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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살아야 신앙인인가? (대하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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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궁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거하더니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순행하며 저희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유다 온 나라 견고한 성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마다 있게 하고,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어떤 시골에 아주 믿음이 좋은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송아지 두 마리를 얻었습니다. 잘 키웠습니다. 너무 너무 탐스러워서 부부가 의논했습니다. "여보 하나님 은혜에 너무 감사한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립시다." 그래서 한 마리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밖에서 남편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만 두 마리 가운데 송아지 한 마리가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뛰어 들어왔습니다. "여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어 버렸어." 아내가 묻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느 것을 하나님 것으로 지정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남편이 그러드래요. "척보면 알 수 있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우리 송아지는 괜찮아요." 라고 남편이 말하더랍니다.

일반적으로 인생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쪽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즉 자기 지향적으로 사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입니다. 즉, 모든 것을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환경 지향적 인간도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조건에 의해서 지배되고, 주도되어 지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남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외되는 것 같고, 자존심 상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인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떨게 살아야 지혜롭게 살겠습니까? 제가 소개한 이런 부류의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그리스도인은 신앙 지향적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기준이 분명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위한 목표가 정해진 사람들입니다. 즉, 삶의 기준이 자기 이익과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판단 기준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다 왕 여호사밧은 분명한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삶의 기준이 분명하길 원하십니까? 어떻게 살아야 참된 신앙인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종,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첫째로 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찾아야 합니다(살아가는 자세).

유대왕국의 여호사밧은 바른 신앙자세를 가진 왕이었습니다. 당시의 여러 가지 우상과 타락한 생활 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바른 신앙자세를 잘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석학중의 석학이라는 파스칼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누나가 한 사람 있었는데 수녀가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외롭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많은 것을 발명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누나가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갑니다. 파스칼은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세상이 꺼지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는 어느 날 밤 "하나님이 있다면 한번 기도해보자."하고 결단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누나의 침상을 붙잡고 친구와 함께 밤을 새우면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누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리하면 제가 이 두뇌와 지식을 바쳐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누나가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그 후 파스칼은 자기의 지식과 학문을 하나님을 증거 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철학자를 보면 놀란다. 그러나 철학자는 그리스도를 보면 놀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만난 사람이었으며, 삶의 목적을 바르게 정한 사람의 대표적인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나옵니다.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려 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자기 혼자만 신앙생활이 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국민들을 잘 가르쳐서 신앙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나라로 이끌었습니다.

여호사밧에 대해서 17장 5절 말씀과 18장 1절 말씀은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을 받는 왕이 되었는지, 옛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성공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자 북 이스라엘 아합왕의 딸과 자기 아들을 정략적으로 결혼 시켰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하나님을 좇지 않고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를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통치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한번 잘못 찾아 간 길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합니다. 목적지와는 멀어집니다. 이스라엘 왕이 연합군을 만들어 전쟁을 하자고 할 때 거절하지 못하고 맙니다.

왜 여호사밧이 실패했습니까? 그토록 중요한 하나님의 관계가 왜 파기되었습니까?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배를 등한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는 사람들을 잘못 만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정치적인 계책들은 결국 실패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정략적 결혼이라는 방법을 사용한 정책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잘못된 교제로 인해 결국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신앙이 있는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을 미가야 선지자에게 물어 봅니다. 선지가의 구너교에도 안된다고 할 때 단호하게 결단하지 못하고 이방 선지자의 말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에서 패하고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만 살아 나왔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이 때 예후 선지자가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오늘 본문 2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좇지 않음으로 진노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이미 비싼 수업료를 내고 수치로 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오직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삶입니다.

성도는 성공과 돈만을 찾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명예를 찾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력을 찾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본문 4절에서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한 번 사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누구를 찾으며 인생을 살겠습니까? 무엇을 찾으며 인생을 살겠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고, 하나님을 찾으며 사는 길이 가장 기쁘게 사는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삶의 동기).

6절 말씀에 "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고 하였습니다.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원칙을 바로 세워야합니다. 인기를 위한 삶, 명예를 위한 삶, 부귀영화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월드컵 스타 송종국선수를 아시지요. 터키전 때 마지막 골을 넣고 그라운드에서 기도하던 선수였습니다. 그는 모든 경기가 끝난 후 “그동안 경기를 한다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주일날 교회에 나아가 예배드리며,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 할 것입니다.”라고 고백 하였답니다. 원래 송종국은 무릎 관절이 안 좋은 선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 무릎을 고쳐주셔서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해주시고 축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주세요.” 결국 송종국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고, 그는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모든 경기에 단 1분도 빠지지 않고 끝까지 뛴 체력이 강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삶의 기준을 하나님을 위해 사는 동기로 분명하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서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약 4년 동안 남북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 버지니아 마을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학교들도 모두 폐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대학교도 폐교가 되었습니다. 학생도 떠나고 교수도 떠나고, 학교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전 9시만 되면 이 학교에서 "덩그렁, 덩그렁" 하는 종소리가 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학교의 교장인 이웰이 남아서 공부하는 시간을 알리는 종을 쳤던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학생도 선생도 없는 폐교된 학교에서 마치 학교가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왜 종을 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웰은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려울 때일수록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끝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학교에 학생이 한 명 두 명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어느덧 학생들로 가득 차고 좋은 선생들도 오게 되었습니다. 전후 7년 동안이나 종만 울리던 학교가 나중에는 좋은 대학이 되었습니다. 한 교장의 믿음과 소망이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목표가 있어야 후회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목표가 참으로 아름답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사밧왕은 실패를 통해 뼈저린 경험을 하고나서 나라를 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살길이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서울 서대문 결핵병원내 베데스다 교회 설립자이신 이정재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40년간 매월 평균 200명 이상, 지금까지 모두 7만 명 이상의 결핵환자들을 돌보신 분입니다. 이분이 이렇게 결핵환자를 위해 인생을 바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전남 장흥의 농가에서 4남 5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목포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16세 때 무작정 상경했다고 합니다. 남산 토굴에서 담요 몇 장을 깔고 지내는 어려움 속에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 서울대 농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사카린 등 인공 조미료 제조에 손을 대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3세 때 각혈을 하며 쓰러졌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치명적인 결핵이라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했답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시립 서대문 병원 이었습니다.많은 결핵환자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 장로는 “살려만 주시면 여생을 결핵환자를 위해 바치겠다.”며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서원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기적같이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빚을 갚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일에 결핵환자들을 돕는데 온 힘을 기울여 왔다고 합니다. 무려 550억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복지사업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보금자리'를 설립했습니다. 앞으로 4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북한의 결핵환자를 돕는 일에도 힘을 쏟을 작정이라고 합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삶, 내 가족만을 위해 사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를 위해 살겠다는 기준을 분명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건강, 나에게 주신 재물, 나에게 주신 재능, 나에게 주신 지식, 나에게 주신 시간을 주를 위해 사용 하겠습니다’하며 기준을 분명히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죽는 것 아닙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주어졌을 때,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주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헌신하고자 하는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삶의 방법).

본문 7절에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 땅에 성취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가정에, 내가 소속된 교회에, 내가 일하는 일터에 내가 머무르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분명히 나에게 존재하여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꾸 내 방법, 세상의 방법을 고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교회의 경우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주일날 남들보다 일찍 나와 주차요원 완장을 차고 교회 주차장을 관리하며 지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중에 어떤 분은 군대에서 아주 계급이 높은 장군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주일날 아침 일찍이 나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좋고 많은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있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중심의 생활을 청산하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즉 삶의 순간순간에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이루도록 헌시나며 살기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 미스바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모습을 본 빋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스트셀러였던 가시고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조창연씨가 쓴 소설인데, 아버지가 아들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부성애를 그린 소설입니다. 가시고기는 조그만 민물고기인데, 특이한 점은 암놈이 알을 낳을 때에 바위틈에 알을 낳고는 그냥 가버린다고 합니다. 보통 짐승들은 암놈이 새끼를 낳은 다음에 잘 보살피는데, 가시고기는 알을 놓고는 그냥 가버린답니다.

그러면 숫놈이 그것을 돌보고 보호합니다. 적이 와서 자기의 새끼를 침공하면 목숨을 걸고 자기의 새끼를 보호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새끼들을 정성스레 키웁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자기 새끼들을 키우면, 새끼들이 모두 자라 자기의 갈 길을 가버립니다. 그러면 아빠 가시고기는 힘이 다 빠져서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가시고기는 이렇게 자기 새끼들을 위해서 전적으로 희생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듯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할 때 구원받을 수 있고, 십자가를 질 때에 남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전에는 소아마비 병이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숄크 박사가 소아마비 걸린 아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이렇게 불행해서 되겠는가? 라고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들어낸 것이 ‘숄크 백신’인데 소아마비 퇴치약입니다. 숄크박사의 기도와 희생으로 참된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교만과 우월감을 제거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갈 때 참된 길이 열려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은 하나님의 방법을 택할 때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판사들을 임명하면서 삼가 행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 삼가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리하여 재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판하고자 하시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 12절 까지 한 번 교독하겠습니다.

8절: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거민의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9절 : 저희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충의와 성심으로 이 일을 행하라.
10절 : 무릇 어느 성읍에 거한 너희 형제가 혹 피를 흘림이나 혹 율법이나 계명이나 율례나 규례를 인하여 너희에게 와서 송사하거든 저희를 경계하여 여호와께 죄를 얻지 않게 하여 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말게 하라 너희가 이렇게 행하면 죄가 없으리라.
11절 :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에는 대제사장 아마랴가 너희를 다스리고 왕에게 속한 모든 일은 유다 지파의 어른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다스리고 레위 사람들은 너희 앞에 관리가 되리라.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찌로다 하니라.

찬송가 217장을 지은 분은 미국의 아델라이데 폴라드여사입니다. 당뇨병으로 고생하다가 안수 기도를 받고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했는데 기금 마련에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시간에 어떤 할머니가 기도하는데 "주님, 우리 생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그녀는 감동을 받아 이 찬송을 작사하였다고 합니다. 옳습니다. 우리 생의 길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지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의미인줄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살다 인생 끝나는 것이 아닌가하고 초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매순간 주어지는 생활 속에서 주님의 뜻을 성취한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어떤 일을 할 때 이일들이 나에게 유익한가, 기쁨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온다할 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단호하게 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사밧은 악한 사람과 교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19:2을 보십시오. 이것이 실수였습니다. 여호사밧이 이렇게 악한 사람하고 교제해 나갈 때에,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경고를 했습니다. 19장 2절 중간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사밧에게 책망합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20장 37절 중간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자의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늘 교제하는 분은 어떤 분들입니까? 좋은 교제와 피해야 할 교제가 있습니다. 해야 할 교제가 있는가 하면, 하면 안 될 교제가 있습니다. 더욱 신앙을 위해서는 피할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교제는 멀리해야 되거나 피해야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9-11절입니다."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 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 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 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 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 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 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 안 믿는 불신자 중에서 이렇게 잘못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 만나지 말라." 그런 말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를 떠나서 살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교인이라 고 일컫는 자가, 직원(제직)이라고 일컫는 자가, 은혜 받았다고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 하거나 이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성령의 충만함 받고 지혜로운 사람하고는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자꾸 사귀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에 유익이 있고 기쁨이 있고,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좀 멀쩡한 것 같아도 분명히 지혜가 없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 성령의 사람 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솔깃한 말을 해도 딱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믿음을 키워주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헌신을 북돋워 주는 사람. 어떤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괜히 절망했다가도 소망이 생깁니다. 믿음이 떨어졌다가도 이 믿음이 막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자꾸 만나고 자꾸 만나고 만나야 합니다.

반면에 어느 사람은 들을 때는 솔깃합니다. 참 재미도 있습니다. 참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해어지고 나면, 믿음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뚝뚝 떨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떨어지게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다나게 하고, 믿음을 저해 합니다. 이런 사람하고는 만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하고는 사귀면 안 됩니다. 저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이기 대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잠언 13장 20절을 보면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웠던 여호사밧은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살도록 인도하는 일에 앞장서기 하였지만 사람과의 잘못된 관계를 확실하게 끊지 못한 것 때문에 신앙적인 결단에 실패를 해서 죽게 됩니다.

구별된 교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헌신한 자에게 하늘나라(천국)에서만 누리게 되는 축복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이 땅에서도 받는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드린 자마다" 얼마나 받는가 하면? "여러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러 배만 해도 대단한데, 이와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10장에도 나오는데 그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여러 배를 받는다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하면 "백배나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자에게 백배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약속을 그대로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투자해서 백배나 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배나 받는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백 배(百倍)라는 말은 '많다.'는 말입니다. 모두를 다 뜻할 때 백이라는 말들을 씁니다.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는 말을 쓰는데, 문자 그대로 백가지의 행동이지마는 모든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백배를 받는다는 말은 ‘많이 받는다. 넘치도록 받는다. 남김없이 받는다. 모두를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다음 백배를 받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백배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 잘 믿어서 받는 복이 백배만 되겠습니까?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내셨고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셨던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가 교회가 낡아서 교회를 새롭게 신축할 때에 그의 전 재산이었던 논 세마지기를 받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직업이 없으니까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교회 관리를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이 유학을 갔습니다.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공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어졌고, 연세대학교 총장까지 지냈고, 현대 한국의 지성인 중의 가장 선구자가 되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고백했습니다. “논 팔고, 밭을 팔아 공부시켜 놓으면 일본관리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시대였으나 하나님 앞에 내게 있는 적은 것 드렸더니 천 배로 만 배로 축복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집이나 전토와 같은 물질은 백배나 받습니다. 그런데 뭐까지 백배를 받는다고 했습니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을 백배나 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을 백배나 받아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한 부모도 안 모시려고 하는 시대인데, 부모가 백 명쯤 되어보세요. 어떻게 그 부모를 다 모시겠습니까?

요즘 자식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드니까 외국에 가서 공부시켜야 되겠다.’고 해서 자녀를 외국에 보내고, 그 자식이 또 걱정되어서 어머니가 따라가서 자식을 또 뒷바라지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이곳에서 돈 벌어가지고 보냅니다. 그래서 부부가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기러기 아빠라고 하는 말이 생겨졌습니다.

양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자식을 여럿 낳지 못하고 하나만 낳아서 키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녀를 백 명이나 한번 낳아보세요. 백 명이나 한번 얻어 보세요. 그러면 그게 복이 되겠습니까? 같은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아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도 백 명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내를 백 명이나 얻고 남편을 한 백 명이나 얻어서 백 명의 아내, 백 명 남편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까?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백 명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 뜻이 무엇입니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이나 자식을 백배로 주신다는 것은 백 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네 형제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백 명의 형제보다도 더 귀한 형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백 명의 부모보다도 더 귀한 부모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백 명 주신다는 말이 아니고, 백 명의 자식보다도 더 귀한 자녀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백 명의 아내보다도 더 귀한 아내, 백 명의 남편보다도 더 귀한 남편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룻기서 4장 15절에 보면 룻이 결혼하여서 아들을 낳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오미에게 와서 말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 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얼마나 귀한지 일곱 아들보다도 더 귀한 며느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귀한 자녀를 바라보면서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니, 열 아들보다 귀한 자식이니” 하는 말들을 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서 물질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실 때에 물질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릴 수 있는 재능을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어떻게 약속합니까? 물질적으로 백배나 받을 것이라고. 백배나 너에게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배의 가족관계를 형성해 준다는 것입니다. 백 명보다도 더 나은 형제를 주실 것이고, 백 명보다도 더 나은 부모를 주실 것이고, 백 명의 자식보다 더 나은 자식을 주실 것이고, 백 명의 아내와 남편보다도 더 나은 부부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우리에게 있는 것 주님 앞에 드려서 아름다운 가족을 백배나 얻을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배가 이런 뜻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서 백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도 되어 집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아들이 없었습니까? 디모데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 있었습니다. ‘누가’가 의사인 자기의 직업을 다 팽개치고 옥중에 와서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그의 건강을 돌보았고, ‘에바브로디도’가 그의 삶을 다 책임져 주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 바울에게 하나님은 그의 정말 좋은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었습니다. 눈까지 빼어주겠다고 효도하는 자녀가 어디에 있습니까? 옥에 갇혀 있을 때에 같이 옥에 갇히면서 효도할 자식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을 때, 그에게는 성도들이 다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좋은 아들이었고, 좋은 부모였고, 좋은 형제자매가 되어서 이 땅에 살 때 그는 외롭지를 않았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리는 올바른 교제를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시는 말씀대로 목표가 분명하고, 동기가 분명하고, 방법이 분명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야 참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헌신하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 신앙적 자세를 가질 때 언제나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며, 인정해 주시으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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