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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을 주는 부활 (눅 24: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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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때 우리 마음이 어떨까요? 난생처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하고 참으로 복잡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섬에서만 자라난 아이들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주는 기사가 종종 나곤 합니다. 처음 육지 나들이를 하는 아이들의 눈은 신기함으로 가득합니다. 보는 것마다 신기합니다. 처음 타보는 기차도 그렇고 서울에서 보게 되는 엄청난 빌딩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건물이서 있을 수 있는지 혹시나 금방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해서 두려운 마음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미소를 짓습니다. 그래서 처음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처음 경험이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그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볼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오늘 본문이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서 주신 말씀은 또한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시몬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에서 돌아온 제자들도 자기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당장 달려가 그 품에 안기며 기뻐하였어야 마땅한데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누구나 바라고 있던 일입니다. 처음에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돌아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할 때만 하더라도 그냥 장난으로 하는 이야기인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몬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 그 말을 전해 들으면서 정말 그럴지도 몰라 하고 진가민가 하고 있을 때 엠마오로부터 제자들이 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며 그 과정을 쭉 설명해 주었다면 당연히 “아하! 정말로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구나.” 하고 기뻐하였을 것이요 그렇다면 자기들 가운데 예수님이 몸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그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 당연히 신나고 즐거워야 할 텐데 그들이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니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우리도 때로 너무도 기쁘고 좋은 일을 만나게 될 때 또는 내가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일이 생기게 될 때 자기 볼을 꼬집으면서 이게 생신가 꿈인가 하지를 않습니까?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때 “정말일까? 저들의 표정과 말하는 모습을 보면 절대 장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뭐라 말할 수는 없고 정말 그렇다면 나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들의 눈앞에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시니 오히려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혔다니 그래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만 생각하였다니 정말 기가 막힙니다.

왜 우리는 누가 사실을 말해도 때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일까요? 아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들을 보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과 역사들을 보면서도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만 치부하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직접 경험하고 내가 겪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들의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그렇습니다. 춥고 배고픈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춥고 배고프다고 이야기를 해도 그저 그런가보다 라고 할 수밖에 없지를 않겠습니까? 유대광야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직접 가서 보기 전까지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서 보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서 보고 경험해 보니까 아하 정말 그렇구나 하고 비로소 알게 되더란 말입니다. 우리네 여름 얼마나 덥습니까? 그 무더위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진절머리 나도록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아주 짜증스럽지 않습니까? 그늘에 들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더위를 피할 수가 없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사막 기후에서는 아무리 더워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참으로 시원하다고 하는 말들을 들었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직접 겪어 보니까 “정말 그러네” 하더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그렇습니다.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지 못한 입장에서는 아무리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도 정말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있다가 막상 예수님이 자기들의 눈앞에 나타나니까 깜짝 놀라게 되고 무서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다른 제자들이 다 함께 만나본 예수님을 그 자리에 함께 있지를 못해서 보지 못했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자기를 놀리는 줄로만 생각하고 화를 벌컥 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를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나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씀하시고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에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니,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나무라기보다는 이렇게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어떤 경우에는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앞선 믿음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마음에 “왜 그렇게도 믿지를 못하느냐?”고 비난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에서는 이해가 되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는 그런 부분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믿는 것도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믿어지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앞서서 믿고 나가는 사람을 광신자로 몰아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아하 저런 것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제가 방언을 체험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과 더불어서 “뭐 방언이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하면서 오히려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행실을 가지고 비아냥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직접 은사를 체험하고 나서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것은 저뿐 아니라 우리 모든 은사를 체험한 분들의 공통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해 주고 감싸 안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믿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기도해주고 함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못한다고 하지를 말고 또 너무 앞서 나간다고 하지도 말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더 힘써 앞서서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모습이 바로 참 사랑의 모습인 것이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우리가 깨들을 수 있는 것은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도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이제 주님처럼 죽어도 다시 살아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의 출발점이 됩니다. 죽음도 이기신 주님이 무엇인들 우리를 위해서 이루지 못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먼저 주신 축복의 말씀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얼마나 평화가 중요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겠습니까? 왜 우리가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까? 우리의 관계가 바로 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또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에 들지를 않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멀리하게 되고 그 일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의 예배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태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를 않는 분들도 혹시 계실 줄로 믿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예배 분위기에 익숙하신 분들은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예배는 거룩 거룩해야 하는데 그저 복음 성가나 부르고 무슨 젊은이들 콘서트도 아닌데 형식도 없고 질서도 없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나 이게 무슨 예밴가 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당연히 묵도로 시작해서 아주 질서정연하게 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또 제가 성령의 은혜 가운데 보다 깊이 들어가면서 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또한 여러 나라 여러 민족들의 예배에 가서 함께 참석하여 보면서 아하 진짜 예배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직접 보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나가며 부흥하는 교회들의 모습을 거기서 보았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복음 역사를 앞서서 이끌어나가며 크게 부흥하는 교회들의 예배가 바로 이런 열린 예배였습니다. 열린 예배란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예배입니다. 우리 마음과 몸을 다 드리는 예배입니다. 단지 내가 참석하여 앞에서 이끄는 대로 지켜보며주시는 말씀을 듣고 아멘하고 끝나는 예배가 아니라 내가 직접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시편 47편 1절로 2절은 “만백성아, 손뼉을 쳐라. 하나님께 기쁨의 함성을 외쳐라. 주님은 두려워할 지존자이시며 온 땅을 다스리는 크고도 큰 왕이시다” 말씀합니다. 두려워할 지존자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 손뼉을 치며 기쁨의 함성을 외치며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150편에서는 “주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나팔소리를 울리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거문고와 수금을 타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소구치며 춤추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현금을 뜯고 피리 불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오묘한 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큰 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 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기타도 치고 드럼도 치면서 또 나팔도 불고 피아노도 치고 바이올린도 켜면서 주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입으로 만의 찬양이 아니라 춤을 추면서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 수 있는 도구들을 사용하고 또 우리 몸을 악기 삼아서 찬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되고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찬양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다 가깝게 느끼게 만들어주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있던 모든 답답함을 다 쓸어버리게 만들어 주고 우리 심령이 이렇게 은혜로 바뀌게 될 때 다른 사람도 사랑으로 감싸 안게 되고 내가 하는 모든 일도 기쁨으로 하게 되니 항상 모든 일이 평화롭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내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방향으로 접근을 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이해하려고 하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면서 모든 것을 바로 세워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도 기피의 대상이 아닌 함께 수고할 대상이 되는 것이요 그럴 때 원수들까지도 새롭게 친구로 바뀌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숨으려고 하고 도망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주님이 끝까지 감싸 안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끄러움까지도 품어주실 만큼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겨주심을 감사하면서 주님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하실 만큼 내가 귀한 존재임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 있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축복하셨던 이유는 첫째로는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며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둘째로는 요한복음 17장에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하셨던 기도에서 보는 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셋째로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이 참된 평화를 누리며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증인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를 사함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너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일의 증인이다.  보아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주님께서는 먼저 성경을 깨닫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열어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전에 나와서 먼저 머리 숙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말씀을 깨닫도록 하여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요 우리가 먼저 찬양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열게 될 때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깨달을 예수,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는 예수를 나가서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성령의 능력을 입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라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미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다는 것은 그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고 있음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게 되면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어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은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십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 모두는 이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주님을 힘써 증거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붙들어주고 격려하며 온전한 하나 됨을 이루어 나가야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도 우리가 온전히 하나 됨을 이루어서 복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 증인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들이요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은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는 열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 “평화가 있으라”입니다. 그러니까 부활 신앙이란 이 평화를 누리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사랑 안에서 이웃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죄로 인해서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형벌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요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귀한 은혜와 사랑의 자리에서 함께 평화를 누리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고 이 자리에 믿지 않는 영혼들을 불러들여 함께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이루어가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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