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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림의 경험 (눅 15:1-10;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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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대공원에서 미아(迷兒)를 찾는 방송을 들어보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모를 잃어버리고 우는 미아를 직접 보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깊은 두려움에 떨며 우는 목소리를 상기해보십시오. 사색(死色)이 되어 우는 그 얼굴을 자세히 기억해 보십시오. 그냥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영혼을 엄습해오는 공포에 휩싸여 우는 어린 영혼의 모습 말입니다.혹시 길을 잃고 안절부절 해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도 외국 여행 중 눈 깜빡할 사이에 함께 간 여행자 그룹에서 이탈하여 낮선 곳에서 어쩔 줄 몰라 방황해 보신 “경험 말입니다.

"아, 지금 내가 잃어버린바 되었구나!" 하는 경험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지리나 장소에 국한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방황에 대한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우나무노(Unamuno)의 단편인 [선한 순교자성 임마누엘](Saint Emmanuel the Good Martyr)은, ‘잃어버린바 됨“의 진정한 의미가무엇인지를 비애스럽게 보여줍니다.

비극적 이야기
이 이야기는 사실상 너무도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이 단편은 어떤 마을의 신부인 돈 임마누엘(Don Emmanuel)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돈 임마누엘은 자기가 섬기는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파경 직전에 이른 교인들의 가정들을 회복시키고 고쳐줍니다.
․걷잡을 수 없는 십대 아이들의 광기를 선도(善導)해 줍니다.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해줍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도와줍니다.
․모든 사람들을 최상의 친절과 헌신으로 돌보아 줍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가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 있었다면, 그들은 언제나 공동체 가운데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쳐져있는 있는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돈 임마누엘이 소유한 경이로운 재능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치 신의 선물과도 같은 그의 목소리였습니다. 주일 아침 예배를 인도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는 온 교우들을 소름끼치도록 전율시켰습니다. 그들 위로 울려 퍼지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온 교우들의 영혼을 휘어잡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교인들의 영혼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습니다.
성금요일 저녁이었습니다. 돈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임종시의 말씀을 목청 높여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자 온 몸을 전율케 하는 흔들림이 온 교우들 사이를 휘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죽어 가시며 절규하셨던 그들의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듯한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위대하고 훌륭한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구의 교우들이 알지 못한 비밀스런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부가 예수님처럼 지금 그의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홀로 방황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불신앙(不信仰) 안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
- 예수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 안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도 이 위대한 신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돈 임마누엘에게 있어서 '영혼의 잃어버림 됨‘은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영혼을 엄습해오는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수없이 자살하고픈 유혹을 받게 됩니다.
어디에서 잃어버린바 되는가?
그러한 방황과 상실감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몇 가지 경우를 들 수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성함 가운데서 ‘잃어버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가장 신성한 의무들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이 어디 있는지 방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돈 임마누엘 신부처럼 말입니다. 신성한 일들을 하면서도 자신의 영혼을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분들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변화들 가운데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미아(迷兒)처럼 느끼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나이를 드신 어른들의 경우에 이런 느낌은 더욱 강할 것입니다. 그분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교회는 안정적이었는데…
․우리 교단 역시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안정적이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단 말이야! 너무도 다양해서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기본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의견들이 갈려! 도대체 서로 동의하는 이슈들이 이제는 없는 것 같아!
․열 사람이 모이면 열세개의 각기 다른 의견들이 나온단 말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자신이 지금 ‘잃어버린바’ 되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린아이들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잃어버린바’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깨어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말입니다.
․아무도 원치 않은 가운데서 태어나고 버려진 아이들이 그들입니다.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손상을 입은 아이들 말입니다.
․신체적으로 학대를 받은 아이들이 그들입니다.
이러한 어린아이들은 방황하고 정신적으로 자신의 상실감(lostness)을 느낍니다.
이상에 언급한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마릴린 몬로(Marilyn Monroe)가 경험했던 자아 상실, 영적 공황(恐慌)에 동감할 것입니다.
어네스토 카데날(Ernesto Cardenal)이 쓴 시(詩), “마릴린 몬로를 위한 기도”(Prayer for Marilyn Monroe)가 있습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 마릴린 몬로라 이름하는 이 여인을 받아주옵소서.
제가 말씀드리는 마릴린 몬로는 전 세계에 있는 마릴린 몬로 들입니다.
(당신은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아실 것입니다.
9살에 강간을 당한 고아 소녀의 이름,
16살에 자살을 시도했던 가계 여점원의 이름)
이제 이 마릴린 몬로들이 당신의 면전에
아무런 화장기도 없는 얼굴로,
그녀의 공보비서관도 대동하지 않은 채로,
취재경쟁을 하는 사진기자들도 없이,
자서전에 서명하는 사인회도 없이
홀로 당신의 면전에 나아옵니다.
저 광활 광대한 우주의 어두움에 직면하는
고독한 우주 비행사처럼 홀로 당신 앞에 나아옵니다.
그녀는 침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채로 말입니다.
형사들은 그녀가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는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전화기를 돌렸지만
저쪽에서 들려오는 친절한 대답은 “잘못 거셨어요”라는
자동 응답기의 소리만 들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주님, 그녀가 그토록 수없이 통화를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그 전화…
주님, 당신께서 그 전화를 받아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띱니다.
․불신앙의 한 복판에서 여러분은 “잃어버린바 되었음”을 느낄 수도 있고,
․교회의 나이 드신 분들처럼, 수많은 변화들 가운데서 자신이 “잃어버린바 되었음”을 느낄 수도 있고,
․학대받거나 착취당한 어린이들이 자신의 “잃어버린바 됨을”을 느끼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느낄 수 있고,
․명예와 성공의 한 복판에서 자신의 “잃어버린바 됨을”을 느꼈던 마릴린 몬로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잃어버린바 되었다고 느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잃어버린바 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다행스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본인은 잃어버린바 되었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잃어버린 바 된 경우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율법 선생님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똑바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이 잃은바 되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선생님들이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받아 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사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그들의 비판에 대해 대답하시기 위해 잃어버린 양에 관한 비유를 들려줍니다. 어떻게 잃어버린바 되는 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잃어버린바 되는가?
양은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입질을 하다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땅을 향하여만 머리를 내렸습니다.
․이 초장에서 저 초장으로 이리저리 입질을 하고 다니다가 그만 잃어버리게된 것입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떠내려가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우정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우정에서 떠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 상대자인 남편과 아내로부터 떠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으로부터 떠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갑자기 그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할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혼자 남았구나 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다 .

예수의 비유 안에 등장하는 양은 그 스스로 '조금씩' '점차적으로‘ 잃어버린바 되어 되었기에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푸른 초장의 싱싱한 풀들에 유혹을 받아 지금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여기저기 입질을 하다 보니 길을 잃게 된 것입니다. 목자와 양떼들이 가고 있는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길을 잃어버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황하고 잃어버린바 된 자신이 문제입니다.
․부부지간의 관계를 상실하게 됩니다.
- 어떤 순간적인 결정에 의해서도 아니고,
- 갑작스런 행동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 자그마한 무관심들과 사소한 잘못된 결정들에 의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 순간적인 결정에 의해 신앙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 갑작스런 결정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 조금씩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삶을 단단하게 세워가려면 일정한 훈련들이 필요합니다.
․주간의 정규적인 예배
․매일의 기도
․작정하여 헌금을 드리는 일들.
이런 일들을 게을리 하게 되면, 떠내려가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여러분이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적으로 그 신앙에 의해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 가기를 멈추면서부터 신앙의 상실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표류하게 되는 것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 점진적인 일입니다. 마치 양이 초원에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풀 맛에 이끌려 가다가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목자로부터 너무도 멀리 떠나온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은 마치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한 대 피웠다고 폐암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갑을 피웠다고 폐암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담배 한 다스를 피운다고해서 갑자기 폐암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 조금씩 피워댄 것이 폐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하루아침에 잃는 것은 아닙니다.
- 셀 수 없는 적은 게으름들,
- 셀 수 없는 작은 결정들,
- 셀 수 없는 작은 무관심들,
-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일들 때문에 신앙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비유의 의미
잃어버린바 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예수님은 오늘 두 개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 양이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된 것처럼 그런 식으로 여러분도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문제는 자신의 부주의나 경솔함, 무사태평과 무심함 때문입니다.

둘째, 다른 한 경우는 잃어버린 동전의 경우로, 다른 사람의 부주의나 경솔함 때문에 잃어버린바 될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동전은 스스로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여인의 부주의 때문에 잃어버려진 것입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이런 식으로 잃어버린바 됩니다. 부모와 선생님들의 부주의와 무심함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의 경험
바울은 딤전 1:13에서 이러한 종류의 잃어버린바 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요 핍박하는 자요 난폭한 사람이었으나 내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긍휼)가 주어졌습니다. 내가 전에 그렇게 행한 것은 불신앙(不信仰)과 무지(無知) 때문이었습니다.”

․한 때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해 대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대항하여 협박과 살인을 꿈꾸었습니다.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면서 예수를 따르는 남자와 여자들을 끌어내어 감옥에 쳐 놓고, 교회를 황폐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무지와 불신앙 가운데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행하고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아직 양의 목자이신 그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잃어버린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 모든 일들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양의 목자이신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때 갑작스레 육신의 눈의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자 그의 영적 눈이 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실성(lostness)을 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가 기대고 있었던 모든 것들,
․그가 영광스럽게 자랑하고 뽐내었던 모든 것들,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자신의 발밑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딤전 1:13에서, “나는 전에 신성을 모독하는 자요 교회를 핍박하는 자요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은, “나는 죄인들 중 가장 최악인 교만과 자만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한 때는 내가 잃어버린바 되었지만 이제는 찾은 바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비 때문에 발견된 것입니다.
나는 양의 목자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은 목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은 목자와 별거(別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왔느니라.” (2:25).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자신이 지금 생(生)의 과정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별거하여 있다면 여러분은 목자 없는 양처럼 잃어버린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와 고양이들은 탁월한 방향감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羊)은 방향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양이 길을 잃으면 그것은 정말로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우리의 상태를 양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모두 각기 제 길로 갔다”(사 53:6).

한 마리의 양이 잃어버린바 되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저앉아 발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잃어버린 양은 잃어버린 동전과 같습니다.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동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저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있을 뿐 입니다. 잃은 양이 발견될 수 있는 길은 전적으로 목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실제적으로 따져볼 때, 잃은 양은 죽은 양입니다. 잃은 동전 역시 죽은 동전입니다.

죽음
두 개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주제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는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
잃어버린바 된 사람들은 무덤에 누워 있었던 나사로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를 찾기 위해 무덤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소리 지르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은 자가 나온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발견되기 위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사로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죽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는 것을 예수님은 제일 즐겨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로부터 여러분을 일으켜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개선하고 개량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도덕적으로 똑바로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죽은 자로부터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좋은 소식의 심장입니다.

부활
우리의 두 개의 비유로 돌아가 보시겠습니다. 잃은 양과 잃은 동전에 관한 비유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이 두 이야기들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합니다.
․양이 목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동전이 여인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동전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찾고 계신 중이십니다.
심지어 여러분은 여러분자신의 잃어버림 됨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힘이 없고 연약할 때, 그리스도는 이미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직도 죄인들이었을 때, 그리스도는 이미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회개
두 비유들은 마지막에 ‘회개’에 관한 언급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은 동전에 관한 비유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두 비유 모두는 ‘회개’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실수를 했습니다. 이제 고치겠습니다.” 하는 종류의 회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죄로 인해 죽은 자입니다.
․나는 잃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에 내게는 전혀 희망도 소망도 없습니다.
․잃은 양이나 동전처럼 나는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온 삶과 생애는 내 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내가 다시 살아야만 한다면,
나의 새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독교인의 삶의 삼중주는 언제나 죽는 일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부활의 좋은 소식이 있고, 그 후에 진정한 회개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부활-회개!
양의 위대한 목자이신 그분께 영광과 존귀가 세세에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류호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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