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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격랑 속의 신앙 (사 51:9~11, 15~16, 엡 1:17~21,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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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월초하루입니다. 두 번째 맞는 신년인데, 금년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받으시려면 오늘 마가복음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중입니다. 때는 예수께서 하루 종일 제자들과 함께 모여서 전도하시고, 설교하시고, 기적도 베푸시고 난 후 저녁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오가는 배를 타고 제자들과 가는 길입니다. 저녁이지만, 일을 마치고 쉬러 가는 때가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저녁이 되면 쉬지만, 유대적 사고방식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 되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천지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심에 따라서, 실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하나님이 쉬시는 이레 되는 날에 시작되는 것에 근거합니다. 즉, 하나님이 쉬시는 시간, 하나님과 함께 쉬는 시간, 하나님과 호흡하는 시간은 일상생활에서는 저녁입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 무렵에 배를 타고 건너갑니다. 그런데 깊은 밤에 항해를 가다가 풍랑이 생겼습니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고 격랑이 생겼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와 제자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전지전능하신 그 분과 함께 탄 배가 하루를 시작하는 날에 격랑에 휩쓸렸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오늘의 교회를 깊은 대양에 배 한척이 떠가는 그림으로 상징화시켰습니다. 이 세상을 대양으로 보고, 한 척의 배는 교회이자, 예수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그 뱃속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과 교회와 이웃과 함께 타고 있는 공동체가 예수와 함께 타고 있는 모습니다. 배 안의 예수는 배 뒷머리에 계시면서 풍랑이 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잠을 자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함께하는 첫 시간부터 고요하지 않습니다. 격랑 속에 헤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순풍에 돛 단 것처럼 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를 믿든지 아니든지 격랑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비를 내려 주시는데, 악인에게도 내려 주시고, 선인에게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햇빛을 내려 주십니다. 미안하지만, 우리 삶은 똑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아들이 배 안에 주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 밖에 없습니다. 위기라고 느끼시면 주무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깨우십시오. 깨우지 않고 주무시면 배는 격랑에 흔들립니다. 깨워서 그 분으로 하여금 ‘바다야 잠잠하라, 바람아 잠잠하라’고 명령하게 하십시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계시다는 믿음, 깨울 수 있는 결단을 가지고 있으면, 격랑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그 믿음이 없으면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격랑이 일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프고, 암에 걸려 죽고, 매맞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일들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단, 우리 아픔 속에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깨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믈으셨더니 제자들이 그때야 깨닫습니다. 예수께서는 ‘배타기 전에 5천명을 먹이고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도 뫘으면서, 막상 배가 흔들리니 왜 나를 찾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또한 왜 기도할 때 나 혼자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느냐, 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탄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느냐고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기도할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반드시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 축복받겠다고 기도하는 것은 안됩니다. 배 자체가 잠잠해지고 안전해져야 내가 사는 것이지, 배가 뒤집힌다면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느 노총각이 새벽기도마다 열심히 와서 좋은 배필을 달라고 시끄럽게 기도하는 바람에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불러다가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일러주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노총각이 기도제목을 바꾸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부모님께 훌륭한 맏며느리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더랍니다. 내 아내는 내 부모님의 며느리, 내 남편은 내 부모님의 사위입니다. 따라서 사실 모든 기도는 공동체를 끌어안는 기도가 됩니다. 내가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겠다고 하면 나도 살고 함께 삽니다. 예수께서 뒤편에 주무시면서 우리와 운명을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날이 새서 하루가 시작되면 우리는 여러 격랑과 풍랑을 만날 수 밖에 없는데, 예수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자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은 지 몇 년에 되었든지 간에 이 시간 함께 고백해 봅시다. 오랫동안 믿었더라도 우리끼리 산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짧게 믿었어도 주님께서 주무시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것을 믿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상상하고 다스릴 수 있는 방식을 뛰어 넘어 살아계십니다.

제가 책 한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유럽의 신세대와 정치인의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저자는 유럽의 기독교민주당원으로 교회의 장로이십니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신세대가 “정치가 부패되었는데, 정당 앞에 왜 기독교 'C' 자를 붙입니까. C (기독교) 글자를 빼면 제가 당에 투표하겠습니다”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비판 같습니다. 저자인 가이슬러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알프스 산의 산봉우리 몽블랑은 4800 미터입니다. 지금까지 등산가가 가장 높이 오른 기록은 4000 미터이고 800 미터는 여전히 못 오르고 있습니다. 못 올랐다고 해서 그 산봉우리를 폭파시킬까요? 아니면 그냥 둘까요? 몽블랑은 올라간데 까지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르지 못했지만, 실재하는 높이까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C자대로 기독교 정신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C자마저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그것은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제가 이 솔직한 답변을 읽으면서 이런 정치인들이 있으면 그 나라는 잘 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핸드폰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핸드폰이 가진 기능의 100분의 1도 다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핸드폰 기능을 발전시키는 경쟁이 붙었습니다. 쓰는 기능을 빼고 나머지는 없애버린다면 핸드폰에 대한 기술적 신뢰성을 떨어져버립니다. 안 쓰고 못 쓰는 것은 내 한계이지만, 기술은 훨씬 발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의 속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누구도 속도를 다 활용하지는 못하지만, 자동차 속도는 계속 좋게 만듭니다. 인간이 다 쓸 수 없어도 계속 높게 만드는 이유는 신뢰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음악, 그림도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존재하고 싶은 것,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하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인간 삶 속에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고, 밟을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것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만 가지고 역사를 판단하고 비판하면 우리는 동물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재하느냐 안하느냐만 중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지만, 내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무한대의 가치들이 있습니다. 이 가치들을 준수하는 사람만이 위대한 사람이고 도덕적으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만질 수 있는 것도,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맘대로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무신론은 이 세상 사람들이 믿는 신은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신을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이 좋아서 자기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어 놓고, 우리와 격랑 속에서도 기쁨이나 슬픔, 좌절 속에서도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신은 초월적 신이기는 하지만,  인간되신 하나님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격랑 속에 함께 가시는 인간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단, 잠을 자고 계시므로 깨우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한계에 머물지 말고 뛰어넘는 무한대의 도전, 벤쳐를 해 보라고 하십니다. 기술적, 과학적으로는 도전하면서 왜 정신적, 윤리적으로는 하지 않으십니까.

이사야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왜 깨워야 하느냐면, 바다와 깊고 넓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분의 팔이 여러분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홍해를 건너게 했던 기적의 역사를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 애굽백성이 쫓아올 때 바다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선 “나는 그대들을 나의 이미지대로 창조하여 나의 백성으로 삼았으니,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증거로 예수를 인간의 몸을 입게 하여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께서는 “나를 깨워라, 신을 깨워라, 하늘을 두드려라, 사람이 생각한 것만 가지지 말고, 형상을 닮은 신을 깨워보아라 그러면 나도 인간의 모습으로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일 년 내내 신을 깨우는 삶을 삽시다.

1919년 3‧1운동으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 마음의 격랑이 오죽했겠습니까. 1921년 한 처녀 지도자가 오늘의 마가복음 말씀을 읽고 민족을 아픔을 끌어안고서 ‘캄캄한 밤, 격랑이 일어납니다, 주님 함께 하옵소서. 너무 캄캄합니다. 당신은 왜 주무십니까. 일어나십시오.’라는 내용의 시를 읊었습니다. 24년 후에 이 분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김활란 여사입니다. 기도 후에 이 분이 불렀던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식민지 생활 후에 바다를 건넜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비에서 격랑은 있게 마련입니다. 단, 격랑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면, 그 분은 잠잠하라, 나도 함께 있노라고 분명히 답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하나님이 생각하신 그 때에 답을 주실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능력입니다.

오늘 격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인간의 가장 심각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주무시지만, 얼마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최대의 격랑이 닥쳐옵니다. 바로 십자가라 이름하는 죽음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격랑 속에서 항상 계셨지만, 예수의 격랑 속에서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지만, 인간들은 세례받고 나서도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신뢰성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항상 함께 있는 사람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라고 확신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상대로 창조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임마누엘 하십니다. 좋은 때나 나쁜 때나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격랑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최고의 격랑, 누구에게도 피할 수 없는 격랑은 죽음이라는 격랑입니다. 죽음이라는 격랑 앞에서 누구를 깨우시겠습니까. 제가 장례식에서 느끼는 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같이 죽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같이 죽는다는 말은 불가능합니다. 이 최고의 격랑을 눈앞에 두고 은혜를 받는 말씀은 같이 죽어 줄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는 방식으로 함께 죽습니다. 예수는 “나와 함께 죽으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못 찔려 죽을 수 있는 사람, 몸으로, 영으로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는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증거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죽어주시고 최악의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도 함께 살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과 그 분의 아들 예수가 감사합니다. 그 분 안에서 살아가는 격랑의 인생이 즐겁습니다. 올 한 해 그 분이 함께 살아주시겠답니다. 그 분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높은 가치, 숭고한 가치는 우리가 이론적으로, 직접 그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임마누엘하시겠다는 그 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단순하지만, 깊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나를 격랑 속에서 깨우라, 항상 함께 있겠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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