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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으로 충만할 때의 자유 (요 13: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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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결혼식

최근 화제가 된 ‘고아 커플 지하철 결혼식’이 대학 연극 동아리의 실험극으로 밝혀졌습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주례자도 없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는 이 커플의 애틋한 사연은 밸런타인데이 분위기를 업고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확산됐습니다. 감동받은 네티즌들은 도와주자는 운동까지 활발하게 벌였습니다. 그런데 연극이었다니…. 이 실험극의 연출자는“각박한 세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민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 주기 위해 극을 꾸몄다” 며 “본의 아니게 여러분을 속인 것 같아 죄송하다”고 밝혔습니다.

시민들은 진실인 줄 알고 감동했다가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습니다. 한 네티즌은“어제는 훈훈한 소식에 감동했는데 오늘은 날벼락에 배신감이다. 고아 단체가 있었다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으나 또 다른 네티즌은“지하철에 있던 사람들을 봐서 우리나라는 아직 살 만한 것 같다. (연극이었지만)각박한 세상에 참신한 아이템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촌평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는 진짜 같은 가짜가 수두룩합니다. 서양 속담에‘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짜 감동은 일시적이지만 진짜 감동은 영원합니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진실하게 삶의 짐을 함께 져주는 은인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감동과 힘은 평생 남을 것입니다.

인생의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다윗은“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편 68:4)고 노래했습니다. 역경과 고통이 있을 때 진정으로 위로하고 힘과 소망을 주실 분, 변하는 시대와 환경을 초월해서 변치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실험극이 아닌 진실한 사랑을 베푸는 그 분의 은혜를 체험했던 다윗은 온 영혼을 다해 이렇게 노래했던 것입니다. 하도 사이비 감동이 판을 치는 삭막한 세상이기에 진실한 감동이 그립습니다.

지극히 짧은 나이로 이 세상을 살다 떠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것이 남을 수 있지만 가장 크게 부각되어 남는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신 구속의 사랑입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낡아지는데 오직 사랑만이 낡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알아야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고 하는 책과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라는 매우 흥미로운 제목을 가진 책을 쓴 저자는 로버트 풀검인데 이 작가는 이 책들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분입니다.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 이 책에서 그는 출생에서부터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모습 속에 결국은 계속적으로 축제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일축하, 졸업식, 결혼식, 동창회 그리고 영안실 앞에서의 장례식 등. 이렇게 사람들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의식과 의례로 연결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절대로 사고가 아니고 마치 우리에게 졸업식이 있고 결혼식이 있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데 장례식은 그 절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치 피치 못할 사건인 것처럼, 병과 사고로 인해서 없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아주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만은, 어떤 모양으로 죽었던, 언제 죽었던, 그 죽음 자체는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결코 사건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럽고, 모든 의전 중에 모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축제적 사건 중에 가장 큰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아주 멋진 장례식 하나를 소개합니다. 사실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마샤 카터라고 하는 할머니가 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 삶도 명랑하게 아름답게 살았고 또 삶의 절정인 죽음을 가장 아름답게 스스로 장식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유서를 통해서 모든 손님들에게, 자기에게 올 손님들에게 절대로 상복은 입지 말고 화사한 옷을 입으라고, 절대로 그 날 슬픈 이야기나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고, 아주 밝은 노래, 기쁜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만장하게 웃음을 웃어가면서 아름답고 경쾌한 프로그램으로 장례식을 지내달라고 목사님께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인의 편지가 낭독됩니다.

"지금까지 저는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제게 베풀어준 모든 고마운 분들에게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문 앞에 죽음이 얼른거리면 저는 따라나설 겁니다. 춤 신발을 바꾸어 신고 훌쩍 떠날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사랑을 띄우며 마샤." 이렇게 세상을 떠났고 그 장례식은 그야말로 굉장한 음악회요 굉장한 축제로 그렇게 치러졌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열 두 시간쯤 앞에 십자가라는 죽음이 있습니다. 억울하고, 역사상 가장 비참하다고 하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걸 아시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소위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성만찬 예식을 행합니다. 이건 마지막 사건이지만 예수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렸노라!" 여러분이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이 시간을 한 평생 기다렸노라"하는 거룩하고 찬란한 작품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 다가오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모르고 있고 지금도 허황한 꿈만 꾸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예수님을 파는 가룟 유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 참 묘한 시간입니다. 그 분위기가 아주 특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손수 세숫대야에다 물을 떠다가 허리를 굽혀서 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 이 철없는 제자, 이 멍청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를 사도 요한은 뒤늦게 이렇게 봅니다. 오늘 13장 2절에서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것을 사랑의 계시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예방의학 권위자인 피터 한센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이 건강하려면 몇 가지 조심할 것이 있다. 첫째는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하고, 둘째는 적당하게 운동을 해야 하고, 세 번째는 나쁜 습관을 버려야한다." "담배, 술, 화내는 것, 게으름 피우는 것, 이런 것들,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러면 건강하다."

거의 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이것은 50%고 나머지 50%는 사랑이다"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해야 건강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이웃 사랑은 도덕적 문제만이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다" 그랬는데 한 단계 더 붙여서 말한다면 "사랑은 생명문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불행하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에 의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결국은 사랑의 문제는 생사의 문제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랑이 곧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여기에 내 생명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주신 이 계명을 내가 어떻게 어떤 자세로 이것을 지켜 가느냐?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축복된 계명에 대하여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한 이 명령, 여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부자유한 가운데 억지로 노예적 순종을 하며 끌려갑니다. 심지어는 "팔자"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했는데 이 결혼이 못 마땅합니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이 "팔자" 라고 생각하며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사랑하고, 봉사하고 싶지 않은 일에 봉사하고, 그럭저럭 한 평생을 다 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지 말라! 한 말은 지킨 것 같은데 거기에 매여 살았다고 하는 불행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지 말라는 일에 대해서 무조건 반항하는 것이 자기 자유를 찾고 자기 정체를 찾는 비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합니다. 아이들은 하지 말라는 것 할 때 통쾌감을 느낍니다.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통해서 기쁨을 얻고,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자기 정체를 느끼는 이러한 행동이 바로 불행의 요소요 구제 불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따라가며 어떤 마음으로 순종합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새 계명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새 계명이란 말은 옛날 계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옛날 계명은 주로 "하지 말라" 는 것이고, 새 계명은 "하라" 하는 말씀인데 이것은 자발성을 말하고 선택적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명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것에 대하여 그 명제를 말씀하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즉 다시 말해서 계명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계명을 위해 있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명을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소중하게 해 주신 축복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고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계명을 대해야 됩니다.

"그가 사랑한 것 같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 하는 그것이 동기요 근본이요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받았다는 것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의 뿌리가 있어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네가 내게 대하는 것처럼 내가 네게 대할 것이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것인데 이것은 율법입니다.
둘째, 네가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 이것은 독선입니다. 쉽지 않은 것입니다.
셋째,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 좋은 말 같지만 이것은 무서운 집착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이것만이 신앙적 사랑입니다. 사랑이 병들 때 고칠 길이 없습니다. 참 사랑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여기에만 사랑이 있고 여기에만 사랑의 진리가 있고 여기에만 사랑의 자유가 있고 사랑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사랑의 가장 귀한 진리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분은 죄인을 사랑한 것이지 절대로 의인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에 감격하고 이 사랑에 충만할 때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내가 사랑 받은 대로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사랑 받기 위해서 사랑하겠습니까?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을 때 사랑하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이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에 새 계명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충만할 때 거기 자유가 있고 아무 두려움도 근심도 걱정도 없습니다. 의무이면서 이것은 자유입니다. 희생인 동시에 기쁨과 감사가 있고 엄청난 수고가 있지만 거기에 무한한 창의력이 있고 여기에 행복이 있고 여기에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 사랑보다 더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에멧트 팍스라는 사람이 사랑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시적으로 멋지게 표현해 놓은 글이 있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고,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으며,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으며,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 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 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거대한 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입니다. 충분히 사랑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보다 마력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은 어깨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크고 부드럽고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이 내 어깨에 와서 놓인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독일의 뇌학자 에코노모가 사람의 뇌세포를 세어보았더니 약 136억 5천 300만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괴테는 일생동안에 겨우 0.4%밖에 사용하지 못하였고, 아인슈타인은 일생동안 겨우 0.6%밖에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어느 누가 1%만 개발한다면 역사상 최대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잠재적 능력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분량의 사랑의 세포가 있는데 일생동안 사용하지 못하고 사장되는 세포가 얼마나 많을까요?

<가시고기>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인데, 가시고기라는 물고기는 엄마 고기가 새끼를 낳아놓고는 그냥 떠나 버리면 홀로 남은 아빠고기가 목숨을 걸고 새끼들을 지켜냅니다. 하지만 새끼들이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모두 떠나버리고 아빠고기는 바위틈에 머리를 박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아들을 사랑하는 그 애절한 마음과 그가 선택했던 방법들에 가슴이 너무 아파 많은 독자들이 울었던 내용입니다. 그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랑해서 오늘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된 것 사실입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장애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어느 교사가 갑상선에 암이 발병하여 5cm, 3~5cm, 3cm 종양 세 개가 자리 잡고 크고 있는 것을 발견해서 입원을 했는데, 갑자기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면서 그날로부터 9일 동안 수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소식이 장애인학교 학생들에게 전해졌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교회 성도들은 교사로 있는 그 집사님이 열병에서 빨리 나아서 암이 더 확산되기 전에 수술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9일이 지날 무렵에 열이 내리자 수술을 받기 위해서 최종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9일 동안 앓게 했던 열병이 그 무서운 암 덩어리  3개를 녹여 버렸던지 갑상선 종양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를 받았던 그 집사님은 찬양대에서 봉사하는데, 얼마나 영적인 감동으로 찬양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열병을 고쳐달라고 했는데, 열병을 통해서 암을 치료하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여러분! 열은 몸의 상태를 알려주는 방어 신호입니다. 몸과 심령이 너무 과열이 되어도 문제고, 냉열 상태가 되어도 문제입니다.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시듭니다. 사랑의 열정이 식으면 심령이 병듭니다. 믿음의 열정이 식으면 의심과 두려움이 심령을 지배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열정이 식으면 환경 탓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몸, 마음, 영혼은 건강하십니까?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녹이 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녹은 쇠에서 생기는데 녹슨 쇠는 그 자체를 못 쓰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았으나 섬기지 않고, 은사를 받았으나 방치하여 녹슨 심령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이 시간 우리의 마음, 심령, 몸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기 원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할 때 모든 면에서 놀라운 자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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