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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 내가 알았도다 (출 18:8~12, 고전 1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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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한 분야 가운데 ‘변증학’이라는 유신론증의 과목이 있습니다. 이 과목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과목의 내용 가운데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어떤 섬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섬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섬에서 새의 발자국을 하나만 발견하면 됩니다. 그러나 새가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섬을 샅샅이 뒤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이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섬에서 발자국 하나만 발견하면 “야, 정말 새가 살았구나”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하나만 발견하면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숲 속에서 동물 발자국을 찾고, 섬에서 새 발자국을 찾아 뒤쫓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집중과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고, 일상의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손자국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한히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자국, 손자국을 발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극적인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과 감동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조각가 로댕은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시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발견하는 동기가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요즘에는 재창조, 제2의 건국, 재 창립 등의 용어를 많이 씁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있던 것들을 새로운 자세, 새로운 비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이런 새로운 의지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왕이 죽은 후에 이사야 6:5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잘 알고 있던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탕자는 집을 나간 다음에 있던 돈을 다 허비하고 돌아와서 비로소 아버지를 새롭게 만납니다. 같은 집이었고, 같은 가족이었고, 같은 아버지였지만 새롭게 느끼며 맞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닭이 울 때까지 자신의 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경험한 다음에 비로소 “이제야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려고 준비할 때에 원래 계획보다 한 해 늦게 갔습니다. 그 때 저는 대학부 지도목사로 사역할 때입니다. 600여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정말 재미있게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 유학이 일년 늦어진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처음에는 마음이 상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 일이 막혀 안 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자존심도 좀 상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계획대로 안 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을 가지 못하고 일년 더 있는 동안 저는 엄청난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주일만 되면 눈물이 날 정도로 학생들이 예쁩니다. 그 때 제가 갓 서른이 지났을 때인데 저나 학생들이나 다 비슷할 때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을 보면 그냥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이 크게 다가오심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눈을 감으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 때 제가 느낀 것은 “이제야 알았도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미국에 가지 못하게 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계획 보다 앞서 계시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드로는 이방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종교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모세를 권하여 사법제도를 창설할만큼 통솔력이 비범한 미디안의 추장이었습니다. 사위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보았습니다. 그 때 이드로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릅니다.

  여러분, 이드로가 이 말을 할 때의 감격을 느끼십니까? 흥분과, 감동과, 기쁨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드로의 모습을 보십니까? 우리도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행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한 말입니다.

  11절에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라고 합니다. 이드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합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재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힘’, ‘제일 원인’, ‘부동의 동자’ 등의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어떤 말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왜 창세기를 기록했을까요? 창세기는 그들의 역사인데 왜 창조 기사를 역사에 썼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란 말입니다.

  일본의 어느 목사님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폭포를 보고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함께 구경하고 있던 캐나다 목사님이 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키가 자그마한 일본인이 너무 좋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우리 아버지가 만든 건데 너무 좋지 않습니까?” 캐나다목사님은 놀라서 당신이 누구 길래 아버지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일본인은 자신을 일본의 목사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일본인 목사님께 다음 주일에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주일 예배 시간에 일본인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이 일본에서 오신 목사님은 제가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잘 모르지만 이분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주인의 아들입니다”.

  자연 만물과 우주의 신비,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우리의 낮음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태양계가 있는 이 은하계 안에는 별이 일천억 개나 있습니다. 또 이런 은하계가 일천억 개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별의 수는 10의 25승이나 됩니다. 별들과 별들의 거리는 수백, 수천광년씩 됩니다.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 크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려면 말이 적절치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공해가 심하여 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밤에도 하늘이 흐립니다. 이런 흐린 하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잊고 삽니다. 별이 보이는 맑은 하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기 쉽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작업장입니다. 하늘은 그분의 이력서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싶습니까? 그 분의 집을 방문해 보세요. 주소는 하늘시 별마을 10억번지입니다.

  자연뿐만 아니라 인생에게도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머리의 좋은 점들이 많이 있답니다. 우선 죄가 적답니다.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라고 하는데 머리털이 많은 사람이 죄가 많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힘을 덜어드린답니다. 머리카락도 헤아리시는데 셀 게 별로 없으니까 하나님이 편하시답니다.

  시편 95:3에는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라고 합니다. 시편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모아놓으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크신 주께 영광 돌리세”,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등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찬양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찬송가에도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찬송이 많이 있습니다. 1900년대 초 하이네라는 러시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바디아 산골 마을에서 엄청난 뇌우를 만나 하룻밤을 피신합니다. 이 때 뇌성을 들으면서 노랫말을 만듭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온 우주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어디에나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의 손을 벗어나 도망하다가 벧엘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창세기 28:16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자기 혼자 도망하고, 자기 혼자 고통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는 경험입니다.

  칼빈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코넬리우스 플랜팅거 2세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선하신 분이며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고 낯선 분임을 강조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영적인 건강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교자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강조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다시 발견한 자는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12절에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희생을 드리고 예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새롭게 발견하고 “이제야 알았도다”라고 한 그들은 즉각적으로 번제물과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입니다.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는 참 제사의 대상은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방종교의 제사장이 아니라 야훼 종교의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라고 합니다. 찬송과 위대하심을 선포합니다. 찬송과 영광, 이 모든 것이 제사입니다. 예배입니다. 아름다운 산천을 볼 때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찬송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의 명수였습니다. 어디 가든지 먼저 제사를 드립니다. 이사하여 짐을 풀기 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장사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저녁 해가 질 때에 아브라함이 들판에 나왔는데 지는 해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태양을 보고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는 해는 금방 산너머로 사라지지 않습니까? 일어나 보니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털고 일어나면서 “내가 섬기는 신은 영원히 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태양을 숭배하지 않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본의 스스끼라는 학자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00만의 신에서 유일한 한분의 신으로 돌아왔다”. 많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인 것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니콜라스 헤르만이라고 하는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 “첫째,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본래의 마땅한 자세로 예배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셋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완전히 반대란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의 약함과 낮음을 인정하는 예배가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인종차별의 악명이 높던 남아공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에는 흑인과 백인은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 시온교회(Holy Church of Zion)’라는 흑인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성만찬에 앞서 세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일에 흑인교회에 올리버라는 백인 대법원장이 혼자 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세족식 때에 마르다라는 흑인 여성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교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라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백인 대법원장이 흑인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사실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올리버는 “여러분, 이 사람은 내 집의 노예입니다. 한평생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더 씻겼습니다. 그 때마다 내 마음이 늘 괴로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발을 씻어준 이 사람의 발을 내가 씻겨 주어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 것뿐입니다”. 올리버 대법원장은 이 일로 대법원장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하며 기뻐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되었다”, “이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는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 온전히 알 때가 옵니다. 이 날이 당겨지기를 바랍니다. 이 날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감격과 탄성이 우러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감격 속에 날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사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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