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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담감이 필요합니다 (왕상 18: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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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옛날과 비교해 보면, 참 비교할 수 없을만큼 좋아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전화기 하나만 보더라도, 옛날에는 손잡이를 돌려서 교환에게 신호를 보내서 몇 번으로 전화를 바꿔달라고 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 시대에 저희 집 전화번호가 18번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지금처럼 긴 전화번호가 아니라, 전화기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지 번호가 간단해서 “65번 바꿔주세요, 23번 바꿔주세요.”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다이얼로 된 전화기가 나왔습니다. 다이얼 전화기는 교환과 연결하지 않고 바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단점은 큰 숫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입니다. 23국에 1321번 같은 전화번호는 그래도 빨리 전화를 걸 수 있는데, 89국에 9089번과 같은 번호는 다이얼이 돌아가는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던, 전화기가 전자식으로 바뀌고, 유선전화기가 무선으로 바뀌고, 집에서 쓰는 무선전화기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무선전화기로 핸드폰에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티비 리모콘으로도 쓰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핸드폰과 같은 이동통신기기도 예전에는 삐삐라고 하는 무선호출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기지국 근처에서 가만히 서서만 통화할 수 있고, 걸어가면서 조금만 벗어나도 통화가 되지 않는 씨티폰이라는 것도 잠시 나왔었고, 핸드폰도 처음에는 그렇게나 크고 무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동할 시간이 없는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핸드폰이 아령과 같은 좋은 운동기구가 되어주던 친절한 핸드폰의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작아지고 기능도 많아져서, 핸드폰으로 게임도 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고, tv도 볼 수 있는 첨단 기능으로 무장한 핸드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통신 부문만 아니라, 자동차라든지,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이라든지, 의료기술이라든지, 모든 것이 지금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살기 좋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좋은 시대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성세대들에게 지금 시대가 더 살기 좋은지, 옛날이 더 좋은지 물어보면, 대다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옛날이 더 좋았다고 그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첨단과학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답변들이 있겠지만, 그 이유를 요약해 보면, 바로 부담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더 살기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문명의 발달과 함께 부담감도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 부담감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더 힘들어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먹고사는 것 자체가 힘이 들었습니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밥을 제대로 못 먹고살아서 그렇지, 그래도 먹을 끼니가 있으면, 그것에 감사하고, 자녀들이 많이 있어도 자녀 교육에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들 돈 벌어서 학교에 다니고 하니까 큰 걱정은 없이, 먹고사는 데에 바쁘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대에는 먹는 사는 문제는 이제 많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결식 아동들도 있고, 노숙자들도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이 되어서,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상은 살기 편한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가 예전 시대의 사람들만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부담감 때문입니다. 수입은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이 늘었지만, 그만큼 지출할 곳도 많아서 가계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일단은 자녀 교육비가 만만치 않게 많이 들어갑니다. 옛날에는 일곱 명이든, 여덟 명이든 그냥 낳아놓기만 하면,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잘 크고, 큰 아들, 큰 딸이 희생을 해서 동생들 뒷바라지 해서 공부를 시키고 그렇게 했었지만, 지금은 자녀가 셋만 돼도 세 명이나 되는 자녀를 어떻게 공부시키려고 하느냐고 걱정해주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유치원에 보내는 것도 결코 녹녹지 않은 비싼 교육비에 손을 떨면서 줘야 하고, 초등학교에 다녀도 피아노 학원도 보내야 하고, 방과 후 지도와 같은 여러 학원, 교습소로 보내야 하고, 입시 전쟁 중에 있는 중고등학생들을 두고 있는 부모님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또 비싼 학원비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학원비가 비싸고 아깝다 보니까, 시험 기간이 되면 “주일에도 교회보다 학원에 가라, 방학 때도 수련회보다는 학원이나 빠지지 말고 다녀라.” 그렇게 하게 됩니다.

  대학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3 때는 어떻게라도 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지만, 막상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등록금 고지서를 받게 되면,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국립대는 등록금이 백 만원이 넘지를 않았었고, 사립대를 다녔던 저는 120만원 정도 냈던 것 같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도 190만원 정도를 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통해서 우리가 들은대로, 이제 등록금이 연간 천 만원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국립대인 서울대도 46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내야하는 학과도 있고, 사립대학에서는 이미 한 학기에 5백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내야 하는 학과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5백만원만 내면 끝나는 것도 아니고, 기숙사비라든지 다른 비용도 내야 하니까, 도무지 평범한 직장생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이 됐는지 모르지만, 예전보다 훨씬 큰 부담을 안고, 세상 살아가는 것이 버겁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나타나는 현상이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게 되면 교육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는 아기를 낳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가 되어서,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있고, 그에 따른 영향에 대해서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듣게 됩니다.

  여하튼, 우리는 이렇게 많은 부담감 속에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녀교육에 대한 부담감, 계속해서 인상되는 생활비에 대한 부담감, 취업과 퇴직에 대한 부담감.. 수많은 부담감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담감이라고 하는 마음의 짐을 벗기 위해서, 자녀를 낳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부담감에서 어떻게든지 탈출해 보려고 하는 그런 시도들을 하게 되고, 세상에서 워낙 많은 부담감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다 보니까, 우리는 어느 새 부담감이 없는 것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식당도 부담없는 가격이라는 글자가 붙은,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주는 식당을 찾게 되고, 사람을 만날 때도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남녀가 만날 때에 결혼을 생각하고 진지하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담없이 만나서 헤어질 때도 부담없이 헤어질 수 있는 그런 가벼운 만남을 선호하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연애와 결혼은 당연히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가다 보니까, 이런 모습이 교회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세상에서 많은 부담감과 무거운 짐 속에서 살아가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는 주님의 그 말씀만 붙잡고, 교회에서는 어떤 짐도 지지 않고, 부담없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에 가게 되면, 금방 눈에 띄어서 등록을 하라고 하고, 같이 일하자고 하고 그렇게 귀찮게 하니까, 작은 교회가 아니라, 큰 교회를 찾아갑니다. 큰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 잘 모르고 하니까, 등록을 하지 않고, 누가 물어보면 잠시 다니러 왔다고 말하면서 그냥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만 드리고 집에 가는 그런 분들이 한국교회에 많아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상황의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어느 교회에 다른 교회에서 전입해 온 성도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이 어느 날부터인가 교회를 결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아보니까, 이름도 뚜렷이 없는 어떤 모임에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단체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면, 한 번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 생활도 그것은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고, 기성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배도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육체는 아무렇게 다루어도 상관이 없다고 그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부담이 없고 좋겠습니까? 그래서, 그곳에서는 부담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그 모임에 나간다고 하는 그런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 것이겠습니까? 그런 것을 가르치는 곳은 당연히 교회일 수 없고 이단의 모임일 뿐입니다. 우리의 귀에는 매력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단들의 사상입니다.

  도입이 많이 길어졌는데, 이제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대결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16절부터 40절까지가 해당되는 본문인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해서 다 봉독하지 않고, 20절에서 24절까지만 읽었지만, 16절 이하 40절까지를 본문으로 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아합과 이세벨의 통치 아래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 땅을 가뭄 들게 하셨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서 그들은 충분히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아합왕과 엘리야 선지가 만나게 됐습니다. 아합왕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살기 등등하게 가뭄의 책임을 엘리야에게 전가시켰습니다. 하지만,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왕 앞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이 가뭄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재앙이라고 질책하면서, 갈말산에서 누구의 신이 참 신인가를 가려내는 대결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운명적인 갈멜산에서의 대결이 시작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갈멜산으로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이 모였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도 모였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450:1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이면서, 대결의 결과를 주목하고 있는 백성들 앞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참 신이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 속에 있게 됐습니다. 그에게 부담감이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마음이 아주 편안했겠습니까? 당연히 부담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잊어버리고,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면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대결의 결과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그 결과에 따라서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하나님을 섬기고, 행여나 바알 선지자들이 어떤 조작이라도 해서 바알이 참 신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면, 백성 전체가 바알 숭배자들이 되어지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에게는 성경에는 표면적으로 그 부담감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내적인 그런 부담감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들자면,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이 될 것 같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에서도 오늘 본문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했느냐면, “다 싸울 것 없이 1:1로 나랑 싸우자. 그래서, 지는 나라가 이기는 나라의 종이 되게 하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감히 나가서 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로는, 골리앗의 체격이 너무 크니까 무서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벌 떨고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보다는 골리앗보다 골리앗이 내건 그 조건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골리앗의 체격 때문에 도저히 싸울 엄두가 안 나기도 했겠지만,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지게 되면, 나라 전체가 블레셋의 종살이를 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왕에게도 어찌 싸움 잘 하는 장수가 없었겠습니까?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장수들이 왕실에서 왕의 근위병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이, 단 한 번 골리앗과의 대결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출전해야 하는 그 단 한명의 장수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부담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그렇게 조롱을 해도 감히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라고 하는 한 시골 촌뜨기 소년이 나타나서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윗이 골리앗과 맞붙게 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에 숨을 죽이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소년이 만약에 지게 되면, 자신들은 이제 꼼짝없이 남의 나라 종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긴장에 긴장을 하고, 그 싸움의 결과를 주시했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담고 있는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가 사자도 찢어 죽이고, 곰도 좀 때려잡았다고 해서, 아무 부담감도 없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싸움에서 지게 됐을 때, 자기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말로 할 수 없는 부담감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바알 선지자들과의 한 번 대결로 인해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어 지고, 하나님 나라의 판도가 바뀌게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함께 있으면서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어떤 사람도 없이 홀로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한없는 부담감으로 그에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부담감에 대해서 외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많은 부담감은 있지만,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부담감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용기를 내어서 이스라엘 앞에 서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이 참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실패한 후에,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온 이스라엘 중에 선포하기 위해서 무너진 단을 쌓았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단을 사용하지 않고, 예전에 하나님을 예배하던 때에 사용되어졌던, 지금은 이미 무너져 황페되어 있는, 단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은 물로 젖어 있는 그 제단을 불로써 완전히 태우시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고, 하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엘리야 선지자가, 자신의 짐이 너무 버거워서, 그 부담감으로 인해서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외면하고 피해서 도망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부담감으로 인해서 골리앗과의 대결을 피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됐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부담감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소명을 외면해 버렸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나라가 되고, 다른 나라에서 종살이나 하는 그런 모습으로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우리의 삶으로 끌어 들여서, 만약에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교회에서 사명을 따라서 일하는 것이 너무 큰 부담감으로 작용해서,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주일에 와서 예배만 드리고 집에 가서 편히 쉬는 그런 삶만 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차량운행도 하지 않고, 주차를 도우면서 수고하시는 주차위원 집사님들도 없고, 안내․영접위원도 없고, 찬양대도 없고, 방송실에서 수고하시는 분도 없고, 교회학교에서 섬기는 교사 선생님들도 없고... 다들 부담감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을 외면해 버린다면 이 교회는 결코 교회로 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이 부담스럽고, 때로는 나를 짓누르는 것과 같은 그런 무거운 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 부담감으로 인해서 우리의 사명을 외면해 버리게 된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지지 못하고, 맛 잃은 소금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밟혀지는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어어모축제가 선포되었고, 이 2월 한 달은 어린이와 학생들을 전도하는 데에 역점을 두는 달로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 말씀은, 이 시간에 전도에 관해서 말씀을 준비해서 전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실, 전도에 관한 말씀은 누구에게나 부담이 가기 마련입니다. 전도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지상대명령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맹목적으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니까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좀 더 근본적으로 접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전도해야 한다고 말씀을 전하기 이전에, 먼저 부담감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전도한다는 것! 우리에게 충분히 부담감을 줄 수 있습니다. 교사로 섬기고, 여러 모양으로 교회에서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서 많은 부담감을 갖고 살아가는데, 교회에서까지 부담감 속에서 섬겨야 하느냐고 얼마든지 얘기하면서 부담감을 외면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부담감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아무 부담감 없이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부담감 때문에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그 마음을 뒤로하고, 부담감을 안고 일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필요합니다. 그리고, 부담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거운 짐만 되고, 그래서, 부담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제거해 버려야만 하는 그런 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담감은 때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제게 있어서 가장 큰 부담감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해야 할 때마다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는 밥을 먹지 않습니다. 워낙 부담이 되니까, 밥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먹어도 소화도 안 될 것 같고, 밥 먹을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금식을 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금식뿐만 아니라, 말씀을 전하기 전에는 부담이 되니까, 화장실에도 자주 가게 됩니다. 어떨 때는 너무 부담이 돼서 계속 배가 아파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 변기에 세 번씩 앉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 전하는 것이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아서, 밥도 잘 먹고, 화장실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보다, 현재의 모습을 저는 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부담감이 없어서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부담감을 갖고 할 때보다 좋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잘 모셔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는 아들과, 전혀 그런 부담감을 갖고 있지 않는 아들이 있다고 한다면, 어느 쪽이 부모님을 더 잘 모시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부담감을 갖고 있는 아들입니다.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 부담감으로 인해서, 더 마음을 쓰고 노력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효도라고 하는 좋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담감은 반드시 없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라, 부담감이 우리 삶 속에서 선한 작용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로 작용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부담감마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2월 19일은 어어모축제로 모입니다, 전도작정서를 작성해서 내십시오.” 이런 얘기들이 우리에게 부담감을 안겨주지만, 이런 말들이 부담이 되어서 이 부담감을 거부해 버리고, 피하려고만 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비록, 부담스럽다 하더라도, 이 부담감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부담감을 받아들이고, 나의 부담감도 사용하셔서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 어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도 부담감이 없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는 아브라함도, 막막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나이 80이 넘은 노인 모세 역시, 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간다는 것이 틀림없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게 되면, 사자굴에 던져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다니엘 역시, 평소에 하던대로 기도한다는 것이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해야 하는 예수님도 역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 말로 할 수 없는 부담감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그 어떤 분도 부담감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어기거나,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부담감 가운데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부담감 가운데서도 자신의 일을 외면하지 않고 일한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부담감 속에서도 자신의 소명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확장되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어나가고, 우리가 해야할 몫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고 전할 때에 나름대로의 원칙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주일저녁예배 시간에는 부담이 되는 말씀은 전하지 말자는 것이 원칙입니다. 저녁 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이미 아침부터 오후까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신 분들이 대부분이고, 월요일이 되면, 또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런 분들이 예배드리는 저녁 예배 시간에는 무거운 주제를 갖고 부담스러운 내용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주제도 가벼운 주제를 선택하고, 부담없이 좀 웃기도 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어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물론, 애를 써도 그렇게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만, 나름대로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 지금껏 지내왔습니다. 수요일이나 다른 시간에는 무거운 주제도 얘기하고, 좀 진지하고 심각한 말씀을 전하더라도 주일 저녁 시간만큼은 좀 가벼운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해왔지만, 이제 저녁 예배가 아니라, 오후 예배가 됐으니까, 저녁 예배에 대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부담스럽지 않은 말씀만 듣게 되면, 듣기에는 편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 신앙생활에 유익하지는 못하다는 생각을,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부담감에 대해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부담없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부담감이라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목사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게 될 때, 때로는 형식적이고 인사치례로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사람들이 너무 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은혜 받았다고 하고서는 돌아가서는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은혜 받은 사람들은 웃으면서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사님과 인사할 때에 웃지도 않고 인상을 쓰면서 고민하면서 돌아가는 분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돌아가는 사람, 마음에 부담감을 안고 가는 사람! 그 사람이 부담감 속에서 고민하는 가운데 그 삶이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기는, 비록 부담스럽기는 하겠지만, 부담감을 오히려 더 안고 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어어모축제가 선포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부담감을 갖는 것입니다. 부담감을 갖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어린이들을 전도하고 학생들을 전도해서 그날에 손잡고 나올 수 있을지를 부담을 갖고 고민했으면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어어모축제를 놓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전혀 부담감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축제를 놓고 같이 부담감을 갖고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부담감을 갖고 있는 사람의 그 부담감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오늘도 분명히 펼쳐나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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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우리가 세상 속에서 많은 부담감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아무런 부담감 없이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만 하는, 그런 마음이 있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부담감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마다, 우리의 짐을 내려놓고 싶어하게 되지만, 하나님,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힘주셔서, 부담감 속에서도 우리의 해야할 바를 감당하며, 하나님 앞에 신실한 모습으로 서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부담감 때문에 우리의 짐을 내려놓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마음에 새기면서, 부담감을 내려놓기보다, 우리에게 주신 부담감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 원합니다. 또한 부담감이 부담감과 고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담감을 통해서 우리가 애쓰고 노력함을 통해서 부담감을 통한 열매들이 맺어지게 하여 주시고, 특별히 어어모축제가 선포된 이 때에, 귀한 전도의 열매들이 부담감을 통해서 맺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부담감까지도 사용하시고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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