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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프로파일 (마 1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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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파일이란 <프로필>의 영어식 발음입니다. 프로필은 보통 그 사람의 경력이나 이력을 적어 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가 한번은 어떤 학교에 원서를 쓰다가 거기에서 프로파일이란 단어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 과정을 마치게 되면 당신은 이런 모습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프로파일이 경력이나 이력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격이나 됨됨이를 가리킬 때도 쓰인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프로파일>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됨됨이는 갖추어야 된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성취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기록한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이 갖추어야 할 모습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그리스도인의 프로파일을 작성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받은 신학교육은 서양학문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분석적이고 분리적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지나친 분석주의, 분리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신앙생활의 목표를 예수를 닮는 것에 둡니다. 예수를 닮는 것을 분석해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격을 닮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역을 닮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성도는 속은 예수를 닮은 것 같은데 그만큼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성도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인격을 보면 영 부족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향해 비난합니다.
“너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인격이 왜 그 모양이냐? 그러려면 차라리 일은 집어 치워라” 하면, 또 한 사람은 “너는 예수 닮은 척만 하면 다냐? 일을 해야지! 열매도 없으면서 네가 무슨 제자냐?” 라고 합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을 신앙과 생활로 분석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것을 분리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 -신앙과, 행동하는 것- 생활이 달라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습니다.

사실 인격이 갖추어졌으면 당연히 밖으로 행동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행동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게 정상인데 문제는 이 둘을 분리시켜 놓고 자꾸 한쪽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이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고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든 다른 쪽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인격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을 보시고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눅6:44)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무가 열매를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인격이 갖추어지면 행동은 저절로 나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절로>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행동을 하려고 하면 너무 힘이 듭니다. 한번은 억지로 하지만 두 번 세 번은 못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바른 원리는 인격이 참으로 갖추어지면 행동은 저절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 얼마나 <인격화>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격화는 <성품화>를 의미합니다. 성품은 선천적 요소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소의 생각과 습관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생각과 묵상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쌓이면 습관이 되고 마침내 나의 성품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려면 먼저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의 뜻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이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 거짓이었고 가짜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아하!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그런 진리를 깨닫고 나면 그 말씀이 귀하고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럴수록 점점 그 말씀을 묵상하고 내 마음에 붙잡아 두게 됩니다.

말씀이 그렇게 되면 이제는 말씀대로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삶 속에서 그 말씀대로 실천합니다. 그때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말씀대로 한두 번 살게 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마침내 인격이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격이 조금씩 예수를 닮아 가면 닮아가는 만큼 예수의 일이 조금씩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인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머리 속에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이 들었다고 해도 몸으로 살지 않으면 인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실천하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오랜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실수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을 딱 이분법으로 나눕니다. 몸을 던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두 부류입니다. 절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알아도 순종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똑 같습니다. 신앙에서 무지란 불순종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알고 있는 지식입니까? 몸을 던져 실천하는 순종입니까?

올해는 “말씀에 올인하는 해”로 정했습니다. 과연 말씀이 그러한지 한 말씀이라도 그대로 실천하여서 말씀의 복을 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성품 세 가지를 그리스도인의 프로파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먼저 본문 19절에 “그는 다투지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난 이후 다투는 횟수가 줄어들었습니까? 여전히 그대로 입니까? 적어도 더 늘어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생활에서 다툼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 압니다. 세상에서는 다툼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모든 다툼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모든 다툼, 갈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뿌리에는 남보다 높이지려는 마음, 그래서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본성상 그 마음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인생은 날마다 경쟁이고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부와 명예, 권력을 더 차지하려는 것도 더 큰 대접을 받으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와 다투신 모습을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툼은 남보다 높아져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인데, 예수님은 도무지 누구와 다투어서 무엇을 얻어 내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도 자신을 해치려는 바리새인들과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받는 그 대접, 그 특권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입만 열면 누구보다 더 “하나님! 메시야!” 를 부르짖었지만, 막상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 때문에 자신의 자리와 특권이 흔들리게 되자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다투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였지만, 높은 자리에 욕심이 있고 남에게 대접받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맞붙어 싸우지 않은 것은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런 자리나 그들이 받는 대접에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와 헤롯과 다투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리나 대접에 욕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프로파일 한 가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남을 섬기는 사람은 다투지 않는다.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다툼이 있습니다. <자리싸움>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다툼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다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자리를 포기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자리를 차지하고 정상에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는데도 다투지 않을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자리>가 목적이 아니라 자리를 통해서 <섬기는 일>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더 많이 섬기겠다고 나를 대통령으로 시장으로 뽑아 달라고 합니다. 그 자리를 놓고 다툰다는 것 자체가 <섬김>이 목적이 아니라 <자리>가 목적이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섬김이 목적인 사람은 누가 그 자리에 앉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누가 앉든 섬기는 일만 잘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은 싸울 일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잘 섬기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그 자리를 비워주고, 나는 다른 자리를 만들어 섬기면 그뿐입니다. 결국 그렇게 함으로 섬기는 자리가 더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진정으로 섬김이 목적이라면 굳이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섬김이 목적이 아니라 자리 자체에 목적이 있을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천국에 가면 다툼이 있을까요? 물론 없을 것입니다. 모두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 되십니까? 예수님은 섬김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곳에는 결코 다툼이나 분쟁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다툼이 가장 적어야 할 성도들이 모인 교회에도 세상과 똑같은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섬기는 일이 아니라, 대접받기 위해 <자리싸움>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한다면 무슨 싸움이 일어나겠습니까? 내가 행복해 지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먼저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면 무슨 다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툼을 없애는 가장 좋은 훈련은 섬김의 훈련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에서 자기 의에서 나온 섬김과 참된 섬김을 이렇게 비교해 놓았습니다.

“자기 의에서 나온 섬김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신의 노력에서 나온 섬김입니다. 남들이 보는 거창한 섬김일 때 섬기기를 즐겨하며 작은 섬김과 큰 섬김을 구별합니다. 섬김의 결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무언가 상대방으로부터 보답이 돌아오기를 열심히 기다리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는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누구를 섬길지 그 대상을 자신이 선택합니다. 그리고 섬길 기분이 내켜야 섬기고 기분이 좋지 않거나 조건이 나쁘면 섬기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섬김이 일시적이고 이벤트 적입니다. 결국 자기 의에 근거한 섬김은 공동체에 금이 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그 포장을 뜯고 보면 자신의 욕심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은 숨은 섬김, 작은 섬김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큰 섬김은 설탕과 같고 작은 섬김은 소금과 같습니다. 설탕은 탁월한 맛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사용빈도는 적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어디에서나 필요로 합니다. 큰 섬김은 드물게 발생하는 것이지만 작은 섬김은 날마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웅적인 큰 섬김은 한 순간의 큰 희생을 요구하지만, 작은 섬김은 지속적인 희생을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체의 본성은 높은 자리에서 남의 대접 받기를 좋아합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항상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그 훈련은 섬김에 달려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어도 남을 섬기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진심으로 말합니다. “당신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교만한 육체는 한 번에 꺾을 수 없습니다. 섬김의 훈련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꺾어지는 것입니다.

2. 둘째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2:2에는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들렌다’의 <크라우가조>는 ‘크게 소리치다’는 뜻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군중들이 고함을 지를 때 쓴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에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신 후에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거기에 자기 이름은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서 그 뜻을 이루는 것이지,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고 자기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내 이름과 내 영광을 숨기셨습니다. 내 이름과 내 자랑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 이름을 나타내고 내 자랑하려다가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단순한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합니다.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처럼 배달해준 것으로 끝이 나야지, 그 자리에 머뭇거리면 안됩니다. 마치 자기가 만든 것처럼 사람의 칭찬을 기다리거나 자기 것처럼 값을 받아선 안 될 것입니다.

자기자랑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들레지 않습니다.

소리 지르는 것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 자랑 할까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상과 그분의 평가가 더 중요한데, 보이는 세상과 사람을 하나님 보다 더 크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인정과 칭찬 받지 못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인정은 덤일 뿐이지 궁극적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옳다고 주장해도, 온 세상이 일어나 반대한다 해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게 답입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만 바라는 사람은 들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완전한 인격과, 하나님이 아니면 행할 수 없는 기적과 능력을 나타내셨지만 사람들 앞에서 떠들지 않으셨습니다.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는 자신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이 나가신다”고 동네방네 떠들지 않습니까?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내 나팔>을 불고, 나를 나타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왜 들레지 않으셨을까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는 세상 사람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하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둘째는 세상은 목소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변화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세상은 목소리가 적거나, 구호가 없어서 변화되지 않은게 아니라 삶이 없어서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목소리입니다. 목청 크면 세상 싸움에는 이길지 몰라도 영적 싸움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싸움은 목청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합니다. 삶으로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 자체가 가장 큰 무기입니다. 소리 지를 필요가 없습니다. 행동이 없으면 소리가 나옵니다. 빈 깡통처럼 요란한 소리만 내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들레지 않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은 것을 믿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칭찬하든, 욕하고 비난하든 들레지 않습니다. 자기가 없어 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랑하려면 주안에서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프로파일은 들레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 자기 영광에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3. 세 번째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 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면 사실 인간은 갈대와 같습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입니다. 죄로 상해 있고, 세상의 풍파와 고통, 실패로써 입은 상처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허물과 결점이 많고 상처와 아픔을 지닌 사람을 상한 갈대라고 짓밟습니다. 상한 갈대니까 아무데도 사용할 수 없다고 꺾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긍휼의 마음으로 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십니다. 옛날에는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서 불기도 했고, 갈대를 깎아서 붓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파상(破傷)된 인격을 고쳐서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는 유용한 악기로 사용하십니다. 천국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귀한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꺼져가는 심지와 비슷합니다. 심히 희미합니다. 어떤 불은 거의 꺼져서 연기만 납니다. 그러나 아주 꺼진 것은 아니고 작은 불씨만 남아있습니다. 심히 미약한 불입니다. 관주에는<꺼져가는 심지>를 다른 말로 <연기 나는 삼대>로 기록했습니다. 그 뜻은 둘 다 <작은 믿음>을 말합니다.

작은 불씨 같은 믿음은 너무나 작아서 불을 피우지 못합니다.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남을 위해서 무슨 봉사를 하지 못합니다. 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지도 못합니다. 또 불티만 있어서 연기만 납니다. 의심의 연기가 있고, 근심의 연기가 있고, 불평의 연기가 있고, 그 연기는 다름 사람의 눈만 쓰리게 하여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은 이런 연기와 그을음만 일으키는 작은 믿음을 멸시하기 쉽습니다. 차라리 너 같은 것은 없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꺼져 가는 심지일지라도 아주 끄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연기만 나는 삼대일지라도 그 속에서 아직 남아있는 불씨를 보십니다. 불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불씨를 예수님께서는 끄지 않으시고 사랑의 숨결로 불고, 성령의 바람으로 부채질 하셔서, 불꽃을 다시 일으켜 내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는 등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옛날만 아니고 역사를 통하여 지금까지 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어제만 아니고 오늘도 하고 계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여러분, 상한 갈대가 되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불이 희미하다고 절망 할 것도 아닙니다. 긍휼하신 주님은 상한 갈대로도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실 수 있고, 꺼져가는 심지라도 새로운 불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긍휼하신 주님은 항상 최악의 경우에서도 최선을 찾아 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희망입니다. 넘어진 자, 쓰러진 자, 우는 자, 짓밟힌 자, 어둠에서 방황하는 모든 자에게 예수의 이름은 희망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수는 모든 문제의 답이며 열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프로파일은 이런 주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긍휼>은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자식을 향해 가지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라함>은 생명을 품고 있는 어머니의 자궁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사람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상한 자를 고쳐주며 우는 자의 눈물을 씻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다 돌아서고, 나를 포기해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내 겉에 남아 있어 줄 한 사람이 있습니까? 최후까지 나를 믿어주고, “나는 너를 놓아 줄 수 없다”고 끝까지 붙들어 줄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한 사람이 없어서 절망하다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에게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자체가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프로파일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투지 않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자기자랑에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들레지 않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긍휼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바라는 마지막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신의 프로파일을 쓰실 차례입니다. 먼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만나는 사람들과 다투지 않습니까?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가는 곳마다 시끄럽게 만들지 않습니까? 내 이름을 숨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처입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만들어 주는 사람입니까? 그들의 희망을 짓밟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온 천한 만민 앞에서 당당히 내세우시고 기쁨으로 외치고계십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하나님은 일찍이 사탄 앞에서 한 사람을 그렇게 소개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시대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피시다가 과연 이와 같이, “보라! 이는 나의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라고 인정받을 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그는 다투지 않고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이 말씀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저와 여러분의 <프로파일>로 기록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권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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