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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각한 오해 (마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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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9장에는 10개의 기적이 9개 이야기 속에 소개됩니다. 이 기적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예수님께서 그 나라의 왕이 되어 다스리심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구속적 기적입니다.

9개 이야기는 크게 세 종류로 묶을 수 있는데, 첫 번째 묶음은 문둥병자와 백부장의 종, 그리고 베드로 장모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 기적들은 연약하고 소외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로운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묶음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 가다라 광인을 고치신 사건, 그리고 오늘 다루게 될 중풍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 기적들에서는 왕의 권세가 강조됩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권세, 귀신을 굴복시키는 권세, 그리고 죄를 사하시는 권세입니다. 세 번째 묶음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도록 하고 오늘은 죄 사함의 권세를 중심으로 현대 신앙인들에게 있는 심각한 오해들을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중풍병자 치유 사건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보면, 지붕을 뚫어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머무신 집 안으로 달아 내렸다는 정황설명을 마태복음은 과감하게 생략합니다. 반면에 이 사건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권세에 관심을 둡니다. 이는 마태의 관심이 기적 자체보다는 그런 기적을 일으키시고 그런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 하는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가 증거 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살펴봅시다.

가다라 지역민들의 배척으로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1). 그때 마침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2a).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가다라 광인들의 경우에는 믿음 유무를 전혀 고려치 않으셨습니다. 일방적인 긍휼과 은혜로 그들을 귀신의 세력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저희의 믿음”을 “죄 사함”의 근거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 완전히 사로잡힌 경우가 아닌 때에는 언제나 당사자나 그가 관련된 공동체의 믿음 유무를 먼저 고려하셨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단지 믿음만 보시고 일하시는 것 또한 일방적인 긍휼과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당연히 죄를 사하고 병을 고쳐 주셔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는 ‘병 고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중풍 해결이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심각한 오해였습니다. 예수님은 병보다 그의 ‘죄 문제’에 관심을 두셨고, 죄 사함 받는 것을 중풍병 치료보다 더 우선적인 일로 다루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시급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취직이나 결혼, 금전 문제나 명예문제나 병 문제 해결을 위해 주님께 나아옵니다. 그런데 만약 주님께서 보실 때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한 바램은 뒤로 하고 당신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그 문제에 먼저 집중하실 것입니다.

“소자”는 연장자가 손아래 사람을 다정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이것은 중풍병자가 예수님보다 젊은 청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청년이 중풍에 걸렸으니 참 딱합니다. 청년이 아닐지라도 침상에 실려 다녀야 할 정도면 중풍이 심각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사지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영혼이 죄로 인해 떨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의 심각한 육신의 질병보다 죄가 더 근원적인 문제임을 아셨습니다. 그는 죄는 깊이 숨겨두었고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영혼의 중풍은 숨기고 육신의 중풍 문제만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님께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회개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백해야만 죄 사함을 받는 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본문은 죄 사함이 ‘고백하는 행위’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존전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믿음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고백하기도 전에 주님 앞에서 떨고 있는 그 영혼을 보시고 일방적으로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일방적인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죄를 토설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그 동안 예수님께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어떤 서기관들의 마음에 분노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3)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생각을 꿰뚫어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어떤 면에서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명예를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데, 감히 사람이 죄 사함을 선포했으니 신성을 모독한 것으로 여기고 분노했습니다.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매우 의롭고 정당한 분노입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생각들을 “악한 생각”으로 정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악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어떤 이에게는 의롭고 정당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불의하고 부당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도덕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읽거나 예수님을 생각하면 심각하게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기준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항상 성경 말씀과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각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도덕 기준으로는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주님 보시기에 악하면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죄하신 악한 생각이란 예수님을 말과 행동을 불신하고 대적하는 태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각들입니다.

예수님은 속으로 악한 생각을 하는 서기관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5)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둘 다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죄 사함을 감히 공공연하게 선언할 수 없습니다. 신성 모독죄로 처형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금방 능력 없는 것이 탄로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권위를 도용하는 사기꾼으로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기꾼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죄 사함의 선포는 쉽게 할 수 있지만,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보다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심으로서 죄 사함의 선포가 진실한 것임을 입증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6-7)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자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죄 사함을 선포하신 말씀도 그대로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그 나라에서 하나님이 죄를 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생각은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고 예수님께서 그 나라의 왕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일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성을 모독했다고 심각하게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이후에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그 때서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이 땅에 이미 왔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고, 이 땅에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이것을 입증하셨습니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의 어떤 부분에는 역사하지 못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오해합니다. 아마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과 취직해서 직장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만유를 창조하시는 것과 배우자감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결혼하게 하시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이론적으로는 천국 들어가는 것과 천지창조가 더 어려울 것 같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취직과 결혼 등의 당면한 문제가 더 어렵게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이 땅의 어떤 부분에는 역사하지 못한다고 제한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지는 관심을 가지시지만 나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저 하늘에 가서는 우리에게 잘 대해주시겠지만 이 땅에서는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불신하는 ‘악한 생각’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우리 중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나라의 왕으로서 지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분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그 분은 분명히 이 땅에서도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것을 먼저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원하는 바가 조금 지체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각자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속마음에 파고드는 악한 생각을 버리고 변함없이 주님을 신뢰해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절은 이 기적을 본 무리들의 반응입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풍랑 사건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본질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가다라 광인 사건에는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그때마다 달랐습니다. 이것은 기적을 효과적인 전도의 수단이라 생각하는 심각한 오해를 깨뜨립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은 단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께서 통치하시는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여러 가지 오해들을 벗고 성경에 기초해서 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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