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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섯 마디 대(對) 일만 마디 (고전 1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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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론이나 여론에 있어서 열띤 논쟁거리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영어로 하자면 '핫이슈'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핫(hot)'은 문자 그대로 '뜨거운'이 맞는데, 왜 '이슈(issue)'에 가서는 '쟁점' 따위의 단어 대신에 하필이면 '감자'가 들어가는 것이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그처럼 쌍방이 열을 올리게 되는 논쟁은 아예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막 불에 달구어져서 뜨거워진 감자를 집어 들다가는 자기 손을 데일 것이 분명하니 아예 건드리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내에서도 그와 같은 '뜨거운 감자'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 은사의 문제였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이 방언 은사에 대한 오해와 부작용이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던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앞서 13장에서 성령의 일반적인 은사들을 설명했던 사도 바울은, 이제 14장에 와서 그 은사들 중에서도 그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던 방언에 대하여 다시 가르치게 됩니다.

  방언은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입니다.
  방언이 기독교인들이 받아야 할 가장 대표적인 은사인 것처럼 열을 올리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목사 자신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교인들의 추세와 요구 때문에 주일 오전예배를 드려 놓고도 오후에는 소위 '은사 집회'를 따위를 따로 가지는 교회도 있습니다.
  괜히 건드려서 손을 데는 것보다는 그저 가만 두는 것이 낫다는 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방언 문제에 대하여 그 입장이 너무나도 뚜렷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은사의 한 종류이기는 하지만 제일 꼴찌 은사에 불과하며(고전 12:10), 특히 성경 말씀대로 말하고 증거하는 '예언'보다는 훨씬 더 열등한 것임을 너무나도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방언 은사의 약점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왜 오늘날 교회에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는 '다섯 마디의 예언'이 훨씬 더 귀중한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방언은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될 경우에 만약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고 대신 방언만 말한다면 그들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계시, 지식, 예언, 가르치는 것"들을 한 단어로 묶어 다시 표현하자면 오늘날의 '말씀 선포' 즉 '설교'에 해당됩니다.
  이 중에서 "예언"은 언뜻 생각하면 무슨 미래에 생길 일을 족집게처럼 미리 예지하는 초능력 같은 것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의 선지자(예언자)의 사역이나 초대교회에서의 예언이란 그런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대언적 사역'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공적 말씀 선포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의미 전달'이 분명히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계시, 지식, 예언, 가르침 등은 항상 상대방과 뜻이 통하는 말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사역인 것입니다.
  반면에 방언은 대부분 그냥 "뜻 없는 소리"로 사람 귀에 들려집니다.
  사도 바울이 만일 그처럼 상대방이 못 알아들을 소리로 무엇을 가르치려 했다면 그것이 고린도교회에 아무 유익이 되지 못했을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뜻 없는 소리라는 것이 얼마나 듣기 나쁜 소리인지를, 사도 바울은 이어서 악기의 소리를 예를 들어 비유하고 있습니다.
  악기의 소리 색깔이 분명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즉 관악기 소리인지 현악기 소리인지조차 분간 안 될 정도로 듣기 싫은 잡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팔은 당시 전쟁터에서 중요한 전투 신호용 악기였는데, 그 소리가 뚜렷하지 아니하면 전진 신호인지 후퇴 신호인지 알 수 없는, 전쟁터의 아비규환에 그냥 섞여 버리는 무의미한 잡음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런 악기들은 오직 "그 음의 분별"을 정확히 함으로써 감정이 전달되는 아름다운 선율, 혹은 간단하지만 의미 있는 신호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 "생명이 없는 것"에 불과한 악기조차도 어떤 '뜻이 있는 소리'를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소리와 악기 소리의 다른 점은, 원래 사람 소리는 대사나 가사를 통하여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지만 악기 소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소위 생명 있는 사람이 악기만도 못한 잡음을 그냥 허공에다 진동시킬 수도 있습니다.
  바로 듣는 사람에게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할' 말을 할 때인 것입니다.

  10절의 "세상에 소리(언어)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라는 말은, 어느 나라 언어이든지 간에 사람의 말은 '뜻 있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11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야만"이란 단어는 원래 헬라 사람들이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 다시 말하자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경멸조의 표현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말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 의사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동물이나 무생물이 가질 수 없는 '문명인'의 대표적 능력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말이란 것이 만약 그냥 '뜻 없는 소리'가 되면 그런 소리 내는 사람은 그저 "야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 없는 소리의 방언을 지껄이는 것은 그야말로 정말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는 야만인의 행위'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즉 자신이 뜻 없는 방언을 남 앞에 하면 자기가 그 사람 앞에서 야만인이 되고, 또한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라," 즉 그런 방언을 상대방이 내게 말할 경우에는 그 상대방이 자기 앞에서 역시 야만인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설교가 야만인의 소리가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설교가 듣고 나서도 무슨 뜻으로 한 소리인지 한참 끙끙대며 추측을 해 보아야 할 소리, 아니면 애당초 아예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같은 말이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참된 교회의 삼표식 중에 가장 기본적인 '말씀 선포'가 청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허공에 울리는 시끄러운 잡음이 된대서야 정말 말이 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방언은 그래서 절대로 설교가 될 수 없는 언어입니다.
  방언은 그래서 결코 설교를 대신할 수 없는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 누구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방언을 많이 하는 사도였지만 고린도교회 앞에서는 단 한 마디의 방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교회에 유익이 될' 말씀 선포가 결코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에게 전하는 말씀'이며, 그런 까닭에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말로 쓰이는 방언은 그런 '공적 설교'에 쓰일 수 없는 언어인 것을 기억하면서, 귀에 얼핏 신기하게 들리는 방언보다는 "교회에 덕을 세우고" 은혜를 넘치게 하는 예언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방언은 공예배의 찬송과 기도의 언어로 쓰일 수 없습니다.

  13절로부터 19절까지의 말씀에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원래 오순절 날 사도들에게 내려졌던 방언 은사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말을 난무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설교가 청중 각 개인의 귀에 자기 민족이나 나라의 고유 언어로 들려진 일, 즉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외국어를 잘 말할 수 있는 사도들이 없던 상황에서 복음이 신속히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전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베푸신 기적이었습니다.

  지금 지구상 구석구석에 선교사들이 흩어져 복음 사역을 펼치고 있고, 외국 목사를 강단에 초청하여 동시통역할 수 있는 오늘날에 와서는, 그 같은 오순절의 방언 은사는 사실상 필요 없게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통역하는 은사도 받기를) 기도할지니"라고 여기서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방언이란 그처럼 '동시통역처럼 들린 오순절의 방언'이 아니라 전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런 방언은 복음 전파에도 아무 소용없을 뿐 아니라, 신자들의 예배 시간에도 역시 전혀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배 시간에 작동되어지는 두 가지 인격적 요소를 '영과 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과 연결되는 인격의 지성소입니다.
  "나의 마음"은 그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을 이해하는 좌소, 즉 '이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영(靈)과 지(智)'의 작용이 동시에 예배 시간에 일어나야만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즉 "영으로 기도"할 때에는 "또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영으로 찬미"할 때에는 "또 마음으로 찬미"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 원칙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이 기도"하고 있다는 순간에 "나의 마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뭔가 크게 잘못된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하는데, 내 마음이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조차 스스로 감지하고 있지 못하면, 그런 기도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감동되는 예배란 것은 반드시 동시에 지적으로 인식되고 이해되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떤 몽롱한 체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나오는 "기도, 찬미, 축복(사례), 감사" 등은 여기서는 다 공예배의 순서들을 가리킵니다.
  "아멘"이란 '옳습니다.' 혹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릴 때 그 선포된 말씀이나 공적 기도 내용에 대하여 동의하는 표로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공기도나 설교에 혹은 찬양에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은 이미 구약 때부터 행해졌던 예배의 요소였으며 물론 신약의 초대교회 시절에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만일 예배 시간에 "방언으로 기도하면" 아무도 그 내용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습니다.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라고 했듯이, 누가 대표로 감사기도를 해도 만일 방언으로 한다면 아무리 자기는 "영으로 축복(사례)"한다고 해도 그 기도에 대하여 다른 교우들이 "어찌 아멘"하고 화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아직 '영적으로 깊이 자라지 못한 약한 신자'여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배가 그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의 감동하심과 성경 진리에 대한 깨달음 가운데 드려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선 '뜻이 통하는 말'로써 드려져야만 합니다.
  '뜻이 통하는' 찬송의 가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미하여 영광 돌리는 마음이 성가대와 회중 사이에서 이심전심이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대표기도를 해도 그 '뜻이 통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공감되어져서 제일 나중에 아멘이라는 화답으로 모아져야만 합니다.

  방언은 그처럼 회중이 공감되는 은혜를 도무지 발생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 번역된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영적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 남이 알 수 없는 까닭에 '공감되고 이해되는 마음의 아멘'을 불러 모을 도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언은 예배 중에 찬송이나 기도의 언어가 될 수 없으며 예배 중에 들어갈 특별순서조차 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교회에서"는 늘 의미가 분명한 말로써 자신의 "깨달은 마음"을 하나님과 교통하며 성도들과 나누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방언은 불신자 전도의 언어가 될 수도 없습니다.

  20절 이하 25절까지에 기록하기를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 했습니다.

  악에 대해서는 평생 어린 아기처럼 순진해야 하지만, 지혜에 대해서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방언 은사에 대한 바른 인식 역시 장성한 신자가 가져야 할 지혜라는 뜻입니다.
  21절에서 "율법에 기록된바"하고 인용하는 말씀은 이사야 28장 11-12절의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벌을 내리시는 방편으로서 앗수르 언어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다른 민족의 방언으로 말씀하셔서 그로 하여금 알아들을 수 없게 하시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을 버렸다는 심판의 표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이 '못 알아들을 방언'으로 전해지면 그 듣는 사람에게는 저주이며 심판의 선언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반면에 구원 받은 택자에게는 반드시 알아들을 수 있는 뚜렷한 예언의 말씀으로 복음이 증거되기 때문에,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그 말 듣는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 즉 초신자나 불신자에게는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런 경우에 당연히 그런 사람들이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방언으로 와글거리는 교회는 자기네 스스로는 성령충만한 교회라고 주장하겠지만, 성경은 그런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다 예언을 하면" 즉 성경 지혜에 장성한 신자들이 그들의 '깨달은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그런 예언 앞에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됩니까?
  그것은 그들이 "... 책망을 듣고...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는" 놀라운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불신자들이나 영적으로 무식한 자들 중에서도 바로 그 말씀의 책망과 판단 때문에 자신의 숨은 죄악을 발견하게 되고 죄책감을 느끼게 회개하게 되는 변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게" 되는 참된 구령의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말씀으로 바른 전도를 할 때만이, 택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얻게 되고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하는 거룩한 공동체임이 증거되는, 실로 기적적인 열매들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중한 체험이 있어도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간증하면 다른 사람에게 그 은혜가 전달될 수 없습니다.
  전도한답시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아무리 열심히 권면해 보았자 단 한 명도 제대로 구원받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한 소리 내는 것을 무슨 신기한 쇼처럼 불신자 앞에서 내보이면서 전도하려는 것은,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참된 영지 작용을 결코 유발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못 알아들을 말로 지껄이면서 '당신도 이런 은사를 받아야 제대로 성령 받은 사람이 된다.'라고 전도한다면, 그것은 사실 '당신은 예수 믿지 말아라.'고 아예 상대방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입니다.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전달되는 말씀은 오직 '믿지 아니하는 자, 하나님께서 이미 버린 자'들을 위한 표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도는커녕 그저 '미쳤다'라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런 방언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을 때" 즉 모든 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 같이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라고 깨우쳐 주는 말을 들을 때 "그 마음에 숨은 일" 즉 여태껏 자기 인생 속에 파묻혀 있던 죄들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 무식한 초신자들 역시 그런 방언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즉 먼저 예수 믿고 잘 믿는 교우들이 꼭 같이 권면해 주는 말을 듣고서 자기에게 있던 교만을 발견하고 진정 함께 겸손하게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게" 되는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다 '방언'하는 것보다 한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꼭 같은 복음으로 전도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참된 신앙공동체의 성도들을 모을 수 있는 길인 것을 잊지 말고, 늘 성경 말씀의 지혜에 장성하여 그 누구 앞에서라도 바른 복음으로 '예언'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일견 신비스럽게 들리고 멋있게 보이는 방언이라는 것은 실상 설교도, 공예배의 찬송이나 기도도, 전도도 될 수 없는 언어인 까닭에 사도 바울은 본문 1절부터 5절을 통하여 그런 방언 대신에 예언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한 것입니다.
  기록하기를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은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인데, 이것은 앞서 13장에서 이어지는 문맥으로서, 무슨 은사를 받든지 간에 그 은사를 사용하는 공통적인 방법은 오직 사랑뿐임을 가르칩니다.
  이어서 바울은 특히 '방언 은사'를 '예언 은사'와 대조시켜 비교함으로써, 방언의 약점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예언의 우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방언은 곁에서 "알아듣는 자 없이" 자기 혼자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즉 "하나님께 말하는" 특별한 영적 언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예언은 "(교회에)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로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지만 방언이 하나님과 말하는 언어이고 예언이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언어라고 해서 절로 방언이 더 우수하거나 귀한 은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오직 "자기의 덕"을 세우는, 즉 어디까지나 개인신앙의 유익을 위한 은사인 반면에,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즉 공적으로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분명히 "(고린도교회의)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는," 정말 특별한 방언 은사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방언은 오직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기도할 때만 쓰일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것을 금하지는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교회생활에서 장려하거나 드러내어 자랑할 은사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은사 받은 한 개인에게만 유익이 될 뿐, 형제자매에게나 교회를 위하여서는 아무 덕이 될 것이 없고 오히려 오용될 때 큰 해를 끼칠 위험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는 가운데서도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 하나님과 일대 일의 영적 교감을 가질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방언 같은 은사도 필요는 했지만, 그보다는 교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는 예언의 은사가 훨씬 더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고린도교회가 그 방언 은사 때문에 훌륭한 교회가 된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그 때문에 그처럼 대표적으로 문제 많은 교회가 되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방언 은사를 '성령과 개인적으로 교통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남보다 더 영력 높고 신앙 깊은 증거'라고 오해했을 때부터, 그 방언은 고린도교회를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던 '뜨거운 감자'로 전락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방언은 설교가 될 수 없는, 하나님께 개인적으로만 쓰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공예배의 기도와 찬송에 쓰일 수 없는, 의미 없는 소리입니다.
  불신자 전도에 사용될 수 없는, 그들에게 생소한 언어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전혀 아무 덕을 세울 수 없는 은사라는 사실은 초대교회 시절이나 현대교회에서나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백번 더 나은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과 소리로 말씀을 나누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해야 하겠습니까?
  아무 덕이 되지 않을 '일만 마디'로 반복되는 시끄러운 소리들로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정말 성령의 감화감동을 입고 성경 말씀을 깨달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다섯 마디'의 또렷한 말로 해야 하겠습니까?
  교회를 말씀 중심으로 세우는 예언, 예배의 은혜를 공감시키는 찬송과 기도, 불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이끄는 전도 - 사람 귀에 그럴싸하게 들리는 '일만 마디의 방언' 대신에 이처럼 진짜로 성령 안에서 통하는 '다섯 마디의 예언'의 은사를 발휘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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