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에노스 신앙 (창 4:25-26)

  • 잡초 잡초
  • 889
  • 0

첨부 1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5,26)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자식의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담의 아들 셋이 장성해서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셋은 어떤 신앙고백으로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을까요? 에노스란 무슨 뜻일까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죄의 대가로 사망을 예고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에 귀기울이기 않았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잘 알지만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길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셋이 비로소 인간은 에노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자발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서로 이름을 부르듯 한번 불러 보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외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실체를 통감한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말씀에 귀기울이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에노스임을 자각하고나니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밖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이가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중에도 에노스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슴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힘만 자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에노스임을 모르거나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고 마치 자신만은 천년 만년 살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은 삶을 통해 참된 의미를 이룰 수 없습니다.

어떤 의대상이 해부학 첫 실험시간을 맞아 해부실로 들어갔습니다. 실험대에는 시체가 각각 한 구씩 놓여 있었습니다. 시체의 피부를 벗기는 작업을 하는데 전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이 사람들도 살아 있었을 때는 모두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았겠지, 돈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죄를 짓고자하는 사악한 마음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제 발가벗긴채 부끄러움도 모르고 실험대에 누워있다. 이 아주머니는 평생 얼굴에 바른 화장품이 얼마나 될까? 저 아저씨는 저 손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만졌으며 얼마만큼의 만족을 얻었을까?' 그런데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한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나 자신과 이 시체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겠지..그럼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그 의대생은 시체해부를 하면서 그 시체와 자신이 실제 아무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시체를 통해 언젠가 시체로 누워있게 될 자신을 본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실존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그는 죽음의 실체를 발견하고나서야 삶에 대해 비로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자기도 죽음에 들어가야 함을 통감해야 합니다. 자기의 죽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줄 모릅니다. 성경 전도서 7장 4절은 '지헤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고 말슴합니다. 저는 목사가 된 것에 대해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접한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임종도 많이 보았습니다. 죽어서 싸늘하게 식은 시신도 많이 접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나도 저렇게 죽음을 맞고 이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오겠지' 하며 자신을 추스르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늘 술에 젖어 싸우고 도박이나 하며 세월을 무의미하게 낭비하며 막 살던 사람의 장례를 집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망인의 친구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분들 역시 고인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알콜 중독, 노름, 싸움 그러면서 인생을 포기한 막 사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도 죽음앞에 서자 진지해졌습니다. 제가 직접 교회나오라고 권하지 않았음에도 저를 보고 "저도 이제 교회 나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친구의 죽음을 통해 자신들도 멀지 않은 미래에 죽음을 통과해야 함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기분만을 생각하며 살고 욕구에 끌려 살아온 자신의 존재가 죽음과 함께 영원히 의미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의미없이 살다가 덧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헤로운 자는 마음이 초상집에 가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자기 죽음의 날일 수 있다는 자각을 하고 살기에 참된 인생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코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코에 호흡이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멈추면 죽은 것입니다. 호흡이 멈추면 어떻게 됩니까? 그순간 격리됩니다. 영안실 냉동고 속으로 격리됩니다. 시체는 비행기를 타도 사람들과 함께 타지 못하고 화물칸으로 가야합니다. 아무리 높은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흡이 멎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흔들던 사람도 죽어 시체가 되면 아무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 돈으로 온 세상을 주무르던 이도 죽으면 일단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중 총수가 세상을 떠나고나서 남은 자식들이 화목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재산을 놓고 송사를 벌였거나 벌이고 있습니다. 살아 생전에 절대 재산 싸움 않겠다고 맹세까지 시켰어도 죽음과 동시에 원수로 변하여 싸운 집안도 있습니다. 그래도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 야단쳤다는 말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죽어 격리가 된 후에는 장사를 치르게 됩니다. 화장을 하는 경우에는 화구에 관을 넣고 불에 태우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재만 남습니다. 그야말로 한 줌의 재로 변한 것입니다. 매장의 경우에는 죽은 자의 이름이 적인 명정으로 관을 덮어 하관을 합니다. 그리고는 유족들이 흙을 그 위에 뿌립니다. 그러면 인부들이 흙을 덮고 그 위에 올라가 밟습니다. 죽은 자가 대통령이든 최고 갑부이든 누구든지 인부들이 장화를 신고 올라가 다집니다. 호흡이 멎으면 그가 어떤 권세를 누렸던간에 돈이 얼마나 많았든간에 가리지 않고 인부들의 장화를 신은 발아래 짓 밟힙니다. 사람은 모두 죽으면 그렇게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코에 호흡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얼마나 자존심을 내세우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잘난체하고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인의 부친 묘를 이장한다고 하며 예배를 부탁하여 묘지에 따라갔습니다. 인부들이 봉분을 무너뜨리고 무덤을 열어 관을 꺼내었습니다. 이미 관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관뚜껑을 열자 시커멓게 썩어 있는 수의와 시신을 휘감고 있는 나무 뿌리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난생 처음보는 벌레들이 시신을 시커멓게 덮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호흡이 멎으면 예외일 수 없습니다. 시체가 땅속에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는 이름모를 벌레의 밥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처럼 열심히 사는 것입니까? 죽음을 향해 의미없이 달려가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에노스의 존재임을 자각했다면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했다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마음을 다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에노스에 지나지 않는 사람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에게 참 생명을 주시려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은헤에 감사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그분앞에 엎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물체든지 위에서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법칙을 극복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의 중심에서 끌어당기는 힘보다 더 센 힘이 있으면 떨어지지 않고 올라가게 됩니다. 비행기를 타면 신기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탔고 그보다 더 무거운 많은 짐을 실었는데 그 큰 비행기가 위로 하늘로 날아 오르는 것입니다. 유체역학의 법칙을 이용하여 끌어당기는 힘보다 더 강한 힘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뛰어 넘은 것입니다.

에노스인 인간에게 가해지는 강력한 사망의 힘때문에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사망의 힘을 능가하는 강한 힘이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에수님안에 죽음의 힘보다 더 강한 부활의 힘, 생명의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기만 하면 사망의 권세와 무관하고 생명의 힘이 작용되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삶이 주어집니다.

어느 우명한 목사님의 전도사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잘 알고 지내는 유명한 재벌가에서 사모님이 암투병중인데 와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환자가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자제중에 친구가 있어 거절하지 못하고 병원에 심방을 갔답니다. 머리는 다 빠져 수건을 쓰고 누워있는데 전도사라는 소개에 귀찮은듯 벽을 향해 돌아누워버렸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하려는듯 남편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의사선생님이 이번 항암제 투여가 끝나면 현저하게 회복될거라고 합디다. 힘을 내시오." 자식들 역시 격려하고 나섰으나 환자는 아무 대구도 없습니다. 전도사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부인! 지금 남편과 자제분들이 항암주사를 맞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인은 정말 그 말을 믿으십니까? 부인은 아무리 항암주사를 맞아도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눈을 들여다보며 말합니다. " 부인 나는 부인의 가족들처럼 거짓말을 하려고 하거나 부인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부인에게 진실을 전해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오늘도 이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부인보다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죽음이 사람을 부르면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침묵끝에 환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난 어떡해야 합니까?" "모든 사람은 다 죽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십시오." 그러면서 복음을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눈물을 흘리며 에수님은 영접했고 다음날로 퇴원했습니다. 성경테잎을 사다가 말씀을 들었고 자신의 잘못이 깨달아지만 당사자를 불러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삶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석달만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답니다. 석달의 시간이야말로 일생동안 살았던 모든 시간보다 값있고 행복한 예수님을 만나 새생명을 누린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생을 그분께 맡기면 그를 억누르고 있는 모든 죽음과 어둠의 권세가 밀려납니다. 백해 무익하던 사람도 주님안에서 새생명의 기쁨을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죽음 저 너머에서만 그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의 약속에 응답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사로잡으시는 순간부터 부활의 삶,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껏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든간에 자기 자신이 에노스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에수님발앞에 엎드리면 사망과 어둠의 세력이 벗겨지고 생명의 힘이 역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에노스신앙을 소유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새롭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문기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