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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욕망과 사명 (요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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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혼동하기 쉬운 것은 욕망과 사명의 차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해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경제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자신들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정치를 하고 사업을 경영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사명 때문에 정치를 한 것도 아니고 사명 때문에 사업을 한 것도 아니라 오직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 일들을 시작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욕망과 사명의 차이점을 잘 설명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에는 물론 사명의 요소도 있지마는 욕망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저 분이 메시아라면 그 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공과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하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따를 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사명으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언제쯤 자신들의 욕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욕망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판단하고 낙심하고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기까지 했습니다. 제자 중 머리였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에 걸쳐 부인하고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그물을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오순절을 통해서 성령을 받고 난 이후에는 욕망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명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잡혔어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 듣는 것과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 오히려 당당하게 선언했던 베드로를 봅니다. 이것은 바로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교회를 위한다는 말로 자기 욕망을 사명으로 위장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성도는 욕망을 사명으로 위장하는 위선을 벗어야 합니다. 아니면 결코 바른 충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물음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위해 살다가도 어느 순간에 욕망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이승만 박사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승만 박사에 대해 가진 존경심은 거의 종교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1948년 정당도 없이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셨습니다. 미약한 군사력으로 6.25 전쟁을 겪었고 나라가 풍전등화 같을 때마다 그는 이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는 사명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이 나라를 세운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13년 후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세운 조국으로부터 망명길에 올랐고 하와이에서 죽은 후에 시체로 다시 이 땅에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의 자리에서 독재자의 자리로 전락한 지도자였습니다. 이유는 사명이 바로 욕망으로 바꾸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명으로 살았던 사람이 지도자가 된 후 욕망을 위해서 법을 바꾸고 백성을 속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 가운데는 군인 출신들이 많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려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정치의 장에 들어왔다고 선언했습니다. 말 그대로 구국결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임기를 마친 후에 다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유는 국민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뇌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사명을 따라 산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은 욕망을 따라 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 사명이란 이름을 앞세우고 자기 욕망을 위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바로 마지막 순간 기도하기를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에게는 욕망도 있고 사명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욕망을 이루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보면 사명을 감당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 위에서 알렉산더와 예수님은 다같이 33년의 세월을 살았지만 알렉산더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전혀 다른 삶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마다 욕망도 있고 사명도 있습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생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따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욕망과 사명은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1.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욕망이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사명입니다.
욕망이나 사명이나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은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평생을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평생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 성공이란 이름을 자신에게 붙이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한평생 사람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욕망을 채워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황금을 돌처럼 쌓아 놓기도 하고 일 천명의 여인과 더불어 살기도 하고 가장 많은 지식의 분량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사람의 삶에 행복은 욕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실 때에 인생의 목적이 자기의 욕망을 이루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욕망을 이루었을 때에 행복하기보다는 허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욕망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욕망을 이루었을 때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인생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 때 바로 자신에게 속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명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길입니다. 이 사명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때로 사명 때문에 고난도 겪고 아픔도 당하지만 사명을 위한 삶은 결국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명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욕망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고 사명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은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했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세상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따라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사명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든지 않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은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게도니아로 가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니아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명으로 일해야지 욕망으로 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모아야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마음대로 다녀도 마지막은 원치 않는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병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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