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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받은 자의 특권 (삼상 28: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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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어린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갑자기 쓰러져 죽었지만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시체부검을 했지만 전혀 그럴만한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유전적인 문제도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야 그 원인이 밝혀졌는데 바로 아이의 가정배경이었습니다. 부모의 결혼생활 파탄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의붓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이에게 냉담했고 아내에 대한 불만을 아이에게 풀었습니다. 아내가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도 제한했습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덜 가까이 했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였고, 그 결과 아이는 모든 일에 체념적이 되었습니다. 아이의 그러한 태도 때문에 학교 선생님도 아이를 포기했습니다. 친구들도 다 멀어졌습니다. 이제 아이의 생각은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버렸다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 아이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몇 달 만에 아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이는 병이 들어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이 아이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냉철히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이 아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를 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객관적인 상황을 보셨겠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한 두 사람이 아이를 덜 배려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 감수성이 예민한 이 아이를 위해서 좀 참아줄 수 있었고, 또 의붓아버지도 자기 식대로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아이를 조금 더 생각해 줄 수 있었습니다. 덜 배려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이 아이를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죽게 한 것은 버림받은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상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상처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상처가 있습니다. 열등감이든 죄의식이든 상처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상처는 이 버림받은 마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마음, 하늘로부터 버림받은 마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마음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 버림받은 마음은 참으로 큰 아픔과 상처가 되는데 그 아픔의 정도는 내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의존했는가 하는 의존정도에 비례합니다. 먼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으면 아픔이 별로 없습니다. 그보다는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조금 더 힘듭니다. 더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상당히 힘듭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와서 정말로 사랑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형제자매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는 견디기 힘듭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버림을 받으면 죽도록 힘듭니다.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도 어리면 어릴수록 상처는 크고 깊어집니다.

여러분, 최고 의존 대상이 누구입니까? 믿든 믿지 아니하든 그것은 신, 하나님입니다. 하늘마저, 신마저 나를 버렸다고 확신하게 될 때 사람은 자살하게 됩니다. 성경에 제일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을 들라면 우리는 한결같이 욥을 듭니다. 욥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습니까? 그 많은 재산이 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열 명의 자식이 다 죽었습니다.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게다가 육체의 고통은 기왓장으로 벅벅 긁을 정도로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통, 고난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기 때문에 내 재산이 다 날아가고 내 자식이 다 죽었고 내 몸에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든 나에게 한번만이라도 말씀해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기만 한다면 야단쳐도 좋고 때려도 좋고 죽여도 좋습니다. 어떻든 한번만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한 때려도,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맞아도 하나님에게 맞으면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욥에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 말씀은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 무엇을 그렇게 잘했다고 말이 그렇게 많으냐? 네가 잘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책망이었습니다. 사실 욥은 상당히 잘했습니다. 깨끗하고 의롭게 살았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엇을 잘했다고 말이 많으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욥은 야단치는 이 소리만 듣고서도 감격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말 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무섭습니다. 무관심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때려도 좋고 죽여도 좋은데 하나님께서 입 다물고 아는 체 하지 않는 것이 너무 무섭고 겁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무서운 것이 버림받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이런 상처를 받도록 하지 마십시오. 인생 살다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만 먼저는 여러분이 절대로 알고서는 사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 더는 신경을 써야 됩니다. 마치 버림받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버림받는 상처를 받기 쉬운 사람은 배려해야 합니다. 긍휼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내가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들을 것인가? 내가 저 사람이라면 나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이며 어떻게 말해주고 어떻게 얼굴을 대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도 상처를 받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아주 신경을 써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여러분 한 분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어렵게 되는 일은 잘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모티브는 될 수 있습니다. ‘저 사람마저도 어떻게 나에게 저런 얼굴 표정을 하고 저런 말을 하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버티고 버티던 마지막 성이 무너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들은 얼굴이 온유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상처를 받지 않을까 혹시라도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속상해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보니 얼굴이 좋아질 수밖에 없고 인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긍휼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이렇게 됩니다. 얼굴이 환해지고 생각하는 것이 뭐든 좋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드럽게 합니다.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이 무서운 버림받은 마음이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에게 생겼습니다. 사울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사울이 막상 진을 쳐놓고 보니 너무 겁이 나고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평소에 묻지 않다가 급하니까 하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무당에게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려달라고 하자 사무엘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정말 무당이 이렇게 불렀을 때에 귀신이 올라오는 것인가요? 혼령이 올라오는 것인가요?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무엘의 혼이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이 하는 노릇입니다. 귀신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다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무엘의 모습을 가장한 귀신입니다. 귀신이 그렇게 목소리도 똑같이 낼 수 있고 모양도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마귀입니다. 언젠가 한 번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마귀가 나타나서 천하 모든 만국의 영광을 주겠다고 했을 때 우리 주님을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이 사무엘의 모습을 가장해 나타나서 너는 전쟁에서 질 것이며 너는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이 소리를 듣고 기절해 버렸습니다. 사울이 무당을 찾아간 이유는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또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울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참으로 악한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그렇게 높이 세워주었고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었으면 이제 좀 정신을 차려야 했는데 사울은 그렇지 못했으며 계속하여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사람을 선택했으면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것을 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살다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헤어지고, 친하게 지내다가도 뭔가 좀 맞지 않으면 돌아서 버립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마음이 맞지 않아도, 싫어도, 미워도 하나님께서 나와 맺어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도 아내도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다보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형국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다음 세대들을 어떻게 지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어떤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좋은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하였으면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묘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사40:27).. 그런 일은 없으니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41:8~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절대로 싫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꿀밤 한 대를 때릴 때 밉고 싫어서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아들 내 딸을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되고 더 괜찮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더 바르고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꿀밤을 주고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싫어하고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기만 하면 다 용서하고 다 받아 주십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배신을 하고 아무리 악한 일을 하고 무서운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다 받아 주십니다.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우고 닮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슴이 넓어야 합니다. 이 사람도 품어주고 저 사람도 받아 주어야 합니다. 내가 속상하고 당해도, 손해를 봐도 내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십니다. 열 배 천 배로 갚아 주십니다. 손해 본 것 그것으로 절대로 끝나도록 하지 않습니다. 당하는 그것으로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챙겨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하나님이신줄 모릅니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내 인생이 잘나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 전부 다 벌충을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 당신이 깨끗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기만 하면 그렇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사야 41장 14절에서는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인간도 아닌 버러지 같은 행동을 했지만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다 받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사울도 이 정도는 알만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왜 무당을 찾아 갔습니까? 여러분이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어둠의 영이 그런 마음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고 자꾸 꼬드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자꾸 어둠이 조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절대로 속지 마십시오. 정말로 저 사람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해도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하십시오. 비둘기같이 그냥 노래만 하고 있는 것이 예수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떠나간 사람도 돌아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을 오해했던 사람도 다 오해가 풀어져 돌아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미워하던 사람들까지도 다 돌아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둠의 영이 그 마음을 줄 때에 절대로 속지 마십시오.

사울의 인생 중에 가장 큰 실패가 바로 무당을 찾은 것입니다. 신자들이 짖는 죄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고 무당을 찾아가는 이것입니다. 십계명의 제일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어다’ 입니다. 무당을 찾아가고 다른 무엇을 찾아가는 것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고 이것은 신자의 존재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존재의미를 상실하는 것, 신자의 신자 존재의미를 상실하는 것 이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의 끝이고 신자의 끝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신자의 길을 떠나게 되면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더 이상 있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셨기 때문에 구원마저 빼앗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 이외에는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말아버립니다. 신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하나님의 곁을 떠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곁을 떠나면 멸망입니다. 하나님 곁을 떠나면 죽음의 골짜기가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어둠의 구렁텅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오기만 하면 다 받아 주십니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아무리 악한 노릇을 했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집나간 탕자를 보십시오. 그렇게 못된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야만 재산이 아들에게 분배되는데 죽었다 생각하고 재산을 달라고 한 후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지 않았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이렇습니다. 돌아오는 흉내만 내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십니다. 아버지 하는 ‘아’자만 시작해도 하나님은 듣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기도를 시작할 때 이미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못된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어느 날 재앙을 내리겠다는 선고를 하셨습니다. ‘너에게 속한 모든 남자를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이 이야기를 아합에게 말하니 아합이 옷을 찢고 금식하고 풀이 죽어 다녔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회개를 했는지, 모양만 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실 무늬만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금방 당신이 내렸던 선고를 변경하였습니다. 이사야를 불러서 아합이 내 앞에서 경배하므로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않고 그 아들의 시대에 가서나 내리겠다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아합처럼 저렇게 경배하기만 하면 재앙을 다시는 내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이 이래야 했습니다. 제사 한번 받아주지 않는다고 안색이 변하고 분해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뭔지 몰라도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그냥 갔어야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신자들이 해야 할 노릇이고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에게 붙어 있으십시오. 절대로 떨어지지 마십시오. 날이 가면 갈수록 조금씩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의 복입니다. 넘어져도 하나님께 붙어 있으십시오. 자빠져도 무너져도 시험에 들고 심지어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붙어 있으십시오. 하나님 옆에 꼭 붙어 가까이 있으십시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진짜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당합니다. 좋지 않은 표현을 한다면 진짜 신자는 하나님 앞에 뻔뻔스럽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면서도 그러나 또 하나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뻔뻔함이 있습니다. 이게 진짜 신자입니다. 야단맞고 매를 맞아도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지 않습니까?” 하고 큰소리치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여러분이 마음껏 누리십시오. 누리는 자가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아무리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어도 누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를 새해에는 받아서 행복한 한해를 장식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태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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