과 회개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나서를 강해하는 동안 많은 성도들로부터 이런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왜 요나서를 가지고 설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꼭 나한데 하시는 말씀 같아서 혼났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마음이 드셨다면 성도님은 수지 맞은 겁니다"

11절에 보면, 박 넝쿨이 말라버려 화를 내고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네가 심지도 아니하고 배양도 하지 않은 박넝쿨 하나가 벌레 때문에 죽었다고 그렇게 역정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냐?" 그러자 요나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조금 좋은 일 생기면 세상에 저렇게 은혜스러운 성도는 없는 듯 보이던 사람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떠나느니 마느니, 예수를 믿느니 마느니 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자화상 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룻 밤에 났다가 말라버린 박넝쿨도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하물며 저 니느웨성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만 무려 12만명이나 있음을 너는 알고 있느냐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생명보다 물질적인것을, 사람보다 사물이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가치관이지요. 내게 도움이 된다면 그만이라는 극도의 물질중심적인 삶의 모습을 요나라는 인물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대풍을 주셨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에 그는 다시스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북쪽이고 다시스는 서쪽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방향이 다른다는 것 이상으로 문제가 심각한 행동이었습니다. 자기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우에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내 뜻과 다르다고 니느웨를 외면하고 다시스로 갔었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다시스로 가는 배표도 쉽게 구하게 되고 일기도 좋아서 순풍에 돛단듯 신나는 여행이 되었지요. 그래서 요나는 배 아래에 내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깊이 들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편안하다는 말이 아닌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랑하시기에 대풍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찬송에 보면, "이 풍랑이 인연하여서 주께로 더 빨리 갑니다..."고 고백한 것 처럼 결국 요나에게 주신 풍랑은 주님께로 가는 고속도로인 셈이었습니다.

풍랑이 아니었다면 주님께로 갈 수 없었을 거예요. 풍랑 때문에 제가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그 젊은 형제들이 군대로 오지 않았다면 주님을 만날 수 있었겠어요? 젊은이들 중에 군대 가고 싶은 사람 하고 손 들라고 할 때 군대 안 갈 수 있다면 안 가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억지로 군대를 왔지만 거기서 주님을 만나서 세례를 받고, 이제는 거기서 기독교인 하면 손을 들 줄 아는 그 감격스런 젊은이들을 오늘 우리는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보려고 하는데, 니느웨에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요나는 아니라는 거예요.

결국은 자신을 바다에 빠뜨리라고, 배가 이렇게 풍랑을 만난 것, 여러분들이 같이 고통받는 건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면서 바다에 자신을 던지라고 하지만 주님의 요나에게 주시는 풍랑의 목적은 요나를 죽이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채찍해 보신 적이 많을 것입니다. 저희도 우리 삼남매를 키우면서 약속을 했어요. 아빠가 너희들을 초등학교까지만 채찍한다. 중학교 가고 나면 이제는 어른대우 해 준다. 말로만 하겠다 그 말이지요.

우리 두 딸은 사춘기가 있는지 그런 단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 아들은 조금 험하게 지나갔어요. 제가 채찍을 때릴 때 ‘너 뭐 잘 못 했으니까 맞아야지.’ ‘네.’ ‘걷어.’ 그리고 몽둥이로 때립니다. 힘을 줘서 때리지요. 물론 때리지만 맞아 죽으라고 때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힘을 주어 때리기 때문에 맞은 자국만큼 종아리에 빨간 핏줄이 쫙쫙 서지요. 그러면 자기 침대가서 아파서 울고 있지요. 저녁쯤 가서 안티프라민 가져 가서 발라 주면서 ‘많이 아프지?’ ‘아니요.’ ‘아빠도 너 미워서 때린 거 아냐.’ 아빠하고 아들하고 울면서 아픈 상처 비벼주는 거지요.

그 상처보는 부모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지요. 하지만 채찍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채찍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요나를 죽으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을 하셨기에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신 줄로 믿습니다.

구원의 손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박넝쿨을 주셔서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박넝쿨의 벌레가 먹음으로 인해서 요나는 짜증을 내고 화를 냅니다. 동풍으로 뜨거운 바람을 주어서 땀을 뻘뻘 흘리게 하니까 더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나야, 너는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하였다.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도 그렇게 아까워 하면서 저 성에 어린아이 12만명이나 되는 저 성을 구원하려고 하는 내 뜻은 왜 모르느냐?

이제는 사물보다 생명을 좀 더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 그냥 나 잘 먹고 잘 살면, 내 자식 건강하고, 공부 잘하고, 내 남편 튼튼하고, 직장 잘 다니고, 그리고 그러고 그만, 사물에, 자기 머리 가려주는 박넝쿨 있으면 그만이라는 그런 요나와 같은 생각에서, 그게 아니라 저기는 어린아이만 12만명이 죽어가는데, 내가 그들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느냐?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벌레를 주시고, 뜨거운 동풍을 주셨을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인간적으로 기뻐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완전히 끊어버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랬어요. 나 외에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요. 그런데 하나님 말고 박넝쿨을 자꾸 좋아하니까 박넝쿨을 말라버리게 하셨어요. 벌레를 시켜서 말라 버리게 하셨어요.

이사야 41장에 보면 벌레라는 표현이 똑같이 사용되었는데, 지렁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이제 너를 도와주리라. 사람들이 지렁이 같이 다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지렁이 같은 너를 내가 도와주리라.

왜 벌레를 주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실패를 맛보게 하시고, 왜 우리에게 고난을 맛보게 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문화재청장이 된 유홍준씨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난다. 국보 1호는 남대문이고, 보물 1호는 동대문이지요. 그런 것들을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납니다.

저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서울에 있던 어떤 유물이 지방으로 내려가 있으면 그것을 옮겨오는데 수십억씩 들여서 옮겨와요. 일제시대에 경복궁의 정문이었던 광화문을 그들이 옮겼잖아요.

그래서 옮기면서 그들이 삐딱하게 세워놨어요. 처음에 경복궁에서 중앙청을 철거하면서 그것을 다시 정리했지만, 그것이 다시 제자리로 가야 한다는 지금 분위기가 되어서 아마 광화문을 분해 철거해서 아마 광화문을 다시 세운다고 합니다.

그거 하려고 하면 수억원의 돈이 들어가잖아요. 지금 봐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 몇도가 틀어졌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려면 다시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많은 돈이 거기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왜?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납니다. 아, 그렇구나.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수고와 그렇게 많은 정성을 들이는구나.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오물에 관한 이야기도 하면서 사물이 제자리에 있지 않은 모든 경우 그것은 곧 오물이다. 똥이야기도 했어요. 주일 아침에 똥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똥도 자기 시간에 자기 자리에만 있으면 땅에 거름이 되는 유용한 사물이지만 그러나 그 똥이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제 자리에서 벗어나면 오물이 되고, 냄새를 풍기고,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요나서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나가 누구입니까? 사명자 아닙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가지 않으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대풍이 있고,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벌레가 있고,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뜨거운 동풍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그를 끊임없이 고난으로, 시련으로, 실패의 손길로 그를 인도해 가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때에 빛이 날 줄로 믿습니다. 사명자들은 사명의 자리에 있을 때 복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명의 자리에 있지 아니할 때 죄송하지만 오물이 되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 우리 하나님의 헌신자로 살아가는 일에 자기의 자리를 지켜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욕심으로 우리의 주님과 다른 판단으로 먼길을 떠났던 그리고 풍랑과 견딜 수 없었던 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주님, 주님의 자녀로 다듬어 가시는 사명자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요나와 같은 우리였지만, 주님과 같은 사랑의 손길에, 구원의 손길에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면서 요나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사명자로써 사명자의 자리에 언제나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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