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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누구관대 (출 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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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많이 대하게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한스 워드라는 사람입니다. 바로, 미국의 미식축구 슈퍼볼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한국인이고, 아버지가 흑인입니다. 2살 때 미국으로 건너 갔고, 아버지와 헤어지고 나서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가 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늘 아이들에게 놀림의 대상,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혼혈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경계선상에서 살아갔던 인물입니다.
  그는 때로는 어머니를 몹시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김영희씨는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하루 16시간, 거의 잠자는 시간 외에는 세 개의 직업을 돌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정부에서 주는 구호물품도 아들을 당당히 키우고 싶었기에 거절했습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 아들은 자랑스럽게도 대한민국의 아들로서 미국 슈퍼볼의 MVP로 등극하고 대통령을 만난 기사를 접하기도 했습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반은 미국인이고, 반은 한국인인데 나는 이 둘의 장점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는 반은 한국인이라는 것이 몹시 싫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당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반은 미국인이고, 반은 한국인이라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혼혈이라는 것도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많은 혼혈아들이 겪는 문제를 우리는 그를 통해서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혼혈인으로 살아가는 이들만이 이런 열등감에 시달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아니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중년여인이 결혼한 이후에도 열등감과 두려움 속에 살아갔습니다. 남편이 자신을 버릴까봐 늘 두려웠습니다. 자식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웠습니다. 원인을 따져보니, 이 여인은 낳자마자 친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갖고 있었습니다. 나를 낳은 어머니가 낳자마자 낳자마자 나를 길거리에 내 버리다니... 그 씻을 수 없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그녀는 열등감, 두려움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당당함이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의기소침해 집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의 인도로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나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사실 앞에 그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 받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외모 때문에 열등감을 갖고 삽니다. 좀 남과 다르게 생겼다는 것으로 대인기피증을 갖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합니다. 어떤 이들은 직장에서 퇴직한 이후에 패배의식을 갖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후, 친구의 배신으로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당한 이후에 패배의식으로 괴로워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 한 인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4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애굽의 공주에게 입양되어서 당당하게 살아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40세가 되던 해에 거리에서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감독관에 의해서 학대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주먹을 휘둘러서 애굽 감독관을 죽입니다. 그는 자기 동족의 대단한 지지와 후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길거리에서 싸우는 유대인들을 말리다가, “네가 어제는 애굽의 감독관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들을 죽이려고 하는구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 순간 모세는 자기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친 것을 알고 도망을 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는 양을 치는 목동으로서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로써 처가살이를 40년이나 하게 됩니다. 40년 동안 그는 많이 변했습니다. 혈기왕성하던 모세가 80세의 노인으로 변했습니다. 오늘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열등감에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10절,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아멘.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오십니다. 양 치는 모세를 향해서 “모세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곤 하나님의 백성이 엄청난 우고를 당하고 있는데 그 백성을 애굽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무슨 대답을 합니까?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내가 누구관대 감히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낼 수 있단 말입니까? 내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라고 항변합니다. 나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실패한 패배자입니다. 나는 시골 목동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 능력도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대답입니다. 그는 무기력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아마 40년 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셔서 “모세야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야 돼” 라고 말씀하셨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하나님! 사람 한번 잘 보셨습니다. 저 밖에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모세가 그런 입장이 아닙니다.

  열등감의 증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등감은 자기 상실을 가져옵니다. 우리 또한 때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이렇게 비굴하게 살아야하나, 이건 내 모습이 아닌데 이건 내 모습이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내 인생의 목적을 바로 깨닫지 못한데서 옵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목적을 모를 때 우리는 인생에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자기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스겟 소리입니다만, 예전에 어떤 한 젊은이가 여행을 하게 되었답니다. 길을 가다가 밤이 어두워 주막에 들렀습니다. 그는 잠은 안 오고, 목이 말라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켜 먹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곳에 머무르던 스님 한 분이, 그도 목이 말랐는지 막걸리 한 잔 을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스님이 무슨 막걸리를 먹습니까? 당신, 땡중이군요.”하고 놀리기만 하고 주지는 않더랍니다. 이내 곧 취기가 돌아, 쿨쿨 코를 골며 잠을 자는데, 소리가 하도 요란해 스님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소님은 잠자는 젊은이의 머리를 깎아 버리고, 옷을 벗기고는 자기 승복을 입혀버렸습니다. 
  젊은이가 한참 잘 자고 아침에 깨었는데, 머리는 허전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옷을 보니 승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는 순간 이렇게 말했답니다.

  “스님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 갔는고...”

  세상에는 나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실낙원! 곧 에덴을 잃어버렸습니다.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복낙원은 무엇입니까? 다시 낙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열등감의 다른 증상은 자기 불신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 1절에 보니까. 모세가 “내가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려고 그들을 나오라고 한들 누가 내 말을 믿겠습니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도 내 말을 못 믿겠는데 누가 나를 믿겠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자기 불신입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감, 자긍심이 다 허물어져버렸습니다.

  또 다른 열등감의 증상은 무력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입니다. 이것은 겸손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무기력함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40년 전의 모세의 모습을 사도행전 7장 2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아멘. 그는 학술과 행사가 다 능했던 사람이었는데, 40년 후의 그는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한 자입니다. 입이 뻣뻣합니다.” 그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우월하게 평가하는 것을 과대평가라고 합니다. 또한 자신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것을 과소평가라고 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시라고 출애굽기 4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나 한사람, 한 사람은 매우 귀중하고 중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께 얘기 해 드립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세상에 공장에서 막 찍어내는 것들을 상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나랑 똑같은 작품은 없습니다. 작품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을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상품은 너무 많이 찍어내면 값이 싸지고, 농산물도 너무 많이 산출하면 값이 싸집니다만, 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올라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가끔 우리 집에 누가 전화하면 우리 아들보고 “목사님이십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목소리가 비슷할 뿐이지 저와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오직 세상에 나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주 존귀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시고 고난당하셨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살림을 입었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보니,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맞바꿔진 사람이 바로 나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위스인으로 어니벨츠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키가 작았습니다. 그의 키는 120cm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늘 놀림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인생을 꿈꿨지만 역시 거기서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가든 늘 호기심의 대상, 이야기 거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절친하던 한 사람이 그를 교회로 초청했습니다. 그는 그날 교회의 모임에 가면서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호기심과 눈요기의 대상이 될 까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 모임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따스한 사랑의 눈길로, 진정한 기쁨으로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그를 비웃든가,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진정 거기가 내가 있을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들의 사랑을 통해서 그는 자기의 자의식을 조금씩 회복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설교를 듣는데, 하나님의 계획이 나의 삶에도 있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 같은 난장이에게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구나, 하나님의 계획이 있구나.’ 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갑니다. 적극적으로 모든 삶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을 가두었던 열등감의 사슬을 풀어버리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장기적인 변화의 삶을 살았고 능력을 인정받아서 아프리카 어느 교육기관의 책임자로 부임하기에 이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실패는 열등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승리는 이미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열등감의 울타리, 사슬을 풀고 나와서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히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일 필요할까요?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아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이것처럼 큰 확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도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하나님이 내게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만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우리는 불안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리빙스턴이 그 험난한 아프리카에서 몇 십 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당당히 “마태복음 20장 20절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 여호수아 1장 5절에 보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처럼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시편 23편 4절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면 여러분은 승리하는 인생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 12절 후반부에 보니,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 낸 이후에, 네가 다시 이 곳, 호렙산에 와서 예배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굽해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곧 호렙산입니다. 그는 거기서 백성들을 머무르게 하고, 산 정상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십계명 판을 가지고 내려옵니다.

  오늘도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66권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New Testment, 즉 새로운 약속, Old Testment 지나간 약속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경히 여기는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내가 너희를 인도하러 왔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너를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고 묻지 않겠습니까?” 모세는 말합니다. “그 분은 바로 여호와 야훼이시다!” 그랬습니다. 야훼란 말은 여호와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런 뜻입니다. I AM WHO I AM, I AM THAT I AM. 즉, 누가 나를 지은자도 없고, 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원히 존재하는 자다, 그 분이 바로 주님이시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분이시고 변함이 없는 분이고, 전능하신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약속을 주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온통 허물어져도, 이 약속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견고히 설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협력자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16절에 보니,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네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합니다. 또 18절에 보니, “그들이 내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을 모아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요 하나님.. 누구와 함께 가란 말입니까?” 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말에 능한 아론과 함께 가라. 또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가라.”
  이 장로들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 리더들을 의미합니다. 그 장로들이 너를 도와 줄 것이다, 장로들과 함께 가서 바로에게 요구하라, 당당히 요구하라, 내 백성을 보내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서 그의 협력자들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을 위해서 마요한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누가를, 예수님을 위해서 12제자를 준비하셨습니다. 오늘 모세를 위해서 장로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목회도 목사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목회자들끼리 하는 게 아닙니다. 장로님들과 함께 동역하는 것,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사님, 집사님, 제직들이 그 일을 거들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결코 목회는 혼자 할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혼자라고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구역장이라면 당신을 도울 분이 반드시 구역 안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예비해 놓은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협력자를 세우시는 이 섭리를 믿고 당당히 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세는 장로들과 협력할 때 출애굽의 위대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풍부의식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이 내 곤핍함을 채우신다는 것이 풍부의식입니다. 성경 21절, 2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찌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아멘.

  모세는 얘기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요. 이 가난한 백성, 이 노예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어찌 40년을 지내란 말입니까?” 그 때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결코 너희들을 애굽에서 결코 빈손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손에 가득히 채워서 내 보낼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말씀대로 애굽인이 가진 모든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접수했습니다. 은과 금과 패물들을 다 취해서 다 가지고 광야로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지금도 가난하니 내일도 가난할 것이다! 믿습니다!” 절대 그렇게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가난하고 힘들더라도 내일은 풍부할 것이다! 지금은 병약할지라도 내일은 건강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빈손으로 내보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풍성히 채우시는 그런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회계사가 아주 가난하지만 진실한 회사를 찾아가서 세금 보고서를 대신 작성해 주게 되었습니다. 회계사는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대해서 목록을 이야기해 주시오. 당신이 얼마나 세금을 내야할지 내가 계산해 드리겠소.”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글쎄요... 나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다 계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첫째,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영생입니다. 둘째는, 크고 아름다운 집이 천국에 있습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은 감히 빼앗을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 하늘의 평화를 나는 내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남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즐거움이 내겐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여섯 번째는 현숙하고 신실한 아내가 내게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건강하고 잘 순종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여덟 번째는 진실하고 변함없는 친구들이 내게 있습니다. 아홉 번째는 캄캄한 밤중에도 찬송을 부를 수 있는 믿음이 내게 있습니다. 열 번째는 생명의 면류관이 내게 있습니다. 열한 번째는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히 채우시는 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갑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회계사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가 없네요. 도저히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물질을 소유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선물들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가장 큰 자 요, 가장 부유한 자 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십자가 앞에서 발견 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우리 인생의 가치는 십자가 앞에서 발견하게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20세에, 40세에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 설 때 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 그 분이 나를 위해서 피 흘리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내 인생의 가치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풍성한 축복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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