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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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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로서 대표적인 것이 "웃음과 울음"입니다. 그런데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말은 여러분이 많이 들어보셨지만 "애통하면 복이 온다. 울어야 복들어 온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접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통하는 것은 할수만 있으면 없으면 하고, 있어도 숨기고 싶고, 피하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웃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흥행사들은 갖가지 웃음을 팔아 적지 않는 수입을 올립니다.
  그런가하면 요즈음 들어서 웃음의 가치는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웃음치료, 웃음요가, 웃음 다이어트 등등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웃음 공원과 웃음 클럽이 있고, 일본에는 웃음협회가 있으며, 미국에는 웃음교회도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울음은 그렇게 소중히 다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우는 자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상난 집에서나 울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는 사람을 보면 "초상났는가 보지?" "청승맛다"라고 합니다. 슬퍼하는 자들은 분위기를 망치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쯤으로 취급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사람이 원망과 증오를 갖게되는 원인은 간단합니다. 눈물을 흘려야할 부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기 때문이요, 애통해야할 사건에 애통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우리의 상한 감정과 상한 영혼을 씻겨주는 치료의 역할을 해냅니다. 그래서 애통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나 무가치함"이 아니라 복된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눈물로 밤을 새워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토마스 왓슨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는 낙원에 이를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천국은 메마른 눈으로 못 들어가며 젖은 눈을 가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눈은 너무 메말라 있음이 문제입니다. 눈물을 회복해야 합니다. 울어야 삽니다. 울어야 치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면 언제나 눈물을 질금 질금 흘리면서 청승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도 전혀 반성없이 놀이나 유희처럼 자신의 범죄를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사람,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법정으로 웃으면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낍니다. 그러나 반성을 하고 죄책감에 짓눌러 어찌할바를 몰라 괴로워하는 사람을 볼 때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야지 하면서 동정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 슬퍼하며 스스로 애통할 줄 아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아주 건강한 의식 작용입니다. 당연히 고통을 느껴야 할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에 아픔이 있어야할 사람이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며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심판 받은 불쌍한 영혼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참으로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아파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 악한 것의 순환 고리를 끊어버리고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애통한다"는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애통한다는 말은 슬픔을 나타내는 말들 중에 가장 강도가 높고 진한 말입니다. 골수에 사무치는 슬픔을 말합니다.  보통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애통 즉 <펜데오>란 헬라어의 뜻은 "나에게 정말 있어야 될 것은 없고, 없어야 될 것이 있는 것을 탄식하여 슬퍼하는 것" 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없어야 될 것이 잔뜩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교만, 자랑, 용서하지 못하는 원망, 욕심, 집착, 시기, 미움, 미성숙, 경솔함 등등으로 이런 것들이 내 영혼을 병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사람들과의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정말 있어야 할 것들 사랑, 겸손, 은혜 이런 것들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인하여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애통을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분이 바울 사도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9,24)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함을 인해서 그리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함을 인해서 곤고해 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어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인하여, 그리고 없어야 할 것이 우리 안에 있음을 인하여 아파하는 애통,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애통인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성경에는 "애통"에 대하여 34회 언급하는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애통했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당할 때 애통했습니다. 징계로 인하여 애통했습니다. 죄악 때문에 애통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애통했습니다. 영혼사랑의 열정 때문에 애통했습니다.

  이것들을 몇가지로 요약을 하면
  첫째로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애통입니다.
  자기 자신을 인한 애통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자신의 죄에 대한 수치심이라든지 눈물이 없다는 점입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범죄를 장난 삼아 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도 모르고 유치장에 끌려와 있으면서도 자기네들끼리 장난을 치면서 키득 키득 웃고 있습니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저들에게는 가중해서 벌을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왕은 고백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42:3)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애통하기를 침상의 요가 그 눈물에 적셔서 썩도록 애통했습니다. 그래서 죄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마음에 합당하게 여기셨습니다.
모든 죄인들이 그 어떤 변명보다 먼저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줄로 압니다.
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 잘못 탄 기차 안에서의 선행은 무효다"라는 말 을 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서 그 속에서 웃고 즐기고 있으면 있을 수록 앞에 있는 무서운 심판은 점점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타인에 대한 연민에 정에서 나오는 애통입니다.
  현대들의 가슴에는 자기애 밖에는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남에 일은 단지 구경거리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남의 일이 결코 구경거리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세상을 위한 애통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란 사회를 바라보시면서 애통해 하셨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도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사도 역시 동족에 대한 "그치지 않는 고통"(롬 9:2)을 고백했습니다.

  넷째로는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 복음 위해서 흘리는 눈물,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의 양이 점점 작아지는 때를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신앙의 선배들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는데 과연 지금도 우리의 어린이들이 우리가 교회성장과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을 보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교회의 장래는 대단히 어두운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성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선배 신앙인들이 흘린 눈물의 결과들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나와 복음을 위하여 눈물 흘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위로라는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파라(겉에서)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입니다. '곁으로 부른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곁에 불러주신 것을 경험 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마음이 아파 애통하는 자를 찾아주시고, 곁에서 붙들어 주십니다.

  첫째로 애통하는 자에게 주님은 치료의 역사를 주셔서 위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여호와 라파"라 소개하셨습니다. 그뜻은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질병이나 자신의 아픔을 애통하는 자를 부르시거나 찾아가셔서 치료해주셨습니다. 눈물이 강같이 흐르는 자에게 하나님은 치료의 역사를 이루어주십니다. 

  둘쩨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나, 고통이 없도록 그것을 잘  견디어내도록 위로하여주십니다.
  고후1:6에서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를 하나님이 견디게 하시고 변화시켜주시고 형통케 하십니다. 

  셋째로는 기쁨을 누리도록 위로해 주십니다.   
  사61:3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통하며 씨를 뿌리러 나간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는 세상이 주는 위로 비교될 수 없는 위로입니다. 그런 위로는 세상에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릴 줄 아는 애통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참된 위로를 받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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