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결단의 기회 (겔 33:13~16, 고전 1:4~9, 마 13:24~30)

  • 잡초 잡초
  • 177
  • 0

첨부 1


오늘은 성만찬이 있는 주일이라 말씀을 짧게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고 만나면 늘 웃게 되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 분의 직업은 변호사입니다. 이 분은 유머감각이 많으신데, 법률가가 유머를 쓰니까 듣기에도 좋고, 엔돌핀도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 2주 전에 어떤 회의장소에서 이 분께서 “제가 변호사인데, 하나님 나라를 가보니 변호사는 한 명도 없더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얼마나 지어서 그러냐고 반문하니까, “천당 갔더니 소송이 한 건도 없어서 어디에 가면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지옥을 가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지옥에 가보았더니 변호사들이 우글우글 하더라”고 답하셨습니다. 판단은 여러분께서 하십시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고서 나오다가 ‘목사인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무엇이라고 하실까. 목사가 왜 왔느냐고 하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치시는 의사분들, 천국에 가면 환자가 있을 것 같습니까. 그래서 지옥에 가보라고 하시면 지옥에 가고 싶으시겠습니까.

아주 흔하고 웃긴 이야기 같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고, 어떤 세상이며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런 배경을 두고 에스겔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즉 이 말은 내가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맹세를 합니다. 첫째, 악인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는 않는다. 악인이 자기의 길에서 돌이켜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악인이 살 것이다. 나는 악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가 범했던 과실은 전혀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다. 돌아와서 살라. 이것이 첫 번째 주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의인은 반드시 살리라고 선언했지만, 의인이 자기 자신의 의를 믿고 악을 행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의인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내가 반드시 살려 내겠다.

에스겔서는 아주 쉽고 기초적인 우리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 의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변함없이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날까지 의인으로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분명히 살리라고 약속받은 의인은 자기 의를 행하는 죄를 범해서 악 때문에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한번 악한 사람이라고 찍힌 사람이 평생 악인으로 산다는 법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성은 우리가 스스로 의 때문에 살 수 없고, 스스로 죄를 지고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묘미는 한 번 태어나는 대로, 한 번 결단한 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넘어지고, 찢어지고, 힘들지만 또 오뚝이처럼 일어나 살 수 있습니다. 잘되는가 싶었더니 망하고, 망하는가 싶었더니 또 일어납니다. 저는 이 인간의 한계성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생 행복하게 사는 인간의 삶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평생 불행만 느낀다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행과 불행, 의와 악이, 죄와 선이 교차하면서 제 삶을 다이나믹하게 이끌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죄악에 빠진 불의한 제 삶이 한편으로는 고맙게 생각됩니다. 저는 변화되고 새로 거듭날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단에 따라서 생과 사, 의와 불의가 갈라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변한다. 사람의 사고도 변해야 한다. 사람의 삶도 변해야 한다. 사람의 인격의 모체도 변해야 한다. 인간이 통체로 변해야 하고 인간의 모든 시스템이나 제도도 변해야 한다.” 변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에서 선으로, 죄에서 의로 변해야 합니다. 이 변화의 초점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이 변화를 이끌어 가자고 하십니다. 이것이 영원하신 사랑의 뜻이자 창조의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반성이자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매우 냉혹하시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죄를 용서하시는 엄청난 사랑도 함께 지니고 계십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밀을 심었더니 밤에 사탄에 와서 가라지를 심었고, 두 개가 같이 자랐습니다. 가라지를 뽑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예수께서는 가라지는 ‘죄’인데, 죄를 뽑다가 의인인 밀까지 상하면 안된다. 끝까지 두어라. 내가 추수하는 날에 가라지는 뽑아서 불에 태우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엄격하시지만, 회개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까지는 기다리시만, 그 때까지 회개가 없다면 불에 태워버려십니다. 그 때에는 가라지만 태우시는 것이 아니라, 밀가지도 태우십니다. 예수께서 늘 강조하신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메타노이아)’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방향도 바꾸고, 과거에서 미래로 바꾸고, 죄에서 선으로 바꾸고 변화의 역사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제가 회개라는 말을 요즘 다시 배웠습니다. 회개는 교인, 교회가 아니라 비즈니스에서 제일 잘 하더군요. 그 중에서 자동차회사가 제일 잘합니다. 과거에는 자동차회사가 부속품이 망가지면 숨기기만 했지만, 요즘은 자동차를 팔 때 부속품이 망가졌으면 공개적으로 리콜을 선언합니다. 리콜은 현대판 회개입니다. 과거에는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리콜을 선언하면 소비자들이 기꺼이 리콜에 응할 뿐만 아니라, 리콜하는 회사를 믿기 시작합니다. 신뢰성 때문에 리콜하는 문화, 이것이 우리의 문화인 것 같습니다. 교회가, 오늘의 정치가 리콜을 선언할 수 있습니까. 하늘이 신뢰한다는 데 왜 하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리콜을 해서 신뢰성과 이익을 버는 회사가 공적으로 훨씬 더 공적으로 솔직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입니다. 저는 이 리콜문화가 모든 사회영역에서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공적자리에 있으신 분들은 내 정책이 잘못되었으니 다시 시작하겠다고 공적으로 리콜선언하셔야 합니다. 사적으로 리콜선언 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한테 리콜선언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공적으로 하든 사적으로 하든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하나님의 진실 앞에서 메타노이아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살려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회개, 결단의 역사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주변, 이웃, 가정, 사회에 대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그 원형이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바리새파, 유대교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며 혹독하게 의를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회개를 주제로 하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필요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언자적 비판의 원형입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필요로 했고,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적 결단입니다. 세례요한의 심판적 예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을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신앙적으로 세례요한의 예언자적 비판과 냉엄함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자신이 아니라 그 분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숭배나 예배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메타노이아,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세상 사람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타협할 수 없기 때문에 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자신에 대해 냉혹하셨느냐 하면 죄를 죄인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니라,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를 받기로 하셨습니다. 스스로 생명을 걸고 우리의 죄와 대결하십니다. 세레요한은 세상의 죄값을 진 적은 없고 비판적 예언만을 했을 뿐입니다. 예수의 결단,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결단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냉엄하여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가 고마운 이유는 하나님은 죄인 모두에게 냉혹하시지만, 자기자신에게도 냉혹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사회에 비리가 많아서 공격해야 하지만, 왜 자신의 비리에는 유약합니까. 자신에게 냉혹하면서 현실에도 냉혹할 방법은 십자가에서 보여준 삶의 진실, 결단의 진실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드리면서 한 가지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경동교회 제단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제가 두 가지 고백을 합니다. 하나는 너무 감격적이고 고맙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매우 큽니다. 상징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자기들 좋으라고 십자가를 치우고 자신들이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영상스크린으로 비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은 태도같지만 십자가 자리에 영상스크린을 갖다놓는 것이 축복인지, 개방적인 태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진실하게 예배드리고 고백해 봅시다. 저는 우리 교회의 십자가가 큰 것은, 신학적으로 우리의 죄가 이렇게 크다는 회개하는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며, 엄청난 부활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감격하는 한편 두려운 마음으로 단에 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인간사랑의 극치로서, 오늘 우리 삶의 좌표를 설정해 주고 있습니다. 이따가 떡을 드시고, 잔을 드시러 나오실 때 꼭 이 십자가를 가슴으로 쳐다보고 나오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박멸하시지만, 죄인은 회개시켜서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자기자신에게 냉혹하게 십자가를 지게 하는 방법으로라도 동참케 하십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님께 고맙습니다. 하나님께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오늘 고린도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냉혹하면서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들을 친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친교란 말은 원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이 거대한 십자가에서 부활의 생명을 주시려고 코이노니아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십시오. (박종화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