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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자 (롬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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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1절에서 ‘그러므로’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말 ‘그러므로’와는 뜻이 약간 다릅니다. 이 ‘그러므로’ 라는 말은 ‘그러면’ 이라는 말로 해석하면 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렸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심정을 알겠습니까? 자식은 좀 속상하면 부모를 다시 안본다고 하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워도 속상해도 자기 자식을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때로는 주의 종들에게도 이것이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기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씨요 베냐민 지파로 토종 이스라엘인인 자기는 구원을 받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절대로 이스라엘을 다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기라는 말이 첫 번째고 또 하나는 나는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내 놓은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생명책에 이름이 확실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그런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셨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하나님이 만약에 저들을 버리려면 자기 이름을 하나님께서 기록한 책에서 지워버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내 민족을 이렇게 사랑한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자기 이름이 천국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2절에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여기에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전부 다 버리지 아니하셨나 라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할 때에 집단적으로 또 민족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구원은 따로 있습니다. 단지 환경적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구원받게 되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정이 함께 구원의 반열 속에 환경적으로 함께 따라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구원하시고 개별적으로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단체로 버리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개별적이라는 말씀을 이하에서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는 말씀은 바울이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았으면 하고 아주 간절한 열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난망이었습니다. 구원받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니 그 중에서 될 만한 사람만 개별적으로 초청하여 “다 돌아오면 참 좋겠습니다만 일단은 여러분들 가운데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일 사람은 예, 아멘 하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반열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개별적인 초청을 한 것입니다. 민족적인 초청을 하다가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제쳐놓고 개별적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하는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850대 1의 대결 끝에 통쾌한 승리를 하였지만 이세벨 때문에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에게 대단한 힘이 있었지만 오래 지나 지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시고 잠을 재워 주시고 운동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바람소리, 지진 소리, 큰 소리로가 아니라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 뒤에 하나님이 대답하신 것을 여러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4절) 라고 대답하십니다. 깜짝 놀랍니다. 엘리야는 자기만 남은 줄 알았는데, 자기만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자기만 바로 서 있는 줄 알았는데 칠천 명이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여러분, 지금 나는 대표적인 예로 남아 있습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버린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유대인의 사상에 남은 자라는 개념이 출발하게 됩니다.

‘남은 자’ 개념은 지금도 그대로 적용이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때까지는 집단적인 선택, 단체적인 선택으로 하나님의 종들까지도 인식을 하였습니다만 이일로 말미암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이 말씀을 통하여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 순종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다 돌아온다는 것은 기대가 난망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는 아니라고 해도 신앙을 버리거나 타협하지 아니하는 남은 자들은 틀림없이 모든 세월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이북에도 있고 못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항상 그런 사람들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모스 9장 8절, 미가서 2장 12절, 5장 3절, 예레미야 23장 3절 등 성경전체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23장 3절에서는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 11~13절에서도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신의 아들이름을 아주 희한하게 ‘스알야숫’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그 이름의 뜻을 아무도 몰랐는데 그 이름의 뜻은 남은 자의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남은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유대 선지자들, 하나님의 종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단체로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개별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남은 자의 의미가 정해지게 됩니다.

남은 자가 누구인가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남긴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드리고 충성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라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남은 자가 되십시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남은 자가 아닌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남은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합니까? 어딜 가든 남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시험이 많고 흔드는 것이 많습니다. 그 곳에서 내 믿음을 지키고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남은 자로 한없이 번성하게 한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남은 자라는 사상에서 어떤 문제가 생겨나는가? 라는 더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이 선민사상입니다. 그런데 선택된 민족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선택된 사람만 있을 뿐이지 이스라엘 유대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전해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못하고 여러 말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이 말을 해왔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선지자들은 다 이 말을 했지만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덜 하였는데 우선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니 우선은 듣기에 좋습니다. 여러분은 다 남은 자라고 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살리는 것입니까, 죽이는 것입니까?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말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라고 하나님은 말씀했습니다. 이에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래의 말씀, 순수한 복음을 거절하게 되면 하나님의 종들 중에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점점 더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여러분은 모두 어떻게 하든 하나님 본래의 말씀을 보고 가슴을 치는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는 것은 별로 좋지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은혜 받았다는 말이 그렇게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유대인들에게 선민사상은 없으며 남은 자만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남은 자들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만약 내가 남게 되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라는 것입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것이 내 공로가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5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여기서 남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6절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여러분께서 구원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내가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7절부터는 말씀의 초점이 바뀌게 되는데 지금까지는 남은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만 7절부터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7절에서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고 말씀하시는데 상당히 주의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율법의 행함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모든 노력을 다 했지만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로가 아니라 내가 구원을 얻으려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끝까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7절 말씀은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잘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가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7절 하반부의 ‘그 남은 자들’은 지금까지 말씀한 남은 자가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 택함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택함받지 못한 사람들은 좀 바보처럼 아멘하고 받아 들였으면 좋을텐데 똑똑해서 자기가 잘난척 하다가 그만 이렇게 우둔하여 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차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아멘하고 은혜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8절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저 정도 교회를 다녔으면 충분히 알만한데 이상하게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내가 틀림없이 복음을 전했는데 받지 못하니 아주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의 귀를 닫아 놓고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럴 리 없습니다. 그 정도로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아니한 것입니다. 옛날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을 하고 있지만 지금 유대인들도 그렇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은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저 순간순간마다 스폰지처럼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나팔을 불어도 춤을 추지 아니하고 슬픈 일이 있어 곡을 해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9절부터 또 말씀하는데 남은 사람이 아닌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초점을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밥상이란 맡아놓은 당상이라는 것입니다. 내 밥이니 언제든지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10절)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왜 흐려지고 왜 굽습니까? 구원을 얻었다고 안일하게 있다가 적에게 끌려가서 이런 저런 고생을 하다 보니 눈이 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말라고 유대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맡아놓은 당상이다 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11절에 다시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완전히 재기불능할 정도까지 넘어졌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절대로 완전하게 버린 것은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는 순간이 바로 기회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인생 모든 것에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한 것은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힘을 내어 자기들도 구원으로 달려오게 하도록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시기할 것 없고 화낼 것도 없고 여러분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제는 이방인들이 돌아왔으니 유대인까지 돌아오면 세상이 얼마나 풍성하게 되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유대인의 남은 사람이 아닌 사람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하나님, 천부여 의지하옵나니 손들고 왔습니다.’ 라고 한다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은혜가 더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충만함이 얼마나 더 풍성해지겠습니까? 이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위에 풍성하기 원하고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으로 누리는 큰 은혜와 함께 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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