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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래를 보는 신앙인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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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들 삼 형제와 함께 행복하게 살던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직업은 선장이었는데 어느 날 바다에서 폭풍우에 배가 파선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큰아들도 남편의 뒤를 이어 배를 탔다가 목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도 한사코 말리는 어머니 몰래 선원이 되었다가 그도 역시 얼마 후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어린 막내아들조차 장래 선원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이미 바다에 잃어버린 어머니로서는 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무가내인 아들을 어쩔 수가 없어서 날마다 고민하던 어머니가 도대체 온 가족이 바다에 미친 까닭을 몰라 이웃에 사는 목사님께 상담을 하게 됩니다. 한참 집안을 살펴보던 목사님은 방에 걸려 있는 그림과 사진을 당장 떼어내고 대신 다른 것을 걸도록 권하였습니다. 가슴을 설레게 만들 정도로 시원한 바다 그림과 선장 차림의 멋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아들들의 마음을 언제나 바다로 향하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다로 뛰쳐나갔고 그렇게 모두가 똑같은 최후를 맞이하는 불행을 자초했던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바다 그림 대신 산과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막내아들이 장성한 후에 선원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대신 농부가 되어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인간의 미래란 참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밑그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인생 미래의 그림은 어떤 그림입니까?

미래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만 그 미래를 위한 현재는 더 더욱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현재를 과거에 매여 사느냐, 미래를 바라보며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사를 과거에 묶어 놓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 때문에 도대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흘러 가버린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가끔 과거에 너무 집착하여 현실에 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과거가 화려했다는 것으로 미래도 당연히 화려할 수 는 없는 것이며, 과거가 아름답지 못했다고 해서 미래도 아름답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계의 삼대 참회록하면[어거스틴의 참회록],[루소의 참회록],[톨스톨이의 참회록]을 꼽습니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지난날의 어리석었던 생활을 돌이켜보면서 아파하고 새 인생으로 거듭난 생활을 노래한 작품들입니다. 즉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현실의 발판으로 삼아 미래를 향한 밑거름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17일자 국민일보를 보니까 우리나라에 현재 사형을 앞둔 사형수가 63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범행할 당시 90%나 되는 57명이 종교를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수감생활 중에 과거를 뉘우치고 종교를 가진 사람이 55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현재63명 중 97%인 61명이 종교를 가졌는데 이 중에 개신교인이 50%가 넘는 32명입니다. 이들 중에 대부분이 범행당시에 결손가정이거나 가난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미래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어차피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괴감 속에 살다가 그것이 범행동기가 되어서 사형수라는 처지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내다 볼 미래가 있고 그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현실의 불행도 미래의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다고 느낍니까? 행복하다면 어느 정도로 행복하며 불행하다면 또 얼마나 불행 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나면서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무려 오늘까지 40년 동안 이렇게 살아 왔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인데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고 있습니다. 이 책임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적어도 스스로는 아무런 잘못도, 책임도 없으면서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가지는 욕망이나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잘 살고 출세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누군가가 던져주는 동전 몇 닢, 오직 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가끔씩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 낙담하기를 수 없이 했을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말했습니다.“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갈 수 있다.”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문제입니다. 자기에게는 고통이라고 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요,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순간순간 당하는 멸시가 전부입니다. 과연 살아야 할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현실을 이길 수 있는 추억할 과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러고 있으니 추억할 과거인들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고 이 처지에서 미래에 대한 보장이나 바람 따위는 기대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는 철저하게 불행하고, 철저하게 무가치한 사람, 그러면서도 스스로 죽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가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한 마디로 인정머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감정을 가진 동물인 사람들에게만 있는<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동정심이 생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꿈틀거리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거늘 지금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이 어려운 사람을 보고‘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이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이 이 불행한 사람을 놓고 다만 추상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삼는 세상에 몰인정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이 문제로 시비를 벌이다가 겨우 한다는 소리 보세요.“이 사람이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가보다”이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이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나의 불행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그러나 너무나 익숙한 욕이기 때문에 무감각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칭찬도 흉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누가 동전만 던져줬으면 좋을 따름입니다.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현실의 깊은 우물 속으로 빠트렸습니까? 오늘 이 사람 앞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누구 한 사람이라도“누구 죄 때문에 이 사람의 고통이 왔느냐?”를 따지기 전에 먼저“예수님!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아니면“이 불쌍한 사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습니까?”이렇게 좋은 말은 한 마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엉뚱한 시비만 벌이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깔뱅(John calvin)]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남의 고난을 보면서 세 가지의 실수를 저지른다고 합니다.
첫 번째 실수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까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게 문제가 있습니다. 남이 불행을 당하면 죄 값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문제에 대해서는 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고생하는 것은 진리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고, 남이 고생 할 때는 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 번째 실수는 남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해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해 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 버립니다.‘저 사람이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까? 오죽하면 저랬을까?’하는 그 깊은 고통을 이해해줄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냉정하게“고난 받아도 싸지, 되게 혼나 봐야 정신 차리지”하며 냉정하게 심판해 버리는 실수를 합니다.

세 번째 결정적인 실수는 모든 고난으로부터 자기를 예외 시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절대로 어려움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저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는 쉽게 정죄 하고 자기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처럼 생각하는 바보 같은 실수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또한 우리들의 연약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내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가지고 철학적으로 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학적으로 풀 문제로도 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볼 때에 인간적인 눈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지나친 인간의 감정의 문제로 치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남의 고난을 예수님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오늘 이 사람은 불행이 아닙니다. 고통은 있겠습니다만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치 있는 고통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함부로 누굴 판단하고 욕하지 말아야합니다. 남의 고통을 조롱거리로 삼지 말 것이며, 나의 것이든 남의 일이든 현실에 매여서 미래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이 범한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이냐 하면 소경을 보면서 과거만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그의 과거가 무엇이냐? 조상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부모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자식이 기가 막힌 보응을 받나?”하는 것을 논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예수님을 보면 이들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들추어 낼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를 통하여 이루시고자하는 일, 즉 미래적인 안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힘든 사람들, 건강의 문제로 아파하는 사람들, 특히 신앙의 실패로 인하여 마음과는 달리 힘겨워하는 사람들...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커녕 그의 과거를 자꾸 들추어내어 될 수 있으면 널리 알리려고 하는 요상한 심리가 있으니 이게 문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과거에 매여 현실을 바라보는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을 앞에 놓고 교훈을 주시면서 하는 말씀을 보면“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고 하시며 곧바로“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마치<숙명>과도 같은 책임감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남의 고난을 보고 얘기 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 자기는 예외인양 죄 운운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현실을 보고 몹쓸 사람, 망할 사람, 당해도 싼 사람이라 하지 마십시오. 그 실패가 언제 나에게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곧 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잘못도 아니요, 부모의 잘못도 아니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픔을 겪는 사람 앞에 거지 취급하며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했던 오늘 군중들과 같이 되지 말고 그 사람 안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고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에는 고난도 따를 것입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아픔이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을 기회로 만드실 것입니다. <미래를 보는 신앙인>은 위기를 바로 창조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요, 실패를 새로운 기회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 하나하나가 필요한 일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고통 가운데 서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고 있습니까? 현실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봄으로 신앙적인 사람의 본분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주위를 둘러봅시다. 신앙적 고난 속에 아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주저앉아 일어설 줄 모른다고 그 사람을 정죄 할 것입니까? 원치 않는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을 얘깃거리로 삼겠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보고, 기도해줄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신앙인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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