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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리라 받으리라 (행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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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을 남들에게 전하려고 할 때에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직접 만나서 말로 전하기도 하고 아니면 전화로 전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휴대폰을 이용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이메일을 통해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정이 듬뿍 묻어나는 것은 편지가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는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듣고 배운 것을 혼자만 간직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나 그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관해 데오빌로에게 자세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난 3년 동안에 걸쳐서 쭉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끝마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무언가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받고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지 우리가 어떻게 은혜 아래 살아갈 수 있는지 그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다시 펜을 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역사들과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들도 함께 은혜를 나누고 앞서 은혜 아래 살았던 분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아계신 동안 주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주 친밀한 분으로 설명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전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모든 역사와 기적들과 능력들은 우리들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다고 누가는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나는 첫 번째 책에서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일을 다루었습니다. 거기에 나는,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때로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지시를 내리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하신, 모든 일을 기록했습니다.”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가의 첫 번째 편지였던 누가복음을 통해 쭉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아닌 또 다른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게 살 수 있고 그렇게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지만 우리들이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기에 예수님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살았느냐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다 이렇게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고난을 받으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여러 가지 증거로 나타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가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다시 보여주시고 또 다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산 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직접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 제자들 앞에서 함께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자기 몸을 보여 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남았던 손과 발의 못자국 그리고 창에 찔리셨던 자국들을 보여주시면서 직접 만져 보게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상하셨습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마주하셔서 말씀을 풀어 주시면서 이 모든 것들이 다 성경에 약속된 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해하고 자기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쳤던 일 때문에 괴로워하다 못해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처음 부르실 때처럼 그물 가득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대표로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아주 마음속에 다짐 다짐을 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왜 우리가 수시로 우리의 구원받았음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이 믿음 안에 서 있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처럼 혹시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흔들릴 때라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변함없는 주님의 관심과 사랑이 주어지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이 믿음이 우리들에게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베드로를 대표로 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없는 제자들을 확인하시면서 “내 양을 치라” 즉 주님이 맡겨 주시는 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주님의 사랑을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시며 또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에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게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고 죄 가운데서 흔들리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주님은 사랑스런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내 삶이 온통 세상으로 가득할 때도 주님은 안타까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고 빨리 이 사랑으로 되돌아서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참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니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 안에 있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를 갈라지게 만들고 우리를 의심하게 만들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우리를 상처받게 만드는 일들이 우리들에게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마치 고난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주님 앞에서 여전히 누가 높으냐를 다투던 제자들처럼 우리들 안에는 이런 욕심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말씀 안에서 살겠다고 다짐을 했음에도 어느 순간에 보면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나 자신을 보게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붙들어 주어야 하고 주님이 우리를 또한 붙들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저는 눈물로 지냈습니다. 사실 사랑을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사랑을 말하고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랑을 깨뜨리는 자가 목회자들이요 아니 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욕심 하나가 작은 감투 하나가 얼마나 우리들을 추하게 만들고 다투며 갈라지게 만드는 지를 보았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고 하는 좋은 뜻을 가지고 시작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이 바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분내고 오히려 사랑을 깨는 일을 서슴지 않는 모습들을 보게 될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아니 나의 말실수 하나가 얼마나 많은 상처들을 안겨주고 있는가를 깨닫게 될 때 또 누구만 감싸주고 위해 주는 것처럼 보임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받는 상처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다 나 자신부터 제대로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중보하고 축복하지 못하고 모두를 참된 사랑으로 감싸 안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될 때 저는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마음속으로부터 얼마나 통곡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지 그저 주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바랄 수밖에 없기에 그저 눈물로 주님 앞에 아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주님이 더 기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가운데 있는 모든 불편함과 하나 되지 못한 것들을 주님이 다 바로잡아 주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주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순종의 나라요 감사와 축복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마땅히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왜 아멘하고 예하여야 할 때 여전히 내게 아니요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일까요? 왜 나는 작은 것 때문에 마음 상하고 그래서 씩씩대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만큼 여전히 내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어니 나를 시험하는 자가 그만큼 강하게 나를 압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악한 마귀와 대적해서 이길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고 서로를 붙들어주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악한 마귀에게 놀아날 뿐입니다. 우리를 흩어놓고 갈라지게 만들어 놓고 마귀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거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도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실망했다고 해도 그로 인해서 속상해하지 말고 누가 말이나 행동으로 나를 실망시키고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그 때문에 뒤돌아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때가 진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갈릴리 바다까지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바로 그때가 우리가 찾아가 손을 내밀어 줄 때입니다. 그런데 내가 받을 만큼 돌려주려고 하는 마음이 내 안에 얼마나 용솟음칩니까?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습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십시다. 그리고 내가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내 마음에 거리끼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을 더 가깝게 하고 그 사람을 더 감싸 안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믿음 안에서 하나 되고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잡수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고 하셨고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 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보혜사 성령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실 때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 기다리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만 있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의지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이 성령이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도록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약속들을 우리가 다 받아 누리기를 위해서도 우리는 또한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즉 주님의 영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주님께 맡기며 주님의 도우심을 항상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며 사랑 안에 거할 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참된 사랑의 사람이 될 때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약속된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마귀는 그래서 우리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나 속상한 마음이 들게끔 일을 자꾸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합당한 대로 살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 생각에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갑니다. 내 생각이 더 좋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하지만 혹은 그래도 하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여기 주께서 구하라고 하는 것이 단지 나의 유익만을 구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온전히 깨닫고 순종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을 이미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 주님의 약속하신 모든 복을 우리가 누려야 합니까? 그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 받는 것이 단순히 복 받고 싶다는 욕심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복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 받기를 소원하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 우리가 중보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하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도 버릴 정도로 아끼는 마음으로 친구를 위해서 복을 빌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러한 사랑으로 친구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뜻을 모으고 있는 태신자 전도 운동도 바로 그런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목숨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모든 이웃들에게 우리게 베풀 수 있는 사랑 가운데 최고는 바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죽어 있는 영혼들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우리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베풀고 친밀하게 지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의 필요를 따라 도우며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처럼 사랑에 목말라 있는 세대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대문을 잠그고 사는 사람이 없을 정도요 이웃 간에 숟가락 숫자까지도 다 헤아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 단독 주택은 그래도 낫지만 아파트만 해도 아래 위층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형편이요 이제는 출입구마저도 다 자동문으로 닫혀 있어서 밖에서 찾아온 사람은 안에서 열어주지 않고는 아파트 복도조차 들어갈 수 없는 정도가 되지를 않았습니까? 이럴 때 따사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귀하며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작은 도움조차 정말 고맙고 마음에 뜨겁게 와 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말에도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말 한 마디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무어 그렇게 힘들 것이 있겠느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천성이라고 마음으로는 따뜻한 말 한 마디 해 주고 싶은데 실제로는 그게 결코 쉽지만도 않더란 말이죠.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도와 주셔야하고 우리 입술을 지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께서 학자의 혀를 주신다고 했으니 그 학자의 혀에 더하여 사랑의 혀도 주시기를 간구하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신뢰가 내 안에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작은 친절과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위해서 또한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그렇게 이웃을 대하고 밝은 얼굴로 서로를 대하게 될 때 그 아름다운 정이 그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까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편한 일이 있을 때 더 사랑을 베풀고 더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요? 주님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축복해야 하고요. 쉽지만 않기에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려고 자꾸 노력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로 갈라지게 만들려고 하고 서로 불편해 하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축복하고 그리고 작은 불편을 감수하면서 혹 실수를 하였거나 잘못을 했을 때는 바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할 때 신뢰가 쌓여가게 되고 이 신뢰가 생명을 구원하게 만드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주시고 좋은 신뢰를 쌓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놀라운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에 순종함으로 깨어 있고 축복하고 중보하는 기도함으로 깨어 있어서 주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이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서로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뜨거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순종하고 축복하는 것은 이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관심과 격려 그리고 온유와 겸손 역시 성령의 열매로서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줍니다. 사랑 또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귀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사람 설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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