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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심하라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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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안심하라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청년들에게 식물학자 <윌리엄 클라크> 하면 잘 모르는 청년들이 많지만
Boys, be ambitious !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지라 ! 는 말
아마 들어보지 못한 청년들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클라크 교수가 1876년 7월 삿포로 농림학교 초대 교장으로 갈 때
성경책을 많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니 학교 당국에서 성경책이 왜 필요한냐 하며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클라크 교수도 그럼 미국으로 돌아가겠다 고 하니
학교 당국에서 결국 수업 시간 외에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가 교환 교수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수많은 제자들이 전송하기 위해 부두로 몰려왔습니다.
그 때 클라크 교수가 한 말, Boys, be ambitious ! 란 말
그가 일본에서 생물학 교수로 몇 년간 가르친 업적 보다
이 말 한마디가 세계 청소년들에게 미친 영향이 더 크다고 합니다.
내일교회 성도 여러분,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지난 한 해 동안 사도행전 강해를 통해
많은 생명과 능력과 교훈의 말씀을 외쳤지마는
가장 남는 것이 있다면 [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 는
바울의 비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결코 순탄한 길 만은 아닙니다.
로마로 가기 전에 잠시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렸다가 성전에서 신성모독죄로 붙잡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행23:11절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는
그날 밤의 주의 위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에 감격하며 기대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막상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은
이탈리아 군대의 호송을 받는 죄수의 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로마로 가는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바울이 로마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살펴보면
1. 로마로 떠나는 바울의 여정이 어떠합니까?(1-8절)
이미 가이사 앞에 재판 받기를 호소한 바울은
베스도 총독에 의해 로마로 보내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마침 이탈리아로 호송할 다른 죄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일행이 되어
율리오라고 하는 아구사도대(隊)의 백부장의 인솔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 일행은 당시 아시아 해변의 각 곳에 사람들과 짐을 나르는 운항선인
<아드라뭇데노> 라는 배를 타고 갑니다.
거기에는 죄수들만 탄 것이 아니라 일반 승객 및 장사꾼들도 함께 탔을 겁니다.
어떤 면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또한 피곤한 여정이겠습니까?
그런 중에 위로가 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1) 2절에 “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
아리스다고에 대해서는 한 번 들어본 이름이지요
행19:29절에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났을 때
바울이 피신해 가는 중에 대신 잡힌 사람이 두기고와 아리스다고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바울을 따라다닌 사람입니다.
행20:4절에 보면 마게도냐에서 핍박이 왔을 때
아리스다고는 두로아에 미리 가서 길을 마련해 줍니다.
그러니 바울 사역의 동역자인 샘입니다.
그러면서도 앞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아리스다고 보다 정말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바울의 힘들고 피곤한 여정에 수행원이 되어
이름 없이 빛없이 돕는 자 또 한 명이 있습니다.
바로 1절, 2절에 우리 라는 일행 속에 함께 가고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어겠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는데
어떻게 바울 곁에는 항상 위로가 되는 돕는 자의 손길이 있느냐?
가끔 가다 보면 앞장 서 수고하는 직분자가
목사님, 사람들이 안 따라 주어서 못하겠어요? 저도 그렇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 부르스의 말 대로
“ 바울 곁에는 70여 명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의 제국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 고 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루터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루터가 무거운 손수레를 혼자 끌고 가다가 언덕 밑에 멈추어 섰습니다.
도저히 혼자 끌고 올라가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 사람 이상 뒤에서 밀어주어야 올라갈 수 있는 언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는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여 기다리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앞에 사람이 기다리지 못하고 가버립니다.
하는 수없이 되던 안 되던 혼자서 끌고 올라가기로 마음먹고
끙끙하며 끄는데 수레가 자꾸만 뒤로 밀립니다.
그 때 밀리던 수레가 멈춥니다. 낯선 사람이 한 사람 밀어주고 있었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자 루터는 좀 더 힘을 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올라갈수록 오히려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언덕 위에 올라와 돌아보니 여섯 사람이나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 한 분이 웃어 면서 하는 말이
“ 수고 했네 ”
“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이지요.
그런데 할아버지 이상하죠,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할 때는 안 도와주고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안했는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줍니까? ”
그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 자네가 밑에서 쉬면서 도움을 청할 때에는
비록 올라가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열정은 없었네.
그러나 혼자 수레를 끌고 가려는 열정이 생기니
그 열정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반응을 한 거라네 ”
이후 루터는 무슨 일이든 열정을 품고 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바울의 열정에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렇게 헌신된 열정의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3절에 가이사랴를 떠나 시돈에 잠시 머물렀는데
어떻게 백부장 율리오가 죄수 바울을 어떻게 잘 보았는지 친절을 베풀어
그곳에 성도들을 만나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율리오의 마음을 만지신 것이지요.
먼 길 떠나는 바울에게는 이런 일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선교사님들이 돌아 왔을 때
마음에 감동이 오거든 작은 사랑이라도 베풀어 주면
몇 년 동안 선교현장에서 쌓였던 피로가 풀리어 질 것입니다.
식사 한 끼, 넥타이 한 개, 책 한권, 돈 몇 푼 그런 것입니다.
이런 친절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 길이지만
이번 여행은 굉장히 어려운 여행입니다.
왜냐하면 여행하는 기간이 썩 좋은 기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배들은 바람을 앉고 가는 범선이기 때문에
계절과 일기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4-8절까지 보면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해안을 끼고 가다가 겨우 무라성에 이르러서
거기서 이달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승선했는데
7절에 배가 더디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는데
풍세가 허락지 않아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여 가다가
간신히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이 이번 여행이 얼마나 어려운 여행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하면?
위대한 비전을 이루는 데는 결코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저절로 선교의 기지 축복의 터전이 되지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배가 미항이라는 항구에 간신히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2. 왜 바울 일행이 광풍을 만났습니까?
그리고 유라굴로 광풍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9-14절)
이곳에서 바울은 더 이상 항해하지 말고
겨울을 지낸 다음 떠날 것을 권면했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오히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임하여 뵈닉스에서 월동하기로 하여 항해 하다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왜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미항이란 곳은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볼 때 과동하기에 불편한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이미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게 되었는데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7월10일경(태양력 10월 5일경)입니다.
그런데 지중해에는 9월 중순경부터 이듬해 3월 중순경에 이르기까지는
계절적인 광풍이 불어 항해하기가 매우 위험했으므로
항해하는 배들이 이 기간 동안 항해를 삼가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항해 여부에 대하여 처음부터 의견이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미항은 과동하기에 불편하니
더 항해하여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는 것으로
이 견해는 선장과 선주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주장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10절에 “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 고 말하면서 만류한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에 [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인 것 같습니다.
사실 바다와 기후에 대해서는 선장과 선주만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말로 하면 초라한 하나님의 사람의 말보다
전문가의 말을 더 신뢰했다는 말입니다.
선장의 주장은 자신의 경험과 인간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요
바울의 주장은 자연의 순리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의당히 바울의 견해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더 신임했습니다.
그리하여 미항을 떠나 뵈닉스를 향해 항해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바울이 말한 올바른 견해를 무시하고 선장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결국 자신뿐 아니라 그 배에 타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큰 위험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항해가 처음에는 득의하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13절에 “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의가 득의한 줄 알고 ” 미항을 떠나뵈 닉스로 떠나는 그들의 배는 때마침 순한 남풍이 불어오므로
이제 그들의 계획이 적중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순풍은 영원한 순풍이 아닙니다.
어떤 교인들은 장사 잘 되면 그것이 영원한 축복인 줄 압니다.
그 반대입니다. 반대로 영원한 고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는 고난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권고를 듣지 아니하고 미항을 떠난 배는 얼마 안 되어
그레데 해변을 행선하는데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 라는 광풍이 불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인생의 축소판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대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지만 몸이 병들 수도 있고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돌발적인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선택을 잘했다면
순풍이 분다고 너무 안일하거나 교만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꼭 기억하시고
앞으로는 전문가의 말이라고, 순풍이 분다고 득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말하는가?
가끔은 하나님의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가?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왜 유라굴로 같은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지내기 불편하다고, 많은 사람들의 취향 때문에,
우선 순탄하다고 하나님의 뜻을 져버렸기 때문에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가면 어디까지 갑니까?
얼마 못 되어 광풍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광풍 만나면 두 손 드는 것입니다.
광풍이 일어나니 선장의 경험도 안 통합니다.
선주의 빠른 머리의 회전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지난날의 항해의 경험에서 쌓은 노련한 선장의 권위가 무슨 쓸모가 있으며
한밑천 잡아보겠다던 선주의 이기적인 야망도 깨어졌습니다.
짐도 버렸습니다. 배의 기구도 던져버렸습니다.
이제 구원의 여망이다 없어졌습니다. 남은 건 목숨 밖에 없습니다.

광풍 만난 사람들 이제 어떻게 합니까?
3. 광풍을 만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결과는 어떠합니까?(15-20절)
뱃사람들은 바람도 어지간한 바람은 도리어 역용합니다.
그러나 광풍이 대작하니 15절에
[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쫒겨 가다다 ]
그것 뿐입니까?
17절 배가 스루디스 즉 바다의 모래톱에 걸릴까바
18절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짐도 바다에 던져 버리고
19절 사흘째 되던 날은 배의 기구도 저의 손으로 내어 버렸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20절에 [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 고 합니다.
유라굴로 광풍 만난 사람들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이쿠! 이제 죽었구나 하는 두려움과 공포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돈이 소용 있습니까? 학위가 소용이 있습니까?
자격증이 무용지물입니다. 권력이 무력합니다.
이것이 유라굴로 광풍입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나, 아시는 분들 중에 이런 광풍 만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유라굴로 같은 시련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의 노력, 의지, 능력이 통하지 않는 무력함을 느낍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모든 노력과 의지가 다 수포로 돌아갔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나는 수퍼 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과학자 에디슨은
1914년 그의 공장에서 불이나 다 타버렸습니다. 그때 나이 67세였습니다.
그는 잿더미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모든 시행착오며 실패들이 완전히 타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그런 실패들을 거치지 않고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
3주일 후에 에디슨은 축음기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디슨 같은 슈퍼맨이 못되지요.
그러나 또 한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 우리가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여망의 손길이 뻗칠 때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군대가 동원될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억나시죠? 바울을 죽이려고 다메섹 방백이 군사를 풀어 성을 둘러 쌌는데고후12:32절에
[ 다메섹에서 아래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
세상이 캄캄해지면 하늘 문 열린다는 것
우리의 말문이 막혀지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라굴로 광풍 만나 구원의 여망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무슨 말을 합니까?
4 풍랑 만난 사람들에게 바울이 무엇이라고 위로합니까?(21-24절)
그럴 때 바울이 말합니다.
21절에 [ 여러분이여, 내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다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
22절 [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 ]
풍랑을 만나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 경험과 능력에 한계를 느껴야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많은 손해를 본 이후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삶에는 이런 손상을 당하지 않도록
불편한 여건 때문에, 다수의 취향 때문에, 하는 일이 순조롭다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교회의 위험수위 가운데 한 가지가
교인들이 하나님 말씀보다도 전문가의 말을 더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잡해져 갈수록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사람들조차도
멈추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기보다는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자신을 맡기고 의지해야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고 지낸다는 사실입니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운 결과는  유라굴로 태풍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을 앞세우고 하나님 떠난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인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자신의 위치가 밑바닥에 있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확신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간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손길이 그와 함께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주객이 전도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유라굴라 태풍을 만나게 되니 이제는 주객이 전도되어
도리어 바울이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을 위로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풍랑 만난 사람들에게 22절과 25절에
[ 여러분들이여, 안심하라 ] 고 말 할 수 있어든 위로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5. 바울이 이렇게 풍랑만난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여 안심하라”고
할 수 있었던 위로의 근거가 무엇입니까?(25절)
바울에게는 남다른 신앙의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3절 [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
24절 [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
25절 [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

출항 시에 누구 한사람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던 사람들이
여건과 경험과 다수보다 더 차원이 높은 하나님의 말씀에
저들이 굴복되어진 것입니다.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엑스트라입니까?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니 완전히 바뀌어진 것 있죠.
이것이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요. 나아가 교회의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그 신앙의 노하우가 뭡니까?
1) 그날 밤의 계시, 그날 밤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날 밤이 참 많았습니다.
아시아로 향하던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옮겨놓을 때도행16:9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지시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도 행23:11절에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이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그날 밤 - 주님께서 나타나신 밤입니다. 성령님께서 조명으로 비춰주신 밤입니다. 그날 밤에 바울 곁에 주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로마의 비전이 실현되어지는 첫 관문에서
유라굴라 라는 태풍을 만나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을 때23절 이하에[ 나의 속한 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 합니다.주께서 말씀하는 밤이 있는 성도는 그 환상이 점점 더 분명해 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인공이 될 줄 믿습니다.
통계적으로 인생의 3%가 나머지 97%를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 3% 인생의 특징이 기록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 만 인생이 아니라
꼭 이루고 말거야 하며 기록한 목표를 가진 인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은혜를 받고 환상을 보고 비전을 가졌다가
세월 속에 묻혀 버리는 환상이 아니라
바울과 같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지울 수 없는 기록된 환상을 가지고
막힐 때마다 희미해질 때마다
그 날 밤에 말씀하시는 말씀 붙들고 일어서는 비전 메이커
분명히 하나님의 구속사에 주인공이 될 줄 믿습니다.
사실 한 두 번 희망사항 안가져 본 성도 얼마나 되겠습니까?그러나 자신의 희망사항인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바로 답은 [ 그날 밤 ]입니다.그날 밤에 주께서 내 곁에 계서 말씀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성도 여러분 - 내게도 그날 밤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15세기 프랑스의 영웅 또는 성녀라고 불리워 지는 잔 다르크가
샤를 왕을 방문하여 [ 왕이여 어제 밤에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기를 ] 하니
왕이 기분이 언짢아서
[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이 왕의 귀에 들리지 않고 네게만 들리느냐? ] 고 합니다.
왕의 핀잔에 잔 다르크가 하는 말이
[ 왕이여, 왕도 고요한 밤중에 들판에 나가 하나님께 무릎 꿇는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겁니다 ] 라고 합니다.
고요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그날 밤이 있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다시 한 번 권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그날 밤- 바로 금요 기도회가 되시기를 추천합니다.그래서 나의 희망사항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되고 더 분명한 환상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떠 한 가지 중요한 바울의 신앙이 노하우는
25절 [ 그러므로 여러분들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
그날 밤의 신앙도 중요하지만
그날 밤에 하신 성령의 음성을 그대로 믿는 믿음도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은
23절에 [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 ] 이란 말입니다.

왕상18장에 가멜 산상에 엘리야가
어떻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앞에서 생명의 대결을 벌립니까?
왕상17장에 엘리야를 소개하면서
[ 기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
엘리야의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나의 섬기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의 사람은
[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 고 하며 안심을 시킵니다.
민13:30절 [ 갈렙이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
민14:9절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합니다.
하나님 믿는 믿음 저버리지 아니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 ! 합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가 하나님께 속하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날 밤에 내게 말씀하시고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줄 믿습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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