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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둑도 작은 구멍에 의해 무너집니다. (대하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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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는 많은 왕조들이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의 왕조는 200~300여 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국가나 왕조도 살아있는 생명과 같이 유기체이기 때문에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체도 만찬가지입니다. 만약 발전기가 길다면 그 왕조의 국력은 한없이 뻗어 나가지만 발전기가 끝나면 정체기 또는 쇠퇴기라는 시련이 찾아오는데,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왕국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남쪽 유다 나라는 바벨론에게 망하기까지 345년 간 왕조가 존속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조선이나 고구려백제신라고려 왕실이 모두 500~800여 년 존속했으니까 우리 왕조보다 훨씬 수명이 짧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유다 나라의 10대 왕 웃시야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남쪽 유다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발전을 한 전성기입니다. 통일 왕국 때와 같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을 정점으로 하여 점점 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앗수르와 바벨론의 외세에 의해 소멸기를 맞이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평가가 1-5절까지 크게 두 단락으로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 웃시야에 왕에 대한 평가는 1-2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유다 온 백성의 지지를 받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왕에 대하여 역대기 기자는 이런 표현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유독 웃시야 왕에게만 이런 표현으로 기록했습니다. 아버지가 예루살렘 무리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무리는 제사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마샤 왕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이들의 세력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계속적으로 정치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은 모든 세력의 지지를 받고 16살에 왕이 된 것입니다. 왕이 되자 마자 무엇을 하였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엘롯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역대기 기자가 이것을 기록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특이한 건축이기 때문입니다. 엘롯은 유다 해상활동의 근거지입니다. 아람에게 빼앗겼는데 다시 찾아 해상 활동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평가는 웃시야 왕이 온 백성의 지지를 받고 왕이 되어 해상활동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평가입니다. 정치 경제적인 평가입니다.

둘째 평가를 보십시오. 3-5절까지 나옵니다.
16세에 왕이 되어 52년을 통치하였는데 그 어머니가 여골리아이고 예루살렘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웃시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어머니 여골리아는 “여호와께서 지배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신앙적 전통을 가진 가정인 출신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합니다. 정직성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신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말입닏. 5절을 보십시오.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 동안 통치를 하는데 하나님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통치철학을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구할 동안은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평가에는 부정적인 요인이 들어 있습니다. 스가랴의 사는 날에,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 못했을 때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평가가 정치 경제적인 평가라면 두 번째 평가는 신앙적인 평가입니다.
만약 우리에 대하여 누군가가 우린 인생을 기록한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기이한 도우심으로 강성해지는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겠습니다(6-15).

당시 국제 정세는 그렇게 웃시야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마샤는 북쪽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렸지만 패전하고 자신은 동족의 혁명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자신의 적대 세력이 국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패전으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국력을 키워 근동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죽었습니다. 북방의 강국이었던 다메섹이 신흥 국가 앗수르에게 밀리고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아라랏의 공격으로 방어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성경 기자는 이것을 기이한 도움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웃시야가 강해진 것이 기이한 도우심으로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도우사 외적을 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하는 동안에는 하나님 형통케 하셨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직장에 들어갈 때 환경이 어떠했든, 우리가 태어날 때 환경이 아주 불리했던, 우리라 학교에 들어갈 때 환경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관없이 우리 하나님이 기이한 도우심으로 우리를 도우시면 강성해지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기업이 살아나고 가정이 일어나고 실력이 향상되고 사람들이 따르고 지경이 넓혀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호와께 구하며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웃시야는 왕이 되자 무엇을 하였습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영토 확장입니다(6-9). 통일 왕국 시대의 국경까지 회복하였습니다. 정복 사업 우선적 목표는 유다를 끊임없이 괴롭힌 블레셋을 쳐 완전히 정복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뿐 아니라 아라비아 마온 사람들의 지역까지 정복하였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성해졌습니까?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열린 교회가 심히 강성하여 열방의 여러 나라까지 펴져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님의 기업이, 우리 성도님의 가정이 심히 강성하여 넓은 공간과 긴 시간으로 확장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우리에게 주신 영역이 강성하게 퍼져 나가야 합니다.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영적 영역을 넓혀가야 합니다. 사단의 지배로부터 점점 벗어나야 합니다. 경제의 영역, 지식의 영역, 건강의 영역, 삶의 영역을 넓혀야 합니다.

둘째는 산업 발전입니다(10). 거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팠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망대를 세웠습니다. 적들이 쳐들어 온다고 좌절하고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새마을 운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웅덩이를 많이 팠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비가 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환경이 나쁘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평야와 평지에 목축업을 융성하게 일으켰습니다.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릴 자를 두어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왕 자신이 권위와 체면을 내세우지 않고 농사짓기를 좋아했습니다. 중농정책을 쓴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며 접촉, 선택, 집중, 반복을 잘하여 국민 경제를 윤택하게 만든 것입니다. 백성을 잘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도 나에게 주어진 것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주어지면 마지 못해 하지 말고 좋아해야 합니다. 지능 좋은 사람보다 노력하는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무엇을 맡겨 놓아도 잘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국방 군사 정책을 잘 수행한 것입니다.(11-15)
왕에게 군사가 없다면 왕으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사가 있다고 해도 조직된 군사가 아니면 전쟁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조직을 만듭니다. 웃시야 왕은 군대 삼십만 칠천 오백 명을 정예군으로 만들기 위해 이천 6백명의 장교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총 사령관 하나냐를 세웁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대적을 치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부하 직원으로 두고 있는 상사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도 바로 이러한 영적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불신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 전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웃시야는 군대장관을 세우고, 그 군대장관 밑에 족장들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족장들에게 일정한 수의 군대를 맡겨놓았습니다. 웃시야는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총사령관입니다. 웃시야는 조직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웃시야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전쟁을 대비하여 전략 문자를 준비합니다.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돌을 준비하고. 웃시야는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그것들을 준비했습니다. 방패와 창, 투구, 갑옷, 활, 물매돌 등을 자신만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고 온 군대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웃시야가 그 군대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최강의 군대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웃시야는 고민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작전 지시도 중요하지만 전략 물자가 있어야 합니다. 나 하나 간신히 지탱하는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혁신적으로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또 예루살렘에서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하였다고 했습니다. 신형 무기 투석기를 제작합니다. 앞선 기술이 결국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 졌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더욱 강성해져야 합니다.

2. 우리는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는 작은 구멍을 막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16-23).

웃시야는 거대한 둑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둑은 작은 구멍으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40여년 동안 이루어 놓은 그 거대한 둑을 무너뜨린 것이 무엇입니까? 피땀 흘려 쌓아 놓은 명성과 부귀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그 마음이 교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왜 교만해졌습니까? “저가 강하여 지매”입니다. 하나님이 기이한 방법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그의 명성을 열방에 퍼지게 하여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되니까 마음이 교만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이미 겪었던 일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망한 이유입니다. 대하25장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에돔 사람을 쳤다 하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대하 25:19)”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의 입을 빌려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강함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려면 일이 잘 될 때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둘째가 악을 해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교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악한 행동입니다. 그 악한 행동은 결국 여호와께 범죄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임무와는 정반대 되는 행동을 하고,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악한 행동,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 것입니다. 이 때 제사장 아사랴가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제사장은 왕을 “웃시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왕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성소에 왕이 들어 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접근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고 해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을 자꾸 하려고 하면 회사 상사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일지라도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인격의 차이나 가치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직능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내 위치를 망각하고 저지르는 죄가 우리의 쌓아 놓은 든든한 둑에 구멍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작은 것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둑 자체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셋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할 때 웃시야 왕은 어떻게 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길이고 파멸의 길인데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마샤도 이방신을 섬길 때 선지가가 경고할 때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인생을 비극으로 마쳤습니다. 할아버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아스가 하나님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를 섬겼을 때 제사장 스가랴가 경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할아버지는 죽였고 그것으로 인생을 견고한 둑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아들 역시 동일합니다. 제사장이 제지하자 분향을 하려고 하다가 제사장에게 노를 발합니다.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였습니다.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다 문둥병이 걸린 미리암처럼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 놓은 자리에거 쫓겨났습니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습니다. 별궁에 홀로 거하였습니다. 열조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열조의 곁에 장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훌륭했던 웃시야 왕이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요?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원한을 보게 됩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내려오는 갈등과 대립, 죽음의 구조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복음으로 화해와 용서 부활의 구조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왕 때까지는 북쪽 이스라엘과 투쟁기간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이 나누어지고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하여 박정희 정권까지는 남북이 극한 대립을 하며 투쟁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부터 시작하여 아달랴 왕 때까지는 이스라엘과의 동맹시대(B.C873-835)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북한과 동맹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략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략 결혼으로 인하여 유다는 큰 손실을 보았습니다. 6대왕 아하시야가 북쪽의 혁명으로 예후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북쪽 이스라엘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두 파로 크게 나누어져 버렸습니다. 북쪽의 바알 신을 숭배하는 관료들과 남쪽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들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진보와 보수와의 갈등입니다. 친북파와 친미파의 갈등입니다.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8대 왕 요아스를 보십시오. 할머니 아달랴가 친 바알파 사람들과 손을 잡고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친 하나님 파인 제사장 여호야다가 혁명을 일으켜 아달랴를 죽이고 요아스 왕을 7살에 왕위에 올렸습니다. 제사장의 권력이 가장 절정기에 이른 때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를 아버지처럼 섬기며 따랐을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7살 아이가 무슨 정치를 하겠습니까? 실제적으로 제사장이 섭정을 한 것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왕처럼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죽은 후 어디에 장사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왕실의 묘실에 장사가 되었습니다(대하24:16). 왕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어쩌면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반작용으로 이스라엘과 화합하는 세력 아세라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자 아세라 신을 섬겼고 그것에 반대하는 스가랴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사건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사장 세력의 혁명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대하24:25). 웃시야의 할아버지 때의 일입니다.

웃시야의 아버지 아마샤 때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마샤가 25살에 왕이 되자 첫 번째 한 것은 무엇입니까? 25살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정치를 할 수 있는 나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정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대하25:3). 제사장의 세력들입니다. 아마샤가 에돔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바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대하 25장 14절을 보십시오. 바로 이방신을 분향합니다. 아버지를 죽인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단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하25:2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또다시 혁명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대하25:27). 여기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제사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웃시야가 10대 왕으로 온 백성의 지지를 받으며 왕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 이루어졌던 갈등과 대립, 죽음의 구조를 바꾸지 못합니다. 온 백성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고 나라가 강해지니까 제사장과 대립을 합니다. 제사장들도 그의 교만을 기회만 노리고 지켜 보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17절에 보니까 아사랴가 훈련된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것을 봅니다. 왕의 호위병들이 있었을 텐데 밖에서는 이미 진압이 된 것같습니다. 제사장의 세력과 정면 대결을 하였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을 갈등과 대립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 구조를 판박이 하듯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갈등과 대립 죽음의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랑과 화해를 예수님은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둑을 무너뜨리는 어떤 구멍도 다 제거시킬 수 있습니다. 대대손손이 내려오는 어떤 악습도 주님 앞에 나오면 다 제거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 깊숙이 파묻혀 있으며 때가 되면 뛰어 나와 나를 넘어뜨리려 하는 그 어떤 죄악도 우리 주님 앞에 나오면 다 용서되고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화해가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모든 응어리는 봄눈 녹듯 녹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으니 보혈의 피로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는 죄악의 작은 구멍들을 제거시키고 우리는 기이한 도우심으로 강성해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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