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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서 보낸 멋낸 선물 (히 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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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미국 듀크대학 메디컬 센터에서는 최근 운동과 복부지방의 관계를 실험한 결과 보고서에서 이런 보고를 발표했습니다. "운동을 안 하고 살면 복부지방(腹部脂肪)이 증가한다."

이 연구 결과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사실 이것은 건강과 관련된 상식 중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매일 하루 3끼 식사를 하며 살아가지만 늘 시간에 쫓기며 살기 때문에 운동할 시간도 부족하,고 또 운동이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 복부(배)가 나온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 복부가 인간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듀크대학의 슬렌츠 박사는 이 실험을 위해서 사람들을 4개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그룹은 일주일에 18㎞를 걷게 하고, 또 한 그룹은 18㎞를 뛰게 하고, 또 한 그룹은 27㎞나 뛰게 하고, 나머지 한 그룹은 전혀 운동을 시키지 않고 정상적인 식사만 하며 살게 했습니다.

그렇게 실험을 시작한지 8개월이 지난 후 조사를 해 보니까 운동을 전혀 안하고 식사만 하고 산 사람의 배는 복부지방이 8.6% 늘어난 반면 한 주에 27㎞정도 달리게 한 그룹은 반대로 복부지방이 8.1%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하면 사람이 운동을 하지 않고 살면 이처럼 복부지방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며, 만약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 복부지방이 두껍게 축적되어 배가 많이 나온 사람들의 경우라면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 습관을 바꾸어 보다 강도 높은 운동이나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해야만 나온 배도 들어가게 하고, 복부지방도 줄어들고 건강해 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시련 혹은 시험이라고 하는 주제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만 사실 이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생들에게나 신앙인들에게 어떠한 영행을 주는냐?'라는 주제로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신앙인에게 무익(無益)한 것이 아니라 유익(有益)한 것으로서 운동이 지방이 많이 축적된 사람에게는 날씬함을, 균형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균형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시련이라는 시험은 모두 다 하나님의 멋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 아멘의 화답이 적습니까? 당연히 아멘은 얼른 나오지 않는 것이 어저면 정상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흑암 중에서도 끝까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을 치하하고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는 우리가 때때로 징계를 받으나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그 징계를 통하여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Kierdegaard)는 "내가 고통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I suffer, therefore I am.)"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을 통해 성숙된 인간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설교가 랠프 사크만은 사람이 인간이 고통 받는 이유를 네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개인의 죄 때문에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건강을 해친다든지 윤리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되시기에 죄는 반드시 역사 이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잠시 형통하는 것 같았으나 반드시 멸망과 심판을 받았고, 노아 시대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성의 불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찾아 온 시련과 고통과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은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고, 회복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집단적인 죄악 때문에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혹은 기타 공공사회의 집단적인 죄로 인해 무죄하고 연약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아간 한 사람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한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실수로 말미암은 고통이 있습니다.

교통사고와 같이 다른 사람의 실수로 말미암아 내가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나의 실수를 마치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는 것처럼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실수 때문이라면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어려움을 이겨나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넷째, 불가항력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자연의 재해로 인한 고통과 천재지변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요, 여기에 따르는 고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재난이 피해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지 우리로 하여금 유익되게 하시고, 교육되게 하십니다. 그 고통의 깊은 뜻과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 성경 말씀을 통해 약속하며, 가르쳐 주신 선한 약속입니다.

루이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안하고 즐거운 때는 우리에게 귓속말로 말씀하시고, 열심히 일할 때는 보통 말로 말씀하시고, 고통과 시련 중에서는 고함을 질러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어린이의 경우 잘못해서 수면제를 먹게 되었답니다. 이 어린이는 계속해서 잠만 자기 시작했습니다. 의사에게 데려가니 의사가 보고는 "이 아이가 앞으로 4시간 이상을 더 자게 되면 죽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깨워야만 합니다." 라고 얘기했답니다. 그러자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꼬집고, 때려서 마침내 깨워서 살려냈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이 그대로 두면 영원히 잠에 빠져 죽어버리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잠을 깨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인간에게 허락하신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잠을 깨우는 하나님의 선한 간섭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인간의 죄를 위해 죽게 하시고, 구원해 주셨는데 "성도들에게 왜 시련을 주시는가?"라고 회의적으로 생각 할 수 있지만 시련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이나 위기는 오히려 "하늘에서 보낸 멋낸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시련에 대한 유익을 주는 요소를 본문에서 발견하고, 몇 가지 은혜의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왜 시련이 하늘에서 보낸 멋낸 선물인가요?

1. 시련을 통해서 보다 큰 은혜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본문 5~6절에서 "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라는 본문 내용은 잠 3:11,12의 인용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행위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는 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시키심을 시사합니다. '징계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스'(* )는 꾸짖음, 교정, 징벌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교훈하시며, 교육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 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와 같이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함으로 목표에 도달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임을 나타내어 '아들 됨'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사랑을 시사합니다(Bruce, Hewitt,Morris).

야고보서 1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을 만나게 되면 기쁘게 여길 뿐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까지 강조하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시험을 기쁘게 여길 뿐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1장 3-4절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옛날 우스 땅에 모든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 자녀들이 있었고 가축을 많이 기르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건강했고 정직했으며 명성도 높아서 주위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하루는 폭풍이 불어와 지붕이 무너져서 10명의 자식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재앙으로 수천 마리나 되는 가축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건강하던 그에게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저주받은 사람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그가 바로 욥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실지니이다."(욥1:21)라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욥과 같이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욥을 시련과 고난으로 실패의 인생으로 끝나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기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욥은 '의인사상'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으로 사탄 앞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정했으니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았을 것이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고 애를 썼던 욥으로서는 고난을 당한 현실에서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계속하여 친구들과 하나님께 "왜 죄없는 내가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해 부족함을 깨닫게 되었고, 회개하자 욥기서 42장은 욥은 결국 시련을 당하기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과 승리의 삶을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항상 찔리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간질병이라고도 하고, 또 안질 병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 번이나 자신의 병이 고침받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9)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찔리는 가시를 통해서 더욱 겸손해 지는 큰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 수 있어서 연약한 것을 자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게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이 찾아왔다면 본문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라며,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더욱 깨닫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1장 5절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련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받은 증거있는 더욱 큰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드립니다.왜 시련이 하늘에서 보낸 멋낸 선물인가요?

2. 시련을 통해서 믿음이 바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에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본 절에서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를 통해서 징계가 아들 됨의 증거임을 반증합니다. '사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도이'(* )는 노예나 첩의 아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 모든 사생아를 의미합니다. 또한 '참 아들이 아니니라.'의 헬라어 '우크 휘오이'(* )는 서자(庶子)를 가리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는 서자이며 사생아이기??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도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징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자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상속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가지는 가장 큰 관심은 바로 우리의 속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길 원하십니다. 옛사람이 죽고,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피조물로 바뀐 영적인 사람으로 우리의 인격이 새로워지고, 주님을 본받아 성숙해지는 것을 주님께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차원 높은 성숙된 인격,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에 이르는 신앙을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양의 40년간의 연단을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고난'이라고 하는 위대한 학교에서 마치 순금을 얻게 위해 24변 불 속에 집어넣는 것과 같이 연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자식을 징계함 같이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0절 말씀에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Bruce).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영적인 성숙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심을 시사합니다.

'거룩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테토스'(*)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Procksch)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완전하여집니다(Bruce, Lane).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17) 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과거의 모든 죄악과 불순종과 나태함과 게으름과 망상은 다 사라져 버리고, 강한 순종의 의지와 헌신의 투지와 거룩함에 이르는 지혜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두는 소망과 믿음의 용기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엔나의 어느 음악교수가 노래를 잘 부르는 한 학생에 대해 "이 학생은 칭찬할 만한 좋은 성대를 가지고 있소.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그에게 너무 친절했소. 어느 땐가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쳐온다면 그는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성악가가 될 것이오."라고 말해 주었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신앙인은 모두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 인격이 다듬어진다는 말입니다.

히 12:11절도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을 통해 '프로스 토 파론'(*, '당시에는')과 '휘스테론'(* , '후에')을 대비 시켜서 하나님의 징계가 그 당시에는 어려움과 슬픔을 가져다주지만 궁극적으로 놀라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의의 평강한 열매'는 평강과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의미합니다(Lane).

시련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도록 훈련하기 위함이요. 구원받은 자로서의 바른 삶을 살기 위함이라 생각하고 받아 드릴 때 우리는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시련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니 속상해 할 필요도 없고 서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시험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가 되니 우리는 그 사랑이 자랑스럽고 고마울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련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더욱 아름답고 든든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시키시며, 아름다운 복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3절을 보면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휘포모네"입니다 휘포모네란 앞이 막혀도 후퇴하지 않는 것과 무거운 것이 내려 눌러도 일어서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시련의 과정을 통과할 때 더욱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시험을 통한 고난은 성도의 인격을 향상 시켜 줌으로 유익을 줍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과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서 거룩해 지고, 겸손해지고, 너그러워지며, 모든 사람으로 화평함에 이르는 아량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교훈입니다.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라는, 민족주의를 지고의 이상으로 삼는 학교가 있었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그 동네에 아주 똑똑한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는 주인집의 요강을 아침마다 깨끗이 닦아 놓았습니다.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이 청년에게 학자금을 주고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로 보내서 공부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교향인 오산에 내려와 오산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한번은 졸업반 학생들이 그 선생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머슴살이했던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시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시오."라고 섬기는 인생이 될 것을 교훈해 주었답니다.

고난과 시련의 역경 속에서 14절 말씀처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찾아 올 때에 나의 믿음이 올바른지 점검해 보는 귀한 성찰의 기회가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왜 시련이 하늘에서 보낸 멋낸 선물인가요?

3.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더 순종하며, 의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 말씀에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 데는 인내를 통해서 믿음을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미래에 있습니다(Lane, Michel, Hughes, Peterson).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0:10절에도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뢰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

티 피어슨 목사(1837~1911)가 제지 공장을 견학했을 때, 더럽고 낡은 넝마 조각들이 좋은 품질의 하얀 증권 용지로 변하는 것을 보고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공정의 과정이 끝에 쌓인 아주 더러운 넝마 더미와 또 다른 쪽 끝에 쌓인 깨끗하고 흠하나 없는 하얀 종이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더러운 넝마 조각들이 이렇게 새로운 모양으로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큰 시련을 겪는 것인가! 산산조각으로 찢기고 ... 모든 때가 빠질 때까지 표백제로 표백되며, 되풀이해서 씻고 또 씻고... 마치 우리의 더러움이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통해 깨끗해지는 것과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시련의 공장을 거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잿더미 위에 앉은 욥, 사자 굴에 있는 다니엘, 외로운 밧모섬에 있는 요한, '육체의 기사'를 가진 바울, 또 히브리서 11장 35-40절에 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순교자들. 이와 같은 시련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순종은 참 믿음의 소유자들이 하는 신앙의 행위이며 축복의 결정이기도 합니다. 눅5장1-10절에 보면 베드로가 순종을 통하여 축복을 받는 내용이 있고 요2:1-11절에 보면 가나 혼인집에서 순종을 통하여 물이 포도주가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순종하다 "훼파쿠오"는 "훼포" "아래, 밑에"라는 말고 "아쿠오" "듣다, 순종하다, 이해하다, 깨닫다."의 합성어로서 "아래서 듣는다. 귀를 기울인다, 따른다,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순종하다 "웨페이코"는 "훼포" "아래"라는 말과 "에이코" "항복하다, 굴복하다"라는 합성어로서 "아래서 항복하다, 예속되다"는 뜻입니다 순종하다 "페이도"는 "신뢰하다, 믿다, 확신을 가지다, 순종하다, 의뢰하다, 희망을 걸다"의 뜻입니다 순종은 겸손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순종은 "훼파쿠오"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잘 듣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기도는 많이 해도 교만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최고인양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 넘어서 살려고 합니다. 즉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병행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신앙의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는다."는 것은"페이도"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순종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과 순종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순서적으로 말하면 순종보다 믿음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왜 예수를 순종치 못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순종치 못하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믿는 것이기에 바른 순종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은 전적인 항복입니다. 순종하다. "훠페이코"는 "아래서 항복하다."는 뜻으로 이것은 완전한 굴복 내지는 항복을 의미 합니다. 이와 같이 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생각과 의지와 주장과 목적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분적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사울왕이 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는가? 그것은 전적인 순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자기의 생각이나 의지나 계획을 그리스도 앞에서 전적으로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떨어지면 오직 "예"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절대적이며, 이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에는 고난도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희생이 있어야 함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내 유익 내 방법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으시고 힘이 들고 어려워도 순종하며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22:12절에 보면"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셨을 때에 아낌없이 바치는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것은 어떤 것이라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제 너를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도 살려주시고 아브라함에서 무수한 축복으로 보상해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배에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한데, 그것은 키와 닻입니다. 키는 배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가 있기 때문에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풍랑이 일어날 때에 내려야 할 닻입니다. 닻이 없으면 배는 풍랑에 밀려 파손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 믿음의 닻을 하나님께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믿음의 닻을 그리스도에게 내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 굳은 신앙 가운데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찾아왔을 때

본문 11~13절을 교독합니다. 11절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절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13절 :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3절은 잠 4:26의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는 말씀의 인용입니다. '곧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다스'(*)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가운데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나 본 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미합니다(Lane).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에 의해서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곧은 방향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의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편 '어그러지지'의 헬라어 '에크트라페'(*)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혹자는 곧은길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여 '배교'를 시사한다. 고 주장합니다(Hughes, Kasemann).

2) 혹자는 '탈구(脫臼)하다'라는 의미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Morris,Bruc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본문은 후자가 타당합니다. 만약 전자의 경우 처럼 배교를 의미한다면 '배교는 더 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는 말(10:26)과 '고침을 받게 하라'는 명령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Lane).

히브리서 저자는 본 절에서 시련과 위험 속에서 좌절하고 소진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여 신앙의 최종적인 목표인 종말론적 구원만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환란과 위기와 어려움과 절망적인 어려운 사건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소망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귀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는 그것 때문에??신앙생활에 방해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요. 맡겨주신 것이니 '주가 쓰시겠다'고 하실 때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헌신의 신앙인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신앙의 길에서 오직 승리자로 남을 수 있었던 믿음의 승리자들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할 때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는 자기의 조건이나 핑계나 항변도 없어야 합니다. 오로지 전폭을 주께 맡기고 "예"하는 순종 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여 축복하시려고 주시는 시련의 시험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참된 신앙으로 이 시련은??하늘에서 보낸 멋낸 선물을 주시기 위한 방법인 줄 믿고, 어떤 경우에도??보다 큰 은혜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라며, 믿음이 바로 세워지시기를 바라며,??하나님께 더욱 더 순종하며, 의지하는 믿음으로 바뀌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미스바교회 모든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따라합시다. "시련과 고통과 실패와 어려움과 난관은??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낸 멋낸 선물입니다. 할렐루야! "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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