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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삶을 주시는 주님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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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인생이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기쁜 일이 있는가 하면 슬픈 일도 있습니다. 희망을 갖고 달릴 때가 있는가 하면 절망에 빠져서 삶 자체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요즘은 각종 학교의 졸업 시즌입니다.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상급 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은 매우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친구들이 상급 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토록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끼?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절망의 수렁에 빠져서 꿈도 꿀 수 없고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다시 찾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불치병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부도와 파산의 위기에 직면한 사업가에게 그를 도와 줄 새로운 후원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다시금 꿈을 꿀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 그의 삶은 기쁨과 활기가 넘쳐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중풍병자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병이 낫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지극히 무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의 친구들의 도움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의 놀라운 변화는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간 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이 누워 있는 중풍병자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삶은 영적으로 사막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신 주님이 그들의 갈급한 심령을 채우실 생명수로 다가오셨습니다. 바로 그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초대하셨습니다. “새 삶으로 나아오라!” 그것은 온 인류를 고치시려고 찾아오신 우리 주님의 초대였습니다.

  현재 미국 장로교회는 매년 수 만 명씩 교인 숫자가 감소하고 있어서 범 교단적으로 여러 가지 비상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젊은이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거의 다 노인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와 교단을 새롭게 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어느 특정 지역의 교회나 교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요구받고 있는 매우 중대한 문제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 인류는 늘 영적으로 광야와 같은 황량함을 경험했지만 오늘은 그 상태가 한층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영적 회복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적인 황량함은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종종 경험하는 현상입니다.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또 물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사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능력의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사 43:19 참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탈진하여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이 주시는 새 삶을 얻기 위해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첫째,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의 삶은 결코 세워질 수 없습니다. 주님 앞으로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습니까? 그들은 확실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주님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오래된 중풍병자도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주님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능력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성경은 우리에게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장애물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갈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게 마련입니다. 인생은 장애물 경주와도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걸림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장애물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또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장애물을 원치 않습니다. 또한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고통스러워하고 자포자기하기도 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 앞에도 그런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주님 앞으로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사실 집념이 있는 사람들은 장애물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힘차게 전진합니다. 결코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전진하여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 역할을 감당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제자들은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전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또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지도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자들은 그런 삶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주님이 주시는 새 삶을 친구에게 전하기에 합당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 삶을 얻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친구인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오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은 지붕에 오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세상에 새 생명을 전하기 위해서 그 복된 소식을 전할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목마른 사람에게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갈증을 달래 줄 시원한 물만 필요합니다. 아무리 큰 금덩이나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시원한 물만 필요합니다. 많은 물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물 한 모금이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시간도 급합니다. 호숫가로 데려갈 시간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병의 물을 얼른 한 모금 마시게 하는 것이 바로 목마른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시인이 말했습니다. “생명은 참 신비한 것이어서 나누어 쓸수록 커집니다. 나눌수록 더 생기가 있게 되고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는 또 주장했습니다. “나누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어서 쓰지 않으면 퇴화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나눌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절망 중에 있는 이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매우 절망적인 것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절망은 또 다른 희망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사실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 아닙니까? 바로 우리가 다 끝났다고 포기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와 새 삶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왜 우리에게 새 삶을 선물로 주셨습니까? 아직도 절망에 빠져 있는 이웃에게 새 삶을 나눠 주게 하려고 우리에게 먼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더욱 힘차게 전진해야 합니다. 받은 바 새 삶을 나누려는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새 생명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이 주시는 신비하고 놀라은 은혜와 평강이 항상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송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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