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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계 1:4-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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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한 이웃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나 편지를 받아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에도 몇 통의 편지를 받았을 수도 있고 혹 그렇지 못한 분이라고 하더라도 지금껏 한 번은 자기 앞으로 온 편지를 받아 보았을 것입니다.

혹 일평생 한 번도 편지를 받아 보신 적이 없는 분이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이번 12월에는 그 분을 위해서 누군가가 편지를 보내도록 주선하겠습니다. 한 평생 못 받은 편지를 한 주간 동안에 연속해서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리겠습니다.

편지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편지 받는 것은 좋아합니다. 상품선전이나 공문서라면 몰라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라면 받는 순간부터 기대와 설렘을 가질 것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온 편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이 계시록을 대해야만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읽은 이 계시록은 본래 편지입니다.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종말을 예언하는 불길하고 무시시한 무슨 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으로부터 온 편지를 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가 본 놀라운 사실을 전하려고 합니다.

밧모 섬에서 그가 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리려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에 급히 이 환상을 기록한 후 속달로 여러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여러분은 그 편지를 받아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전해 주면 제일 먼저 어떻게 하십니까? 누가 보낸 편지인지 주소를 살필 것입니다. 가끔, 보낸 사람 주소만 보고 뜯어 읽다 보면 다른 사람 앞으로 온 편지인 경우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에게 온 편지인데도 교회 앞으로 왔기 때문에 그냥 무심코 뜯어보는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내용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받아야 할 사람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을 읽으면서 상징이 많고 환상이 많아서 도무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 한다면 수취인이 잘못 되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앞으로 온 편지라면 그렇게 모르는 소리로 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 몰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 저기 한군데씩이라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게 어딥니까?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하는 것이 정말 여러분의 가슴에 맺혀있는 소원이라고 하면 속히 오시리라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때가 가까움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여러분의 가슴은 뛸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이야기 같아요.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계시록은 모르겠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내용은 계시이지만 편지형식으로 쓰인 글입니다. 누가 보낸 편지인지,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인지 겉봉부터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4절 첫 부분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편지의 겉봉투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우편번호도 없고 보내는 이의 번지도 받는 이의 주소조차도 없습니다.

당시는 그럴 필요도, 그런 제도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있어야 할 기본 사항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발신인과 수신인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발신인은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 요한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는 그는 가장 나이 어린 제자 중의 하나로서 예수님의 품에서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를 일컬어서 어린 제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도 스물일곱 살에 처음 목사가 되었을 때 언제나 붙여지는 칭호가 “어린 종”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아직도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 가운데는 있습니다마는 이제는 더 이상 저보고 어린 종이라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죠?

그보다 연장자이던 제자들은 주님의 부름을 받아 땅 위의 임무를 끝내고 이미 승진 통보를 받았을 것입니다. 제자 중에 제일 어렸던 요한만이 아직 현역 복무를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대할 수 있는 주님의 친 제자로서 오직 하나 남아 있는 사람이 사도 요한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심상치 않은 박해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래서 핍박 자는 이 예수님의 직계 제자 요한을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전부를 핍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밧모’라는 섬으로 귀양을 보낸 것입니다. 그 섬에 유배되어 오직 바다와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주일이 되었으나 함께 예배할 성도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좋으신 주님을 묵상하며 예배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이야기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함께 예배하다가 같이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 여러분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이 되었는데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이 홀로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지나고 변할지라도 영원불변 주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을 성령 안에서 예배하던 중에 그는 성령에 사로잡혔어요. 혼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묵상하던 중 다른 세계로 옮겨져 간 것입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세상 마지막 일들을 성령에 감동하여 보고 들은 그는 그 소식을 사랑하는 교회들에게 보내고 싶어서 이 편지를 써 속달로 보낸 것입니다.

놀라운 환상을 접한 사도의 마음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속달우편도 느리게만 느껴지는 엄청난 위로의 소식을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유배를 당했기 때문에 다음에는 누구일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빨리 이 소식을 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그분,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그분을 전해야 되겠다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소원 뿐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을 써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마음은 지금 귀양 가 있는 밧모 섬과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에베소교회로부터 시작해서 북쪽에 있는 서머나와 버가모, 그리고 동남쪽의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 개략적인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요한은 마치 편지 봉투처럼 단지 그렇게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핍박 가운데 있는 교회를 생각할 때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살피고 싶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일곱 교회를 수신인으로 보내진 편지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일곱 교회입니까?  당시 소아시아에는 이미 더 많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11절에 그 명단이 실린 일곱 교회 말고도 신약을 보면 골로새, 히에라볼리, 밀레도 등지에 교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일곱 교회만 선정해서 편지를 보낸다고 했을까요? 

몇 가지의 설명들이 가능합니다. 그 당시의 로마의 통치제도 속에서 로마는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도록 하였고 소위 ‘PAX ROMANA’라고 일컫는 로마의 평화를 온 누리에 떨치기 위해서 이미 우편 제도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일곱 교회는 일곱 우편구역의 대표적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복사기가 있든지 또는 프린터가 딸린 컴퓨터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교회마다 한통씩 같은 편지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편지를 한 장 한 장 - 그것도 오늘같이 좋은 종이가 아니라 조잡한 파피루스나 양피지 위에 쓴다는 것은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한통을 쓴 다음에 돌려가며 보도록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 편지가 어느 곳에 배달되는 것이 속히 다른 지역으로 전달될 수 있는지를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받은 교회는 빨리 읽고 한 부를 베껴 놓은 후에 다음 교회로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다른 곳으로 잘 전달될 수 있는 위치의 지역 교회들을 선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 누구든지 계시록을 읽어 보시면 요한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즐겨 사용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러키세븐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요한은 일곱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모두 54번이나 나옵니다. 일곱 촛대,  일곱 별, 일곱 인, 일곱 뿔과 눈, 일곱 우뢰, 일곱 천사, 일곱 재앙, 일곱 금대접 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을 포함한 당시 사람들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완전’ ‘충만’ 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는 것은 모든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소아시아 지역에 실제로 있는 일곱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 핵심 메시지는 온 세상과 온 세대에 걸친 모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2장과 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의 끝마다 반복해서 했던 말씀을 들어 보면 수긍이 갈 것입니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은 일곱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냈지만 완전수 일곱이 의미하는 바대로 그 메시지는 전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당시의 모든 교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를 위해서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명단이 기록된 당시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 울산교회를 위해서도 이 편지는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편지를 받아서 겉봉만 보고 기뻐한 후 편지를 그냥 책상 위에 내던진다면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봉투를 뜯었으면 이제는 내용을 읽어볼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편지를 뜯어 읽을 때 편지 제일 첫 부분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기를 바라십니까? 지금은 탈권위주의, 탈격식주의의 시대라서 여러분이 어떤 대답을 하실지 궁금하지만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공통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편지 초두는 문안으로 시작해야 어울린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당시 헬라 - 로마사회는 자신들의 신들의 이름을 불러 문안과 송영으로 시작합니다. 요한계시록도 정확히 당시의 보편적인 편지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흔히 유대 묵시문헌은 그들 역사의 유명인의 이름을 빌려 그들이 쓴 것처럼 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이름으로는 권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의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서 유포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다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실제 인물이 구체적인 일곱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형식을 따라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비록 인사말은 시대마다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사로써 시작하는 것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상례입니다.

인사말을 들어보면 그들의 최고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어떤 인사를 했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진지 드셨습니까?” - 그게 주요 관심사였던 모양입니다. 역병이 쓸고 지나가는 시대에는 안녕히 밤을 새우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고 아침 되어서 길거리에서 만났지만 밥 못 먹고 나온 사람도 많던 시대에는 진지 잡수셨는지 물어보지 않습니까?

제가 이전에 8년 한국을 떠났다가 들어와서 음식점에 갔더니 인사말이 달라졌더군요. 전에는 많이 드십시오. 그렇게 하던 인사가 더 이상 그렇게 안하고 “맛있게 드십시오”하고 바뀌었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먹는 게 관심사가 아니고 이제는 맛있게 먹는 게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웰빙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인들의 관심사는 오늘 현대인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약서신들은 ‘은혜와 평강’ 혹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 인사합니다.

물론 사도들에 따라 개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야고보는 그런 용어를 쓰지 않고 옛날 그대로 자기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전 삶 그대로 인사말인 “문안하노라”그랬습니다. 야고보야 말로 정말 법 없어도 살 사람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그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특별히 바뀐 게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사람은 다르죠. 바울은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여러분이 상상을 해 보십시오. 핍박자가 선포자가 되었으니까 극적인 변화지 않습니까? “문안하노라”그건 이제 이후로 내 사전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안할 때 마다 “은혜와 평강으로” 어떤 서신에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인사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람은 자기의 회심만큼이나 확실하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정확한 그리스도인의 인사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라고 인사합니다. 사람마다 이러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방언으로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조리 있는 말로써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어있는 꽃밭 같아야 합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그들의 관심사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다른 때는 하나님께서 그 창조물을 향한 태도 특히,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태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택한 자를 향해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작용, 그 역사를 가리켜서 은혜라고 하기도 합니다. 비참한 죄인들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두고 은혜라고 하지만 또 어떤 경우는 택한 백성을 향해 계속 쏟아 부으시는 성령의 역사를 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은혜 -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구원의 모든 신령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구원 여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첫 걸음부터 구원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은혜, 즉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은혜는 한 번 받음으로써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요, 저녁마다 필요한 은혜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 함이니 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우리를 향한 크신 은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번에 부으셨지만 그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것이 되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날마다 은혜의 빛이 비취고 날마다 은혜의 바람이 불어야만 결실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유입만이 우리를 날마다 성도답게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주의 백성들을 향해 편지를 쓸 때마다 제일 먼저 이 은혜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평강을 빌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축복과 문안은 단지 사도들의 경건한 바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실제로 그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이 문안은 그의 바람인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있었던 그 능력의 말씀이기에 이 문안을 믿음으로 듣는 자에게는 은혜와 평강을  실현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은혜 다음에 평강을 선언합니까?  그것은 이 은혜의 가장 궁극적인 결과가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은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성도의 몫입니다.

살롬!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삶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악인이 집을 크게 지을 수 있습니다. 악인이 승진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위에서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어떤 인생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강이 없습니다. 이 평강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입은 자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화평과 기쁨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은혜의 샘물이 골짜기마다 흘러 모인 그것을 일컬어 평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관심사의 첫째는 은혜요, 그 마지막은 평강입니다.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더 알기를 원하고 더 누리기를 원하는 축복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고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서 직접 만날 수 없는 성도들을 향해, 직접 육성으로 들려 줄 수 없는 아시아 일곱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성도들로부터 격리되어 유배된 밧모 섬에서 사랑하는 교회들을 향해 마음껏 주고 싶은 축복을 이름 하여 은혜와 평강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자신의 관심사항은 무엇이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주고 싶은 소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남겨 주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향해 그들이 잘 되기를 바랄 때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이 은혜에 대해 알기를 얼마나 소원하고 있습니까? 편지의 첫머리에 ‘은혜’를 쓸 만큼, 입을 열자 은혜와 평강을 말할 만큼 그것을 소원하고 있습니까?

손을 뻗쳐도 닿을 수 없고 소리쳐도 들릴 수 없는 아득한 거리 - 밧모 섬에 있는 사도요한은 사랑하는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맨 먼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고 목메어 간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뿐 아니라 모든 세대마다 지상에 있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축복들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살던 시대처럼 교회는 항상 적대적인 세상 속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항상 환난 가운데 있기에 은혜와 평강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은 소위 말하는 ‘일반 은총’으로 개선된 세상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가 처해 있는 세상은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안주해도 좋을 만큼 고상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본성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속화된 교회가 세상을 짝할 수는 있어도, 콘스탄틴을 통해 교회가 세상과 짝한 적은 있어도 세상 자체가 거룩해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이 지칭한 대로 불의한 세상은 그 불의한 속성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유혹의 포도주에 취한 교회가 세상과 벗하여 놀아날 수는 있지만 계시록이 보여 준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지금도 있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필연적인 심판을 대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에이즈가 마지막 재앙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대 유성 지구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종말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이제 부어질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과 짝하고 더불어 삶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나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들의 삶에 같이 하지 말라고, 그들의 재앙에 동참하지 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한다면 세상은 분명히 여러분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이나 친구를 통해서, 또는 명목뿐인 교회안의 신자를 통해서 여러분을 공격해 올 수 있습니다.

세상은 강제로 짐승의 표를 받게 하려고 합니다. 엄청난 흐름으로 우리에게 부딪혀 오고 있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어느덧 세상 속에 깊이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어떤 신앙의 싸움을 싸워왔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누구였는지를 묻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인데, 한순간도 깨어 있지 않으면 세상의 메시지는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부터, 신문을 펼치는 순간부터 강력하게 파급되어 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젖어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날마다 주일마다 변화를 받기 위해 여러분은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 알아야 할 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 시대의 징조를 읽는 것입니다.

이악한 세상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가만히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스스로 안정치 못한 세상은 우리까지 그 동요 속에 몰고 들어가려 합니다.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 - 그것이 악한 세상의 본 모습입니다.

악의와 질투, 시기와 미움이 가득한 가운데 피 흘림과 전쟁이 끝나지 않는 곳입니다. 공포와 파멸이 더욱 가까이 다가온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현대 문명은 그 모든 자부심과 함께 파멸의 종국으로 내어 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 처한 교회를 위해서 사도 요한은 그가 본 사실을 전하기 위해 급히 편지를 쓰면서 맨 먼저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향한 그 사랑의 믿음에서 나오는 소원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그리고는 목이 메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노정마다 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평강이 날마다 더욱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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