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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쓰신다 (요 14: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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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 제자에 대해 말씀하겠다. 먼저 유다다. 유다의 뜻은 찬양이며, 성경에 11번 나온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야곱의 넷째 아들이다. 또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유다도 있다. 예수님의 형제 유다도 있고(막6:3), 본문처럼 “야고보의 아들 유다”(눅6:16, 요14:22) “다대오”(마10:3, 막3:18)도 있다.

  또 시몬이다(눅6:15, 행1:13). 셀롯(Zealot, 열심당) 시몬이다(눅6:15, 행1:13). 이들의 행적과 말씀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이 과거에는 무슨 직업을 가졌고, 어떻게 부름 받고, 어떻게 사역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 충성한 제자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외국으로 향한 최초의 사도 중, 한 사람이었다. 외국 왕 앞에서, 직접 복음을 전한 최초의 사도였다. 유다는 나다나엘과 함께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와 페르시아 북부지역에 복음을 전하다가, 카스피해 근처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시몬은 아프리카 북부 지역과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했고, 잉글랜드 지역에서 순교했다. 시몬과 유다 다대오는 열심당 출신이었다. 그러면 열심당은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에 5개의 분파가 있었다.

(1) 바리새파

스스로 ‘구별된 자’라는 말로,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며, 자신들만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형식과 위선에 빠져서, 결국 예수님을 죽였다.

(2) 사두개파

바리새파에 대항하여 일어난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제사장과, 귀족사회의 일원으로 물질주의자였다. 종교적으로는 자유로운 입장을 가졌다.

(3) 에세네파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자신들이 새로운 언약공동체를 이루는 남은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4) 헤롯당

종교적 분파가 아니라, 정치적 분파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인으로 유대인의 왕이 되었다. 그래서 로마의 권력과 혜택을 누리는 헤롯과 그의 지지 세력들로, 로마의 지지자들을 말한다.

(5) 열심당(제롯)

주전167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대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이 가장 존중히 여기는 성전에 들어가, 유대인이 제일 싫어하는 돼지 피를 뿌리며 성전을 더럽혔다.

  이때 마카비가 일어나 이들을 쫓아내고,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왕국을 세우게 되었다. 마카비의 모든 이념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이다. 이교 국가인 로마와 그 국가가 신봉하는 다신교에 대해,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배척했다. 종교심도 강했다. 테러행위와 암살에 가담했다.

  로마정부로부터 유대인을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대원이라고 믿는, 극렬 민족주의자였다. 하나님 외에는 어떤 왕도 없고, 성전세금 외에는 어떤 세금도 없고, 열심당원 외에는 어떤 친구도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로마 정권에 항쟁하였다. 마사다에서 전사한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이다.

  로마에 타협하거나 비굴하게 항복하기보다는,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가 죽겠다고 말한 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열심당 출신은, 작은 야고보, 유다, 시몬, 가룟 유다다. 그런데 헤롯의 하수인인 세리 마태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매국노와 애국자들이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극과 극의 사람, 서로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는, 아무리 다른 배경과 생각과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도, 하나가 될 수 있으며,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과격한 무장혁명 주의자도 복음으로 변할 수 있다.

1. 이런 열심당원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랐을까?

(1) 예수님의 성전 청결사건을 보고(요2장), 예수님의 의로운 용기와 개혁적인 행동에 감동했다.

당시 성전에서 돈을 바꾸거나 짐승을 파는 상인은, 오늘날로 말하면 마피아와 연관을 맺고 있었다.  물론 제사장들도 한통속이 되어, 서로 장사를 돌봐주고, 일정 지분의 이익을 챙겼다.

  이런 먹이 사슬을 감안하면, 그 누구도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성전제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인들의 더러운 거래와 비리를 모두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배후세력이 무서워서 개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의 관행으로 여겨지던 불의의 사슬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적하셨다.

  이것은 당시 종교지도자, 상인, 기득권자, 마피아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한판 승부를 거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질책하셨다. 예수님의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는 성전 청결사건은, 이들이 보기에 너무 통쾌했다.

(2) 신성한 왕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은 특별히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약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친구가 되셨다. 갈릴리에 거하는 민중들을 위하여 이적을 베푸시고, 그들과 함께 해주셨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폭로하셨다. 형식적이고 생명력 없는 율법종교에 대해 공격하시면서, 삶으로 실천하는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셨고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은, “민족의 해방을 가져오실 메시아다”라고 믿게 만들었다.

(3) 이적을 직접 보았다.

병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며, 물이 포도주로 변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직접 보았다. 귀신도 쫓아내셨다.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이런 능력을 본 일이 없었다.

(4)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라고 하셨다(요3:13).

유대의 선지자들은 하늘의 인자가 이 땅에 내려와, 사악한 무리들을 멸하고 신성한 왕국에서 공의를 펴 영원히 다스린다고 예언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라고 하니 따랐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지도자로 모시고, 이제까지 힘써오던 일을 성취하고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자기들이 추구하던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예수님을 통해 얻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면서, 점점 자신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시는가 하면, 군중들이 왕으로 삼으려고 하면 피하신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이 “호산나, 호산나”하면서 환호하는데, 나귀를 타시고 겸손히 입성하시면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하셨다.

  이렇게 하면,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만다고 안타까워했다. 열심당 출신 제자들은 이제 칼을 포기하거나, 예수님을 포기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경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마 가장 크게 실망한 가룟 유다가 먼저 극단적인 결단을 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거나,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인위적으로 자극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기에, 위급한 상황에 예수님을 끌어넣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적 능력으로 행동하리라 생각해서, 예수님을 팔았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고 했는데, 가룟 유다의 잘못된 열심은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했다. 이와 달리 다대오 유다는 예수님께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 요14장은 예수님의 고별 설교인데, 도중에 이렇게 질문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22)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메시아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신데, 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지 않으시는지 너무 답답해서, 로마인에게 그 능력을 보여주어, 쫓아내야 할 때가 아니냐고 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23) 나는 네가 원하는, 세상의 왕이 되기 위해 오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 원수들을 모두 깨부수는 나라가 아니다.

2. 내가 변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면, 세상은 변화되니, 유다 다대오 “너부터 변화돼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변화되어 순종의 길을 걸으면, 세상은 변한다는 말씀이다. 내가 변화되면, 세상은 변한다.

  세계 사상의 양대 흐름은, 히브리사상과 헬라사상이 있다.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헬라사상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고, 히브리사상은 순종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리스사상의 영향 받은 사람들은 이성을 중시한다. 먼저 납득이 되어야 행동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히브리사상은 순종해야 이해한다는 사상이다. 유태인 교육제도는 우리와 다르다. 이스라엘 초등교육기관인 “벧(집) 하세페르(그 책, 성경)” 성경의 집에서는 허구한 날 말씀을 암송하게 한다. 무조건 받아들이게 한다. 주일 학교에서 제일 좋은 교육은,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시켜야 한다.

  그 단계를 마치면, 중고등학교 단계인 “벧(집) 탈무드(배움, 훈련)” 배움의 집에서 말씀을 적용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외운 하나님 말씀을 실제 삶에서 순종하고 적용해 본 다름에, 그 경험을 나눈다. 외운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보고, 결과를 서로 나누었다. 외운 말씀을 생활에 옮긴다.

  그 단계를 마치면 대학교육은 “벧 미드라쉬(설명, 해석의 집)” 깨달은 것들을 해석하여 정리한다. 이스라엘 교육제도의 접근방법은 항상 순종이 먼저다. 암송하고 순종하고 난 후에, 깨달을 일들을 가지고 설명하고 정리한다. 이렇게 순종하면 깨닫게 된다는 사상이 히브리 사상이다.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자로, 애굽의 바로에게 보내셨다. 이때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낸 종이라는 증거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헬라사상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출3:12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무슨 말씀인가? 네가 순종하여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예배드릴텐데, 내가 너와 함께 하는 물증이다 라고 하였다.

  유다 다대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으나, 받아들였다. 그래서 가룟 유다와 같은 길을 가지 않았다. 시몬은 유다보다 더 투철한 열심당원이었다. 성경은 그에게 셀롯(Zealot, 열심당)이라고(눅6:15, 행1:13)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다. 그 귀를 떨어뜨린 사람이 (요18:10)베드로라고 하였다. (눅22:38)“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눅22:49)“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라고 했다. 이 사람은 시몬이었을 것이다.

  열심당원들은 평소에, 칼을 품고 다녔기 때문이다. (행1:6)“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학자들은 시몬이 물었다고 한다. 민족 해방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이 질문부터 했을까?

  이들의 몸은 예수님과 같이 지냈어도, 마음은 딴 데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령을 받아들이자 그들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나님의 생각과 영을 받아들이면 변화하게 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다. 과격한 무장혁명주의자도, 복음으로 변화될 수 있다. 누구나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는 변화될 필요가 없고, 변화될 수도 없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마귀에게 속지 말라. 주님 안에서 변할 수 있다.

  기독교는 회개를 강조한다. 회개는 내가 죄인이라는 뜻이며, 가만있으면 망할 인생이 되기에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명하셨다. 회개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된다. 성령님께서 역사 하실 때, 사람은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반면 악한 영이 역사하면, 굉장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집불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고집불통이 된다.

  성경은 인간을 가리켜 ‘그릇’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다(롬9). 왜 그릇으로 표현했나? 그릇의 본질은 수용성이다. 그릇은 담는데 있다. 직접 활동을 할 수 없다.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행위’는 수용성이 아니다. 적극성이며 능동성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것들을, 그릇처럼 받아들이면 된다는 뜻이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자는 수용성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영접하는 자와 그 이름을 믿는 자와 동의어인데, 다 받아들임을 말한다. 믿음은 수용성을 말한다. 믿음이 없다는 말은 수용성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몹시 미워하셨다. 수용성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악한 마귀는 지금도 우리들이 이 수용성을 버리고,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만족적인 자아로 똘똘 뭉치도록 만들어가고 있다.

3. 받아들이면 어떻게 변화되나?

(1) 열심당원이 반대자와 화해했다.

마태와 열심당원이 어떻게 서로 협력할 수 있었나? 세리는 로마제국에 팔렸던 사람이고, 열심당원은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었다.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다. 분명히 마태는 열심당원의 암살대상자 명단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아주셨다. 복음은 화해의 능력을 증명해 준다. 원수지간인데, 어떻게 화해할 수 있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된다.

(2) 시몬의 미움은 사랑으로 변했다.

극단주의자는 내부에서는 애국자 소리를 듣지만, 대외적으로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다. 이슬람의 저항운동 단체 하마스는 아랍 사람들에게는 영웅이요 애국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슬람권 바깥의 사람은, 하마스 때문에 중동에 평화가 오지 않는다고 느낀다. 과격하다고 느끼고 있다. 또 국제테러 단체 알카에다 요원들도, 아랍권에서는 애국자요 영웅이지만, 외부에서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다르다.

  역사가들은 하나같이 로마가 엄격히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었다고 한다. 로마는 관용적인 제국인데 열심당은 그 로마를 상대로 무장혁명과 테러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주후 73년 마사다에서 마지막까지 항쟁하다가, 실바 장군의 10군단에게 완전히 몰살당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열심당만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다. 이래서 극단이 무섭다, 남는 것도 없이, 그저 자기 이념 하나 붙들다가 결국 모두가 죽었다. 칼을 포기한 시몬은, 계속 예수님을 좇았다. 정치적인 야심은, 온전한 포부로 바뀌어 부드러워졌다.

  사랑의 사도로 변했다. 호전적 기질은 전도의 동기로 변했다.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로마가 아니라 사탄과 죄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3) 열성적으로 헌신하게 된다.

열광 자체는 나쁘지 않고 좋다. 시몬의 열심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민족에 대한 열정이, 복음에 대한 열심으로 바뀌었다. 세상나라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으로 확대된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던 열심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열심으로 바뀌었다. 유다와 시몬의 삶에서 열심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는 더 중요하다. 열심은 올바른 목적을 가져야한다. 바울도 율법에 대한 열심히 있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열심이었다.

  유다와 시몬은 민족에 대한 열망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은 다음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주님께 드렸다.

우리들도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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