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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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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복은 예수님의 성품이기도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 해당하는 우리들의 성품이기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성품 역시 불변의 영역은 아닙니다. 사람은 먼저 가치가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차츰 성품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네번째 특징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누가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죽은 사람에게는, 시체에게는 이 주림과 목마름의 현상이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건강할 때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병들었다는 신호는 무엇입니까? 질병의 최초의 싸인은 식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하면 제일 먼저 생기는 것이 식욕입니다.
  건강한 학생은 지식에 대해서 목말라합니다. 건강한 대지는 단비를 목마르게 기다립니다. 건강한 나무는 물을 빠라들이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의시고 그 몸을 지탱시키고 성장시키는 방법으로 주리고 목마름이라는 욕망을 주셨습니다. 이 욕망이 없다면 아마 귀찮고 게으른 사람은 먹지 않아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마른 막대기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식욕은 모든 욕망에 우선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식욕을 대신할 다른 대용물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식욕은 이처럼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돈보다 우선하고 명예보다 우선하고 지식보다 우선합니다.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먹고 마시는 것은 기호품도 아니고 사치품도 아니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요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름이란 말은 "인간이 무엇을 향하여 몹시 애타게 사모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무엇을 향하여 그 원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애쓰고 힘쓰는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거부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을 위해 안달이 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안달이 좀 나셔야 합니다. 주의 일에 안달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기에 안달이 나고 전도하기에 안달이 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안달이 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육신의 양식이며 음료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은 의인 것입니다.

  율곡선생은 "언제나 의를 행하라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는다고 해도 그 길을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불의를 행해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결코 거기에 흔들리거나 유혹받아서는 안됩니다.

  추수걷이가 한창일 때,적들이 한 도성을 쳐들어왔습니다.성주는 백성들에게 일손을 멈추고 모두 퇴각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적들은 추수할 들판의 모든 곡식들을 거두어가 버렸습니다.이를 본 백성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성주를 비난하였습니다.그리고 왕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이왕 적들에게 빼앗길 수확이라면 네것 내것 없이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걷어들이게 하든지,아니면 불을 놓아 태워버리든지 해야할 것 아닌가? 적에게 유익을 준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왕 앞에 죄인으로 선 성주는 말하였습니다."아무리 위급한 때라 할지라도 백성들에게 네것 내것을 가리지 못하게 하는 의롭지 못한 사고방식과 불을 놓아 모든 것을 아예 없애버리는 부정적 생활태도를 갖게 하는 것은 적의 어떠한 공격보다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성주의 말을 듣고 그에게 벌대신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신하요 참으로 지혜로운 왕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버리고서 천하를 얻는다고 해도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불의한 것입니다. 신앙은 대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꿈질 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죽는 것처럼 신앙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영은 죽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배고프고 목마른 시대상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인간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시면서 너희는 먹고 마실 것인 음식을 위해서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 "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격적이고 복음적이고 예수적인 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의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자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3장7-9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의에 대하여 정의하였다.

  "의"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목말라서 본질적인 것을 버리면 결국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구이겠습니까?
  거지입니다. 거지에게는 인간적인 체면이 없습니다. 안준다고 그냥 가는 법이 없습니다. 기어이 받아가지고 가는 것이 거지입니다. 그만큼 절신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는 자기 욕심을 위한 거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절실하게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것입니다. 우리는 거지만도 못한 성도가 아닙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딸의 질병으로 인해서 주리고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여인의 소원이 정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인지를 확인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하셨습니다.
  이 때 여인이 대단히 지혜로운 말을 했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
  왜 이 여인의 대답이 지혜로운 대답인지를 알 수 있습니까? 그 다음절 막 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주리고 목마름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리고 목마름이 채워질 때 포만감 즉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다른데 정신을 팔지 않습니다. 온통 정신이 주리고 목마른 것을 채우는데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시편 42편 1-2절 말씀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니이다"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주리고 목말라하면서 그것을 찾기에 힘쓰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가장 절박한 것은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번 먹고나면 일년정도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계속 먹어야 한다는 고충이 있습니다. 사람이 음식을 장만해서 먹는 시간이 상당한 많이 차지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의도 그렇습니다. 한번 의를 행했다고 해서 그 의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의를 행해야 합니다. 아무리 의로운 사람도 인생 말년에 불의를 행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베냐민 사람인 사울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었고 이스라엘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셔서 사사시대 이후 혼란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는 쭉 하나님을 섬기고 겸손한 왕으로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인생말년에 교만과 시기심 때문에 불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제사장 사무엘이 제사를 드려야 하는 데 그만 자신이 그것을 가로채서 제사를 드리고 나중에는 다윗에 대한 시기심이 불타올라서 그릇 행했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다윗이 용맹을 떨치게 되자 세상 여론이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라"고 했습니다. 이 여론에 몸이 달은 사울은 충복인 다윗을 죽이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쫓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치 않았으며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께 묻지도아니하고 신접한 자를 찾아가 물으며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의는 식욕처럼 계속해서 발동해서 지속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과식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끔 과거에 잘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러나 과거는 과거이지 현재나 미래는 아닙니다. 현재에 잘해야 하고 그리고 미래까지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과거의 잘못하고 실패한 것 때문에 분노, 울분, 미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과거의 포됨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어제의 강물은 오늘의 강물이 아닙니다. 또한 오늘의 강물은 내의 강물이 될 수 없습니다. 강물을 날마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강물을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것이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과거는 흘려 보내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는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배부름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목자가 가축을 베불리 먹여 살을 찌우듯이 주의 양식과 음료 먹여 살찌우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리고 목마른 자처럼 갈급한 심령으로 구하고 찾고 두그리면 결국 언젠가는 만족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인생살이든 신앙생활이든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 그런 신앙인을 하나님께서는 만족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정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열정적인 영성의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사업도 학문도 신앙도 사랑도 열정이 있어야 성공합니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제발 열정을 가지십시다. 

  하나님은 요행을 바라는 자들을 만족케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라지도 않고 원치도 않는 이들을 만족케 하시지 않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심령으로, 그런 상태와 자세로 그런 생활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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