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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4) - 이웃을 배려함으로 이루는 기쁨과 감사 (레 1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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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장 37절-39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두 가지 큰 계명을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아끼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지는 당연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님만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구약의 흐르는 모든 내용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로서 우리의 모든 삶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경배를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의 백성들을 우리가 역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처럼 땅의 곡물을 벨 때에는 밭모퉁이까지 베지 않고 그리고 떨어진 이삭은 줍지 않게 말씀하십니다. 포도원의 열매도 끝까지 다 따지 않고 남겨두며 떨어진 열매도 줍지 않습니다. 그렇데 되면 가난한 사람들과 타국인이 와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주워서 먹고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변 이웃들을 아끼고 배려하는데 다른 사람에게서 선심 베푸는 것처럼 생색내지 않고 그들을 깊이 배려하여 아끼고 사랑하고 그들의 마음 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나누는데 그것도 역시 깊은 마음으로 상대의 심정을 헤아려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 진심으로 이웃을 배려할 때 우리에게는 기쁨과 감사가 생기게 되며 그 기쁨과 감사가 결국 우리에게 행복을 심어주니 행복한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또 진실한 헌신을 이루고 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와 같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생각하면서 첫 번째로 우리 삶에 필수적인 어려운 이들을 위한 기본적인 배려의 심정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배려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어떤 사람이 어려운 사람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움 없이는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든지 힘이 있어 자기 혼자 일어설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음을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자기가 부지런 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고 자기가 게으르니까 일어서지 못하지라고 우리는 한마디로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내 혼자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때도 있음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있음을 인정해서 우리는 직접적인 배려의 손길을 내밀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살아가면서 큰 도움 없이도 살 수 있겠다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 제 마음속에 한 가지 계기가 되어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서로 돕고 또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제가 1999년에 안식년을 마치고 12월 말쯤에 돌아오게 될 때의 일입니다. 이제 모든 가방은 다 미리 붙이고 또 아무래도 들어올 때는 짐이 있으니까 한 개라도 더 들기 위해서 양쪽 손에 가방을 다 들었어요. 그 가방이 굉장히 무거운 가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실어서 보내는 것은 무거운 것이면 짐이 오버가 되니까 그 무거운 것을 제가 드는 가방에다 넣었습니다. 뭐냐 하면 100% 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방이 크기가 어느 정도 되지만 전부 책으로 가득 찼으니까 무지하게 무거운 가방이었습니다. 그것을 두 개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제가 자칫해서 걸려서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넘어진 탓인지 도저히 제가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에스컬레이터가 이렇게 펴지지 않습니까? 펴지면서 이렇게 위로 올라가는데 이게 펴지니까 점점 제가 더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점점 더 업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자꾸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안 일어나지고 제가 이 손바닥을 이렇게 긁히고 다쳤는데 도무지 못 일어나겠어요.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나겠더라고요. ‘야, 이거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사고를 당하는 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사람이 뛰어와서 제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워 줬습니다. 그리고 괜찮나요? 물어봤고 그리고 제가 괜찮습니다. 이야기하고 그리고 제가 가방을 추슬러서 다시 일어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나와서 한동안 앉아서 쉬었어요. 그때 제가 든 생각이 뭐냐 하면 ‘아 나 혼자 일어날 수 없는 때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혼자 도저히 그 상황에서 일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오히려 점점 더 쭉쭉 펴지면서 이렇게 크게 넘어지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람이 뛰어와서 저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요. 외국인이지요. 저는 크게 다쳤을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정말 도움을 받아야 일어날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제 마음속에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돌아와서 교역자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잠깐 말씀을 나누는 중에 제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우리의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고 또 도움을 받기도 해야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서로 도우면서 주의 일을 합시다” 하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벌써 7년이나 지난 얘기지만 아직도 제 마음속에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아요. 아마 그렇지 않으면 저는 그날 크게 다쳤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도움이 없이 혼자 일어설 수 없는 상태가 있어요. 나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배려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또는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의 도움을 받고나면 일어설 수 있는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일시적으로 사람의 마음이 한쪽으로 쏠릴 때가 있어요. 사람의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약간의 미세한 경사만 있어도 생각이 쏠리게 됩니다. 그러면 극단적인 생각으로 가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는 말, 위로가 될 수 있는 행동, 위로가 될 수 있는 나눔과 도움, 이 약간의 도움이 결국 사람의 마음에 균형을 다시 찾게 하고 균형 잡힌 사고가 이루어지게 되면 또 다시 그의 삶을 의연하게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도움을 통해 자신의 삶에 새로운 깨달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도 어려운 사람입니다. 즉 조금 도움을 받아 자기의 삶에 새로운 깨달음을 받으면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따지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도움이 필요하고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다 도움을 줄 수 있고 배려를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일들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기본적인 배려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먼저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른 방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배려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기쁨을 제공한다는 마음이며 그것이 바른 방법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말, 보이지 않는 배려, 항상 내가 우위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게 기회가 있어 그에게 이와 같은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도 언젠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서 도움을 주고 내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 아무도 없으며 또 때로는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 도와줄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말만 가지고 살아간다라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만 전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치유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어요. 배가 고픈 사람들이 있으면 민망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자들은 귀신을 쫓아 주셨고 슬픈 자는 위로해 주셨고 슬픔의 근원을 해결해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천국의 복음을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따라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빵과 복음을 같이 전해드려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 한 마리 주면 한 끼 먹여 주는 것이지만 물고기 잡는 법 가르쳐 주면 평생 먹여준다고 우리는 쉽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여기 함정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 한 마리 주지 않고 물고기 잡는 법만 가르쳐 준다면 그 사람은 배고픈 상태에서 정신이 혼몽해서 물고기 잡는 법 배우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분노만 사게 됩니다. ‘너는 배부는 사람이니까 그런 얘기 하지 나는 배고파서 그런 소리 들을 여유가 없어.’ 우리는 배고픈 사람에게 일단 빵이라도 한쪽 주고 생선이라고 한 마리 주어 그 사람이 그것 먹고 정신 차려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 배울 수 있는 자세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가르쳐 주어야 정상적인 은혜를 끝까지 유지하여 그 사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지난주에 우리 청년들 88명과 더불어 우리가 매년 가게 되는 필리핀 기마라스 섬에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빵 한 개가 얼마인가를 생각해보았더니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 내면 빵 25개를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가세요? 그 맛있는 제과점에서 파는 빵인데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 내면 25개 살 수 있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어렵게 사는 것입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줄 수 있는 빵을 주어야지요.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배가 고픈 상태에서 언제든지 그 마음속에 또 다른 반감만을 가질 수 있어요. 참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식사를 하고 나면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있다가 그 부엌에서 서서 음식을 먹어요. 마음에 참 안됐더라고요. 여기 와서 앉아서 먹으라고 해도 그냥 그 부엌에서 서서 마구 먹는 것 같아요. 거기 일하는 사람 또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저희를 지켜주기 위해서 오는 경찰들까지도 그 부엌 있는데 서서 다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단은 배가 고픈 것 같아요. 하루에 세 번 밥 먹는 것이 다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고 또 마음이 흡족해지고 ‘아 우리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구나’ 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진실을 나누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상대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정말 상대의 마음에 같이 내려가 보지 않으면 그 마음을 우리의 입장에서 대강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 가운데 무엇인가 정말 배려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어야만 내 마음에 있는 진실을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도움의 구조를 형성해야합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우리는 늘 선을 베푸는 것이 일상의 생활화되어 선을 베풀어도 마음에 감격이 되지 않을 만큼 우리의 선은 일상적인 것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너무 작은 단편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 참 잘했다 그것을 확대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하는 것도 때로는 보면 감정이라는 작은 뇌관을 움직일 때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극대화하여 칭찬하고 또는 극대화하여 비난하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 작은 평가에 우리는 연연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뚜벅뚜벅 해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일 때 마침내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박수 받는 것 혹은 비난받는 것 그것에 너무 민감하다보면 우리는 결국 가야할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감정에 지나치게 좌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기본적인 배려는 어떻게 실행됩니까? 넉넉한 마음에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계산하면 절대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도와주고 대가나 보은을 바라면 언제나 우리는 스스로 상처를 받아요. 왜냐하면 언제나 남에게 준 것은 커 보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받는 것은 언제나 작아 보입니다. 내 행동은 언제나 옳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내게 그것이 옳다고 생각되니까 우리는 그 일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한 행동은 내가 생각하면 나에게 옳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은 커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대가를 바라거나 보은을 바라면 내 스스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의 상처를 주지 않는 우아하고 사려 깊은 배려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밭모퉁이까지 베지 말고 남겨두라고 합니다. 이삭 떨어지면 줍지 않는 것입니다. 몰라서 줍지 않고 베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에 포도 다 따지 않고 줍지 않습니다. 몰라서 줍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러 슬쩍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고아 과부 객 외국사람 가난한 사람이 와서 그것을 주워서 가지고 먹고 살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 가운데 때로는 모르는 척 하면서 일부러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배려하여 상대방에게 이와 같이 나눠주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마음에 바로 이런 심정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 유족한 생태에 있다 보니까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주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것, 마음에 그늘 주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가지요. 그런데 보아스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하인들에게 뭐라고 하죠? 룻이 이삭을 주우러 올 테니까 넉넉하게 뿌려놓아라. 그저 내가 너한테 이것을 준다하고 생색내면서 주는 것이 아니라 몰래 이삭을 뿌려놓았습니다. 그러면 룻은 보아스의 밭에 와서 우와 여기 이삭이 많이 떨어져 있네. 하고 이삭을 줍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가운데서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 싹트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둘 사이에서 결혼하여서 오벳을 낳고 그 오벳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룻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아래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상대를 배러할 때 상대의 마음에 상처받지 않게 깊은 마음을 가지고 깊은 사려함 가지고 배려해주는 것이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다른 이를 도와주는 배려와 겸손입니다.
왜 다른 이들을 배려할 때 겸손하게 배려해야 하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배려할 때 기쁨과 감사가 있고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행복으로 다가오는데 왜 배려할 때 겸손해야 하는가? 겸손은 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내가 겸손하게 내 모든 것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내가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도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나누어 줄 뿐이다 하는 겸손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겸손은 내 생각과 행위를 빛내주며 다른 이들의 심령을 소생케 합니다. 겸손은 내 위치를 낮게 하니까 결국 하나님의 축복이 나에게 오게 합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하나님의 축복은 겸손한 자에게 흐르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을 배려하면서도 이러한 겸손을 이룰 수 있을까요? 내가 수고한 것과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한 것들을 정확히 계측해보면 됩니다. 내가 씨 뿌리고 내가 물주고 내가 풀을 뽑고 내가 추수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빛 주시고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 주시지 않았다면 과연 그 곡식이 익을 수 있었는지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국 내가 한 것 조금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큰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늘 우리는 봉헌기도 드릴 때 이런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우리가 수고하고 애썼지만 우리의 땀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믿을 수 있는 믿음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내게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은 귀한 열매를 드릴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와 같은 겸비한 마음 이것이 우리들에게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내 잘못과 부족함을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것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여기 우리 이렇게 번지르하게 정말 이렇게 얼굴 들고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드러낸다고 생각해보세요. 서로 얼굴 대하는 것이 싫을 것입니다. 혐오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다 덮어주시고 씻어주시고 말갛게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볼 때 아름다운 성도요 하나님 앞에 귀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 된 모습을 다 드러낸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 추악한 사람들뿐입니다. 서로를 볼 때 혐오스럽고 보기 싫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마음을 제해주시고 씻어주시고 우리를 아름답게 해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용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내가 하나님께 이러한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내 것을 움킬 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면 내가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촛대를 옮기시면 내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봅니다. 결국 겸손이란 사람 앞에 이전에 하나님 앞에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 앞에 이루어짐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에게 행함으로 말미임아 사람 앞에 입증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증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입술에 모습으로가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이 실증되어져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면서 가지는 진정한 겸손의 유익을 무엇입니까? 내 마음이 기뻐요. 겸손해 질수록 내 마음이 기쁩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교만하면 다 불만족스럽고 하찮아 보이고 결국 내 자신이 구차해 보입니다. 하찮은 사람하고 사는데 내 마음이 편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존귀한 사람하고 살아야 내 마음이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마음의 지경이 넓어지게 되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내 스스로가 상처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대신에 기쁨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축복의 자리에 이르고 사람을 기쁘게 하니 내가 유익과 축복을 받기 전에 이미 그것 자체가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죠.

세 번째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배려의 과정 위에 꼭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배려하게 되면 우리 마음이 기쁘고 감사해서 행복해 지게 되는데 우리가 무엇을 배려해야 합니까? 항상 뒤로 미루지 말고 현재 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뒤로 미루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뒤로 미루지 않고 어려운 상태에서나마 내가 줄 수 있는 것 나눌 수 있는 것을 주고 나눌 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이 교회를 생각하면 그래요.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기도 중에 할 수 없는 일도 사정을 만들어서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교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욕심이나 과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많이 날수록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힘들어 힘에 진하도록 우리 마음에 부담이 생기더라고 주를 위해서 그 일을 하다보면 우리의 수준이 다 높아지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내게 여건이 되니 형편이 되니, 사정이 되니, 내 마음이 되니, 어떤 일을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저급한 수준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꾹 덮고 사정을 만들고 내 마음속에 무리해서 그 일을 진행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을 봅니다.

우리는 뒤로 미루다 보면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 삶의 상황이 달라집니다. 마음도 달라집니다. 생명이 다해서 그 일을 이룰 수 있을 때도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현직에 있을 때 열심히 하십시오. 그리고 충성하십시오. 그리고 능력이 있을 때 충성하고 헌신하십시오. 그리고 손 발 움직일 수 있을 때 헌신하고 충성하십시오. 그리고 남을 도우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일을 하자고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시간될 때 내가 일 그만둘 때, 나에게 여력이 있을 때, 힘 될 때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여건을 가지고 그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화요일에 비행장에 나가면서 한 시간 십오 분이면 가는 거리를 두 시간이나 넘게 걸렸습니다. 눈이 와서 비행기에 쌓인 눈도 치우고 활주로의 눈도 치우기 때문에 한 시간 연착을 했습니다. 사람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내 주변상황이 움직여 줘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내가 현재 내게 주어진 여건 가운데서 우리는 나눔과 배려와 사랑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청년들하고 선교가면서 참 재미있는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청년들이 참 열심히 연습하고 수고하고 훈련했는데 하다보면 또 잘못하는 것 있잖아요. 그러면 또 야단도 맞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야단맞으면, 어른 같으면 책가방 싸들고 도망갈 것 같아요. '나 이제 못해.' 그러고 비행기 타고 갈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안 그래요. 보니까, 죄송합니다. 그러고 씩씩하게 아주 잘 해요. 제가 마음에 드는 생각이 어른이 됐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존심 내세우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 잘못 지적받았을 때, 절대 인정하지 않아요. 도대체 어른이 된다는 것이 퇴행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성숙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제가 이런 것을 보고 또 은혜를 받았는데요. 이것이 뭐냐 하면 다리 다친 학생이 두 명이 왔습니다. 한 학생은 공연 연습하다가 다쳤는데 목발을 집고 왔더라고요. 여학생인데요. 그래서 가기 전에 만나서 이번에 쉬는 것이 낫지 어떻게 갈 수 있겠니? 했더니 가겠다고 합니다. 가서 그 자리에 있는 것만 해도 선교라고 생각하니까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서 보니까 오히려 그 자리에 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또 소망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자신의 일을 담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힘이 되는 것이니까요.

또 한 학생은 남학생인데 역시 다리는 다쳤나봐요. 첫날 저녁에 집회를 하면서 우리 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체력이 영력입니다.’ 여러분 체력이 영력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선교에 나갔을 때에는 체력이 영력입니다. 왜냐하면 가서 아파서 몸져누우면 아무 일도 못하잖아요. 여기서 몇 달 연습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워버리면 뭐해요? 아무것도 아니죠. 그래서 체력이 영력이라고 학생들에게 말씀드리고 몸이 안 좋거나 한 사람들 나오라고 했더니 20명 정도 나왔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안수기도 해줬는데, 다행히 그 다음날 아픈 사람 없이 다 나가서 열심히 일주일 내내 있다 왔습니다. 이번에는 아파서 누워있다 온 사람 없어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안수해서 기도해주는데 이 학생 중 한 사람이 다리 쫙 펴서 널브러져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다 무릎을 꿇고 안수기도 받으라고 했습니다. 청년들 중에 그런 아이들이 있잖아요. ‘아 어떻게 할 테니 알아서 하세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청년인줄 알고 ‘또 강적을 만났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목사님 기도해 줄 테니까 무릎을 꿇어라 하고 부드럽게 얘기했더니 ‘제가 다리가 아파서 무릎을 못 꿇습니다.’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야, 내가 남을 외모로 판단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제가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학생하고 식사하다보니까 제 앞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목사님 제가 여기에 오기 전에 다리를 다쳤는데 그래서 제가 이번이 생각을 했습니다. 이 다리를 다쳤는데 오지 말까? 아니면 내년에 올까를 생각했는데 내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이 다쳐서 더 아플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올해 오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왔어요.” 그러는 것입니다. 저는 하산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르칠 것이 없더라고요. 다리 다쳤는데 올해 가지 말고 내년에 올까를 생각했더니 내년에는 이것보다 더 아프면 어떠하나 생각하니까 그저 이 상태라도 올 수 있으면 오는 것이 낫겠다 생각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예쁘잖아요. 남자 청년이었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 기회 있을 때, 할 수 있을 때, 우리들에게 내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줄 수 있는 것 주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는 것 나누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더 베풀 수 있는 것 베푸는 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말 내년에는 화해 못하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 다 화해하세요. 내년에는 헌신 못하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올해 다 헌신하세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다 잃어버릴 때 있어요. 그러니까 잃어버리기 전에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헌신하세요. 우리의 삶 가운데 미루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는 것이 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에 자존심이요, 자존심이 뭐죠? 왜곡된 자아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각하면 자존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라하면 하고 잘못했다고 하면 예, 죄송합니다 하고 고치면 되는 것이고, 잘했다고 하면 감사합니다. 하나님 더 큰 은혜를 주십시오 하면 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아닙니까? 우리 할 수 있을 때 합시다. 기회 있을 때 합시다. 부족하고 어렵다고 생갈 할 때 합시다.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그 상태에서 베려하고 우리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내 삶의 기쁨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원칙과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삶, 쌓아 두기 위한 삶, 내 만족의 보장을 위한 삶을 위해서 달려가기만 한다면 우리 삶은 무한 경쟁 속에서 지치고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실수 없고 실패 없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의 실수와 실패가 이전의 모든 것을 다 저 계곡을 몰라 넣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보세요. 요새 입시철 지났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원하는 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것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어려움 없이 다 해결이 되던가요?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정말 어렵게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으로 어려움 없이 모든 것이 다 형통하게 풀려지던가요? 열심히 원해서 정말 어렵게 수고해서 원하는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어려움이 없던가요?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들이 있습니다. 건강, 자녀, 가족관계, 그리고 인간관계, 또 애정의 문제, 능력, 시기와 질투, 분노, 치유 받지 못한 상처와 각종제약의 성분들, 이런 것이 빙빙 우리 주변에 돌다가 어느 날 화살같이 우리들에게 꽂히는 순간 우리는 그 다음부터 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어느 한 가지만 잘못 되도 우리는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 가운데 어떤 한부분만 상해도 우리 괴롭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고 우리의 마음이 진행된다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기쁨은 결국 나 하나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들을 위해서 산다고 결정하면 이제는 내 짐이 아니고 주님의 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볍고 쉬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지고 우리는 쉽게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은혜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원칙이 달라지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행동이 달라집니다. 내가 내 삶의 원칙을 무엇으로 정하는가? 나 하나 살기위해서 정하는가? 아니면 나의 삶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 베풂으로 사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상태에서 계산하지 말고 그래서 낙심하지 말고 결산의 때를 기대하며 우리의 가는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너그럽고 느긋한 사람, 종종거리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가? 늘 내 눈앞에 있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결산하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처럼 낙심하는 사람과 지금 결산의 때가 아니라 과정이니까 이러한 어려움을 통해서 기쁨의 자리에 이르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결산의 때를 기대하며 달려가는 사람은 느긋하고 여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뢰하면 발전이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면 우리 마음에 달라지는 것이 있는데, 마음에 선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원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악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선해집니다. 아주 사람이 선해집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봅시다. 당신 선한 사람이에요? 한번 물어봅시다. 자 다시 한 번, 시작. ‘당신 선한 사람이에요?’ 아니 그러면 이렇게 물어봅시다.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세요? 악한 사람이 있잖아요. ‘너 내손에 한번 걸려봐’ 이러한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악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마음에 선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 받으면 선해집니다. 은혜 받으면 신뢰도 하게 되고 은혜 받으면 나눔과 베풂도 있게 되고 은혜 받으면 삐지지도 않아요. 제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은혜 받으면 삐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다보면 정말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마음에 선한 심정이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야, 잘못된 것도 가르칠 필요가 없나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르치면 삐지고 그것으로 시험 들고, 그러니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가다가 스스로 어려워서 깨달을 때까지 놔두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 어찌 생각하면 사람이 나이 들고 어른이 되면서 점점 성숙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퇴행되는 것 같아요. 왜 우리 어렸을 적에는 가르쳐주면 예, 감사합니다. 제가 잘 배우겠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가르치면 배우겠다는 생각을 안 하고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자기 방어만 하고 끝내는지. 그렇게 생각하면 참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지긋지긋해지는 것 같아요.

정말 늘 말씀드리잖아요. 사람 지긋지긋하게 안 변하는 것 같아요. 예수 그리스도 없으면 우리는 소망이 없어요. 주님만이 우리 사람을 바꾸시는 것을 봅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사람의 이마에 화석같이 굳어졌다고 그래요. 하나님 말씀이 튀어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와 같은 모두를 바꾸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러죠. 사람을 볼 때 현재를 보지 말고 저 사람이 바뀌어서 어떻게 될지를 기대하고 보는 거죠. 현재를 보면 늘 실망하잖아요. 현재를 보면 늘 낙망하잖아요. 그러나 저 사람이 바뀌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 꿈이라면 우리는 너무 빈천해요. 내 것 다 주고 나누어 주고 더 줄 것이 있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어제 우리 청년들이 돌아와서 저녁에 식사하고 해단식 하면서 그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선교 다녀오셨는데 내일부터 이번 주 시작하는 월요일부터 여러분 공부 아주 열심히 하십시오. 그리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을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일에 성공하시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출하시고 더 많은 것을 소출해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열심히 애써야 합니다. 많은 소출을 거둬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줄 것 있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창고를 채우고 이제는 내 것 챙기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창고 채우고 이제는 내 것 챙기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수고와 노력과 애씀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 마음이 열려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배려하고 베풀고 나누고 또 그것이 내 마음속에 기분 내는 휘두름이 아니라 겸손한 배려가 되어서 정말 밭모퉁이까지 베지 않고 이삭을 뿌려놓고 뿐만 아니라 포도원 포도를 다 따지 않고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룰 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논리가 있어야 현상이 있겠지만 요즘은 논리가 상황을 주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현란한 논리와 주장의 가무 속에 진실이 한구석으로 밀려나 삐죽이 빗나가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요즘 말이 너무 현란해요. 주장이 너무 현란하고 논리가 너무 현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적인 실천이 별로 없어요, 왜 저희가 우리는 선언적 교회가 되지 말고 실천적인 교회가 되자라는 말을 굳이 합니까? 우리는 실천이 희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살자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정말 이런 저런 말하지 마시고 우리의 삶 속에 밭모퉁이 베지 않고 그저 떨어진 이삭 줍지 않고 그저 포도원의 포도 다 따지 않고 떨어진 포도 줍지 않는 상대를 애틋하게 생각하여 배려하는 이와 같은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고 나누고 베풀고 같이 배려하는 이와 같은 심정이 있는 우리 성도님들 되셔야 합니다. 그 때 우리 마음에는 진실한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성도로서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역시 받는 사람보다는 주는 사람이 더 기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로부터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우리 삶의 사명을 다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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