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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 속의 신앙적 신비 (삼상 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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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참으로 사랑했던 첫 사랑의 여인이 죽어버립니다. 날마다 그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 아픔은 좀처럼 가시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사랑한 그녀였기에 어떤 것으로도 그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정치를 해 봐야겠다고 정계에 투신합니다.

그리고는 정말 열심히 뛰어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더럽고 추한 정치 게임에 말려들어 누명을 쓰게 되고 결국 자기 고향에서 추방을 당하여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거지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도 정치도 모두 실패하고 더 이상 삶의 의미조차도 찾을 수 없는 고독한 방랑길에 들어선 그는 하루하루의 무의미한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하늘을 보고 누워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꿈은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이 자기를 영원한 세계로 안내하는 꿈이었습니다. 날마다 그녀를 만나는 꿈의 소망이 그로 하여금 붓을 들어 작품을 쓰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장편의 서사시가 그 유명한 단테의<신곡>이라는 작품입니다.

이토록 삶의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꿈이 사라졌을 때 사라진 꿈의 잿더미 위에 주저앉아 낙심하거나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사라진 하나의 꿈으로 인하여 그 보다 더 많고 더 큰 그 꿈들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꿈이 무너졌다고 내일의 꿈을 포기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위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대로 풀이해 보자면<위험한 기회, 위험한 고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웹스터 사전에서는<터닝 포인트(전환점)>라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면“위기란 위험한 고비임과 동시에 새로운 꿈을 향한 기회이다.”라고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새 기회로의 전환점이 되는 이것이 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위기를 보는 눈입니다.

[래리 엘 맥스웨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위기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첫째는 신체적 위기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병이 찾아와서 나를 아프게 하거나 갑작스런 죽음에 직면하는 경우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육체적인 위기입니다.
그 다음에 자아의 위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존재 의식의 상실입니다. 내가 뭐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정신적으로 허탈해지면서 자꾸만 절망으로 치닫는 위기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관계의 위기가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자꾸 나를 떠나가는 경우나 내가 자꾸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소위 말하는 대인 관계가 단절되면서 오는 고독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환경적 위기입니다. 요새 우리가 아는 대로 공해라든가 자연 파괴라든가 하는 것이 심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으로부터 오는 환경적 위기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결정적으로 가장 무서운 위기는 영적 위기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지러질 때 이것은 마지막입니다. 바로 총체적 위기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승리하는 신앙이냐, 실패하는 믿음이냐를 가름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절체절명의 위기이자 가장 최후의 위기인 영적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시 용기를 얻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다름 아닌 다윗입니다. 옛날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하면서 이방 땅 블레셋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자기의 주관대로 도피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곳 왕인[아기스]의 신임을 얻고자하여 블레셋과 대적 관계인 동족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물론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도 못하고 쫓겨 되돌아오고 마는데 그 되돌아 온 곳이 블레셋 땅에서 자기가 거주하던<시글락성>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위해 잠깐 나가있던 사이에 시글락 성이 아말렉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사막의 게릴라로 알려진 이들의 기습으로 시글락 성이 완전히 불타고 초토화되어 버립니다. 더 기막힌 일은 그곳에 살고 있던 다윗의 식구들을 비롯해서 모든 부녀자들을 다 끌고 가버린 것입니다. 멀리 나가 있다가 사흘 길을 행군하여 돌아와 보니 그 모양입니다. 시글락 성을 바라보는 다윗과 그 일행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4절에 보니까 그 심정이 나와 있습니다.“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얼마나 기가 막히고 분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도자인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엄청난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픔이 그것입니다. 자기의 가족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가족들이 모두 사로 잡혀 가버렸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설상가상으로 6절에 보니까 자기 백성들에게 배신까지 당합니다.“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들에 의해 성이 불타고 부녀자들이 다 붙들려간 참담한 상황에서 이제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적으로부터의 공격은 어쩔 수가 없다고 하지만 그토록 믿었던 동족들로부터의 배신이란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들을 위하여 지금까지 몸을 던져 피 흘려가며 투쟁했던 다윗이었건만 이제 와서 이 모든 책임이 다윗에게 있다고 소리치는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언제는“다윗이 최고다! 세상에 다윗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하던 사람들이 상황이 어려워지자 태도가 돌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세상인심입니다. 평소에 자기가 죽을 위기에 몰려서 허겁지겁 할 때 살려 달라고 간청하면서 도움을 입다가도 그 이후에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언제 내가 네 도움을 입었느냐고 별의 별 욕을 다하고 돌아서 버리는 것이 세상입니다.“물에 빠진 놈 살려 주었더니 내 보따리 내놔라 하더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만 참으로 인간의 배신은 순간적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를 추종하던 부하들이 일시에 살의(殺意)를 품을 정도로 자신을 적대시하자 매우 당황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위기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세요. 침착한 모습을 곧바로 유지합니다. 6절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과연 다윗다운 모습입니다. 백성들의 반란을 통하여 곧 바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내는 신앙인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질책의 메시지를 간파했던 것입니다.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생각이 이르자 다윗은 용기백배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회개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기 속에서 승리 할 수 있는 비결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신앙에 위기가 왔을 때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 분명히 그 방법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불안한 하루하루를 지냅니다. 언제 어떤 위기가 나에게 닥쳐올지를 모르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합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큰 위기를 맞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 이보다 더 큰 위기가 어디 있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말할 것 없습니다. 다 망했습니다. 한 가닥 기다렸던 그들의 종교에 대한 신앙마저도 그렇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빌라도의 힘을 빌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 같은 총체적 위기가 어디 있습니까? 가장 역사적이고, 가장 우주적인 위기입니다. 이렇듯 엄청난 일을 당하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세 가지 명령을 하시는데 그 속에 영적위기를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명령은“깨어라”,“기도하라”,“함께 가자”하는 이 세 가지입니다.

먼저“깨어 있으라”는 말은“정신 차리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현재에 대해서, 너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이제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는 피곤합니다. 세상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경제적으로는 대 강국입니다 마는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는 아주 고민이 많은 나라입니다. 갖가지 고민 중 제일 큰 고민이 마약입니다. 모든 범죄가 마약과 관련 있고 정치가들까지도 깊숙이 관련되어서 심지어는 잘못 건드리다가는 암살당합니다. 그래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입니다. 미국의 젊은이는 마약으로 인해 망하고 미국의 장래는 마약으로 무너진다고 외칩니다. 마약이 폭력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그 마약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도대체 뿌리가 무엇인지 연구해본즉 제일 큰 것이 월남전이었습니다. 월남전에 젊은 미국 군인들이 참여했는데 아시는 대로 월남전이라는 것은 전후방이 없어요. 도대체 여기까지가 적이고 저기까지가 아군이고 그게 없다는 것입니다. 아군, 적군이 없어요. 낮에는 아군이고, 돌변해서 밤에는 적군입니다. 이렇게 뒤집히는 판국이니 젊은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어요. 공포에 떨어요. 언제 어디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내게 총을 겨눌지 알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해서 저들이 고민하고 고민하다가‘이 두려움을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차라리 몽롱한 가운데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하면서 아편을 시작하는 겁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고 이것이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면서 마약의 나라가 되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또 술집이 잘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두렵고, 답답하고, 괴롭고, 잊어버리고 싶고....이 총체적 위기 앞에“에라, 모르겠다, 마셔라”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고로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어려움이 있느냐? 위기를 느끼느냐? 그렇다면 정신을 차리라”일반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가 뭐냐 하면 독주를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독한 술을 마셔서 잠시라도 아픔을 잊어버리게 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거절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맑은 정신으로 끝까지 대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도 똑바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내가 아프고 고통스러우니 마약이라고 해서 좀 잊어버리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위기에 대처하는 주님의 자세입니다. 모르고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당하고, 저 앞에 있는 고통과 어려움과 사건의 의미를 다 알고 정면으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깨어라, 정신을 차리라”

그리고“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위기가 끝에 가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영적 위기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가서서 기도하는 일이 최우선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위기는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바로 되어야 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내버려두세요. 중요한 것은 위기를 느낄수록 기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이걸 잘한 겁니다. 8절 보세요.“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그랬습니다. 위기를 느끼면서도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계속해서 위기 앞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함께 가자”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달리하자면 정면대결 하자는 겁니다. 위기를 우회하는 것도 아니고, 피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위기 앞에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나와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임박한 고난, 당하는 현실, 다 충분히 미리 아셨습니다. 또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아셨습니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다 알아서 하실 줄로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놓인 위기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이렇게 깨닫고, 이렇게 수용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위기 앞의 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총체적 위기를 느낍니까? 그것의 근본은 영적위기입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됩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고, 누구를 탓하고 절망하는 어리석은 시험에 빠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다윗처럼 얼른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살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더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하시며, 실종된 진실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하십니다. 다윗의 다시 시작하는 그 축복을 우리에게도 주셨다는 것을 믿고, 위기 앞에 섰을 때 새 용기를 가지고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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