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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복받는 신앙생활 (요삼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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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를 가리켜서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말합니다. 사실 19세기만 해도 우리말에 '어린이'란 단어가 없었습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처음 어린이란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존칭어로 '어리신 분', '어리신 이'에서 '어린이'란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그 전에는 어린아이들을 가리켜 '아해', 더 원색적으로 하면 '아새끼' 이렇게 말했는데, 처음으로 어린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20세기를 가리켜서는 "여성을 발견한 세기"라고 말합니다. 여성이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남성과 동등한 파트너로서 인간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21세기를 가리켜서 "노인의 세기"라고 말합니다. 금세기 최대 사회 이슈는 소위, 고령 인구의 문제입니다. 백 년 전인 1900년대만 해도 평균 수명이 50세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45세만 되도 벌써 늙은 축에 들어갔습니다. 늙은이였습니다. 그런데 190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소위 노인의 연령은 55세로 껑충 뜁니다. 그리고 1900년대 후반에 진입하면서 이제 우리 사회를 포함해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소위 법적으로 노인 연령을 규정할 때 65세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65세도 노인 축에 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재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이 74세이고 여자는 81세입니다.

  평균 수명이 늘고, 사회가 급속도로 빨리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노인이 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늙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단순히 나이를 먹고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남은 세월을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어린이, 여성, 노인이라는 신분과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진정한 복은 국가나 권력이나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3.1절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와 가정과 국가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사랑의 삶을 삽시다
  본문 1절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도 요한의 세 번째 편지는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수신자 가이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글 전반에서 발견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장로'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사제나 감독처럼 일정 지역에서 영향 있는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임입니다. 한편 수신자 '가이오'는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으며 '기쁨', '환희'의 뜻입니다. 가이오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에서 그리스로부터 마게도냐를 지나 드로아까지 동행한 더베의 가이오입니다. 나중에 사도 요한에 의해서 버가모의 첫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 대해서 사랑이 돈독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사랑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랑임을 뜻합니다. 사도 요한과 가이오의 삶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 가운데서 맺어진 것입니다.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이나 관계가 아닌 전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부이고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는 누구도, 무엇으로도 흔들거나 깰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비유할 때 제일 많이 쓰는 표현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런데 어떤 설교가 한 분이 양 다음으로 인간을 잘 비유할 수 있는 설명이 있다면서 "우리는 다 고슴도치와 같아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고슴도치는 외로운 동물입니다. 고슴도치는 홀로 산책을 하고 혼자 여행을 합니다. 그러다 외로움을 느낀 나머지 다른 고슴도치에게 접근을 시도합니다. 외로워서 다른 고슴도치에게 접근을 시도하다가 찌르고 또 찔림을 받습니다. 그것이 고슴도치의 운명입니다.

  고슴도치 한 마리에게 보통 5천 개의 가시가 있다고 합니다. 가시 5천 개를 가지고 사는 고슴도치! 우리 인생도 고슴도치 같아서 고슴도치의 가시와도 같은 5천 개 이상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워 이웃들에게 접근했는데 오히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곤 합니다. 그러나 고슴도치에게도 사랑은 가능합니다. 새끼를 낳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슴도치는 여전히 사랑을 합니다. 조심조심해서 바늘과 바늘 사이, 가시와 가시 사이를 잘 연결해서 서로 찔리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되면 고슴도치도 춤을 출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랑을 하고, 새끼를 낳고… 고슴도치에게 이런 사랑이 가능하다면 상처 많은 인생에게도 여전히 사랑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사랑 때문에 상처도 받습니다. 외로움 때문에 상처도 받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서 이 사랑을 나눈다면, 우리는 인생의 고독을 극복하고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인생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미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사람들이 이미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산다는 것은 슬프고 불행한 일입니다. 살아있을 동안에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것은 잘못 사는 것이고 지옥의 삶입니다. 반드시 후회와 아픔이 부과됩니다. 어떠한 상황과 조건 가운데서도 사랑의 삶을 실천할 때 행복과 은혜와 천국의 인생을 누리게 됩니다. 복받기를 원하십니까? 사랑의 삶을 사십시오. 미움과 증오를 다 버리고 사랑의 삶으로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은혜의 삶을 삽시다 
  본문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개인적이고도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잘 되고'의 헬라어 '유오두스다이'는 번영하고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영적인 상태와 육신적인 상태를 비교하여 육신의 형통함과 강건함을 기원하는 것으로 보아 가이오의 영적 상태는 염려할 상태가 아니었던 듯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와 육신의 형통함이나 강건함은 한 편으로 치우칠 문제가 아니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영혼과 범사와 건강이 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사를 잘 활용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교만하거나 불의의 병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남을 축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을 나누고 남의 축복을 나의 축복처럼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만의 성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성공을 시기하고 방해하고 배아파하는 사람들은 은혜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잘 사는 것은 소유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가치에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소유 가치가 높아집니까? 존재 가치가 높아집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부자입니까? 안 믿는 사람이 부자입니까? 사람 나름입니다. 예수 믿는 것과 부자가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누가 말합니까? 물론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부자가 있습니다. 역시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으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르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존재 가치가 높아지지 소유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재 가치는 존재의 목적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능이 아주 좋은 마이크가 있습니다. 이 마이크는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는 마이크입니다. 그러니 값도 비쌀 것입니다. 이 마이크의 존재 가치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아십니까? 목적에 있습니다. 마이크의 존재 목적은 음파를 음성 전류로 바꾸어 작은 소리를 크게 내는 데 있습니다. 그 목적대로 존재해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 때, 즉 고장나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날에는 마이크의 가치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목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컵도, 의자도, 강대상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소유 가치는 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느냐 하는 데서 나오지만 존재 가치는 존재의 목적대로 사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매우 중요한 존재 목적은 누가 결정합니까? 존재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존재를 만든 분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치중해서 자기 뜻, 자기 생각, 자기 욕심을 푯대로 삼은 인생은 잘못된 인생입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받기만 하는 '사해의 삶'이 아닌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갈릴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범사와 건강이 잘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과 나누는 은혜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복받은 사람의 모습이고 은혜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더욱 은혜 충만한 복받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순종의 삶을 삽시다
  본문 3-4절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형제들이 사도 요한에게 가이오에 대하여 전하여 준 것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사도 요한이 크게 기뻐한 것은 당시 가이오가 진리를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복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여러 가지 즐거움이 있었으나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조테란'은 이중 비교급으로 요한이 가이오의 소식 즉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다른 어떤 소식보다 훨씬 더 기뻐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즐거움은 성도들이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의 최대의 기쁨은 성도들이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이 최대의 기쁨은 성도들이 어려운 조건 가운데서도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인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과 주의 종과 성도 자신이 최고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천국의 기쁨이며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인 것입니다.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한 청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얼마나 읽어야 하고 신앙의 연조는 얼마나 돼야 합니까?"
  테일러 목사는 청년에게 되물었습니다.
  "촛불은 언제부터 빛을 발합니까?"
  "그야 양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테일러 목사는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신앙과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과 신앙 연륜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훌륭한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신앙은 한순간의 결단입니다. 신앙은 부르심에 대한 거룩한 응답입니다. 신앙은 내 뜻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엄숙한 행위인 것입니다. 순종이 신앙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기만 하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우리나라와 민족이 우상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순종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미신적, 광신적, 물질적, 세속적, 인간적, 감정적인 어리석은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하는 신앙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모세와 에스더와 사도 바울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더욱 기도하고 부르짖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때 최고의 복과 절대적인 복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은 3.1절 기념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렵고 위태로운 순간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와 한국교회가 사랑과 은혜와 순종의 삶을 실천함으로 더욱 복받는 성도와 가정과 민족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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