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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심정과 방법 그리고 능력으로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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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간 우리교회 단기선교 사역팀이 인도에서 땀을 흘리며, 복음을 위해서 귀한 씨를 뿌리고 또 많은 열매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저도 우리교회 단기 선교팀과 함께 사역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사역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역이라는 것은 항상 영적 전쟁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치열한 사탄의 방해가 또한 있었던 것을 경험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고, 또 성령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중보기도와 물질적 후원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우리가 이 사역을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희어져 추수하게된 이 시대의 추수터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부르셔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이 시대의 일꾼, 그리고 그 일꾼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늘 불러 쓰시고자 하는 일꾼은 도대체 어떤 일꾼일까요?

1.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이어야 합니다.

3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우리가 이 땅을 거닐고 살아가는 가운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런 무리들을 볼 때,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시고,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 어떻게 보셨다고 하셨습니까?
“목자 없는 방황하고 있는 양들”로 보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는 소와 양 그리고 가축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선교사역을 할 때 수많은 양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양에 대해서 조금은 압니다.
양은 보기에는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고 좋은 이미지를 가진 존재이지만 막상 같이 놀아보면 그렇게 좋은 면만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선 양에게는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기르는 대부분의 애완용 동물들은 밖에 갔다 놓으면 반드시 집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밖에 양을 갖다 놓으면 찾아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이란 겁이 많고, 두려움이 많고,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동물들은 신체의 한 부분을 예리한 무기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동물들은 자연의 색깔과 같은 보호색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그런 무기도 보호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지금 폼잡고 당당하게 앉아 예배하고 있지만, 병원에 가서 진찰 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암 같은데요”라고 말하면 한 순간, 내 삶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이 갖고 있는 이런 모든 문제들은 목자만 있으면 해결됩니다.
그래서 목자만 곁에 있으면 방향을 잡아주고,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일러주고, 그들을 보호해 주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그 위험 속에서 지켜주기 때문에 걱정이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민망히 여겼다는 말은 “함께 느낀다. 함께 고통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보셨고, 양의 방황을 자신의 방황으로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었고, 양의 눈물이 자신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꾼들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시대의 영적인 거장이라 불리는 헨리 나우엔이 쓴 가장 대표적인 책은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처럼 고통을 당하시고, 또한 모든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셨기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이해할 수 있고,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상처입은 치유자라고 강조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도 그런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배신과, 단절과, 고독과, 소외가 얼마나 아픈 상처인가를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의 절정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부르짖은 말씀은 이 단절과 고독과 배신과 상처가 얼마나 아픈 상처인가를 절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이해할 수 있고, 우리를 정말 치료할 수 있는 상처입은 치유자 이신 것입니다.

히4:15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의 아픔이나, 문제나, 어려움이나 고통을 대신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이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히4:15절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좌절과 아픔을 함께 느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볼 때 같이 아파할 수 있는 마음, 내 아픔을 통해서 나보다 더한 아픔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웃들을 향해서 손을 펼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은 일꾼으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한번 쓰임 받기 위해서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심정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예수님의 방법을 가진 자입니다.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여기 보면 세 가지 아주 중요하게 강조된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시며, 전파하시고, 고치셨다는 동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사역의 독특한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컴퓨터 앞에서 Click 한번만 하면 전세계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 생각의 틀이 변혁되기를 요청 받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모든 일들에 대한 방법이 계속해서 달라지는 그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을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할 방법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여 주신 이 세가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방법입니다.

물론 가르치는 방법은 새로운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치느냐? 어떻게 전파할 것이냐? 어떻게 더 빨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깊이 있게 전파할 것이냐? 또 어떻게 고칠 것이냐? 라는 방법은 계속 개발되어 바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 전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을 선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아파하고, 병들고, 좌절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무엇으로 우리가 섬겨야 할까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거듭나게 하신 구원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생명이라고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희망이라고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빛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빛이요, 구원이요 능력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가르치고, 전하고, 그리고 이 말씀을 권고해서 사람들을 치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이 말씀에 전문가가 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꼭 목사와 같은 목회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모든 성도들이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목사들이나, 선교사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일꾼을 찾으시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주님의 방법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실제적인 훈련을 통해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설 수 있도록 준비만 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기적처럼 쓰시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방법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님의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10: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때때로 저는 오늘날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왜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제가 가장 깊이 고민하고 있는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유선 TV를 통해서 좋은 설교들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마다 프로그램도 좋아졌고, 성경연구도 많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더 어두워져 있고, 사람들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부딪쳐 오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능력의 결핍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이 여러분의 주님이고, 나의 주님이라고 믿고 신뢰한다면,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그 동일한 능력을 이 시대에 우리 가운데 부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독교사를 기술한 라토렛이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1세기의 초대교회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바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아무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삶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식도, 프로그램도, 조직도, 후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프로그램도, 지식도, 조직도, 후원도 가지고 있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 세상적으로 육체적으로 부요해져서 성령님을 전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전도 행적을 보면, 그의 삶에서 가장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을 때는 그가 가장 연약해 있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당시 지성의 도시라 일컫던 아덴에 가서 바울은 가장 멋있는 설교를 했지만 뜻밖에도 결과가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거기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고린도에서 전도했을 때 그곳에서는 놀라운 기적과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그 비밀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왔을 때에 나는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만 나의 전도함이 사람의 말과 아름다운 소리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실패했던 바울은 더 이상 자만하지 아니하고, 그는 두려워했고, 그는 떨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로 자만하서는 안됩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주님이 들어 쓰는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면 주님은 여러분을 쓰시고 나를 들어 쓰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최창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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