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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디자인하시는 예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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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두 사람이 비행기에서 창가 좌석과 그 옆 좌석에 않았습니다.  이륙 직전에 변호사가 그 옆 통로 좌석에 앉더니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발가락을 옴지락 꼼지락거렸습니다.
조금 후에 "나 콜라 가지러 가야겠는데요"라고 창가에 낮은 의사가 말했습니다.  "내가 갖다드리리다"라고 변호사가 말했습니다.
변호사가 자리를 뜨자 의사 한 사람은 변호사의 신발 한 짝을 집어들고는 그 속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가 돌아오자 다른 의사가 "나도 콜라를 마셔야겠어요"라고 했습니다.  변호사는 다시 콜라를 가지러 갔고 그 사이에 그 의사는 변호사의 신발 다른 짝에 침을 뱉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할 무렵 변호사는 신발을 신었고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차렸습니다.  그 때 변호사가 아주 절규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 미워해야 합니까?  신발에 침을 뱉고, 콜라에 오줌을 타는 짓을 해야 하느냐 말입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무릇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사탄이 일으키는 모든 격동하는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잠재우십시오.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고, 미움과 좌절이 일어나는 것은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뿌리는 가라지입니다.

이 시간 성령의 능력으로 감화와 감동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쓴 뿌리와 가라지들이 성령의 불로 완전히 소멸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은 신앙이 무엇입니까?  정말 깊이 있는 신앙을 가졌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삶의 고난이나 문제 앞에서 방황하고 반발하고 슬퍼하지 않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격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생명체의 본질이 성장이라고 한다면 성장의 특성은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변화의 사건을 기대하십시오.  기억할 것은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말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십시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은 좋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나왔기에 점점 더 많은 논쟁만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무수한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나왔던 사람들은 다 해결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결코 짧지 않는 제 인생 경험에서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일에 실패한 민족과 가정과 개인은 그 결과가 언제나 불행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인도를 탐내고 열망했던 개인과 가정과 민족은 역사에서 크게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결국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도하심과 사랑하심을 탐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인 제 눈에 비쳐지는 안타까움은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 받기를 정직하게 열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환경 앞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는 믿음의 졸자들이 되지 마십시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인생의 잡다한 일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만을 정직하게 받겠다고 열망하는 사람은 지금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그 권능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행위를 하러 이곳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러 나온 것입니다.  보다 더 많이 알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을 맛보아 누릴려고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언제 종교 지식을 전달하신 적이 있습니까?  결단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이곳 교회도 종교 지식의 전달기관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안 다음에 모든 학문을 배설물과 같이 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만 학문을 알려고 하십니까?  신앙은 학문이 아닙니다.  신앙은 얼마나 많이 아느냐 하는 앎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누리느냐 하는 누림의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능력을 누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어느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목회를 하다가 큰 문제 거리를 만났습니다.  금요 기도회 시간에 교인들끼리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도 시간에 절반 정도의 사람들은 일어섰고, 나머지 교인들은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맞은 편을 향하여 자기들이 교회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고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설득하고 말려도 양측의 대립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젊은 목사님은 이 교회의 개척 창립 멤버인 99세 된 성도 한 분을 만나기 위하여 양로원에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이 할아버지 교인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할아버지, 기도 시간에 회중들이 일어서는 것이 이 교회의 전통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 중에 앉아 있는 것이 전통이겠군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니,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 교회의 전통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때 할아버지 교인이 이렇게 대답을 하시더랍니다.  "우리 교회의 전통은 절반은 서고, 절반은 앉아서 서로 고함을 지르는 것이 전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예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내 입맛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맛대로 드려야 합니다.  전통적인 방법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몇몇 교우들과 함께 D12 컨퍼런스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는 전국에서 8천명이 넘는 교인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가운데 제 판단으로는 대략 3분의 2 이상이 일반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3분의 1이 목사님들과 장로님, 그리고 권사님들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침 9시부터 늦은 밤 11시 가까이 딱딱한 프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8천명이 넘는 교인들을 보면서 한 마디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마산에서 새벽 3시에 달려오는 사람들이 과연 제 정신이겠습니까?  공부를 하란들 그렇게 하겠습니까?  돈을 벌란들 그렇게 하겠습니까?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친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에 미친 것은 축복입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완전히 미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와 복음에 내 인생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커다란 영적 갈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시간 시간마다 일어나서 눈물이 콧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으로 박수치고, 춤을 추면서 온 몸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그들의 가슴속에는 은혜로운 예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은혜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어려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저들 가슴속에는 은혜 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 편으로 우리 교우 여러분들을 향한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감사한 생각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왔습니다.  은혜로운 예배의 분위기와 영감있는 선교단원들의 뜨거운 찬양.  그에 비해서 너무나도 초라한 개척교회의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너무 너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여러분들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제 마음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오 목사야,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의 토양이 중요한 거다.  저들의 심령에 성령의 불이 임하면 한 사람이 백을 당하고, 백이 만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시는 예배를 꿈꿔라."

저는 이 한 말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더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복음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이 디자인하시는 예배를 꿈꾸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디자인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첫째로,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예배는 거룩한 영적 변화를 갈망하는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저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마음의 토양 작업을 시작하십시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기 때문에 환경을 전혀 도외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드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형식화된 자신의 사고의 틀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고의 틀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지구상의 문제는 강자와 약자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강자와 약자의 문제가 아니라 빠른 자와 느린 자의 문제입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20%만이 변화에 적응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20%의 소수가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80%는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예수를 믿어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변하지 않는 평신도는 병신도입니다.  그들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하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와 변질을 구분하십시오.  변화한다면서 추하고 더럽게 변한다면 그것은 변질입니다.  우리는 변질되면 안됩니다.  그러나 변화는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월에 따라서 건강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야만 합니다.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야만 합니다.

건강한 성도와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건강하게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수용해야만 합니다.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 가치관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변하면 성품이 변합니다.  가치관이 변하면 인생의 비전이 보여집니다.  가치관이 변하면 기적을 낳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마음의 변화를 거부하지 마십시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마음이 굳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누가 변해야 합니까?  니가 변해야 합니까?  당신들이 변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내가 변해야 합니다.

알콜 중독자를 둔 한 아내의 글이 있습니다.  "수 년 동안 저는 저자신의 노력으로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천성적으로 저는 의지가 강했고 제가 원하는 바를 위해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목욕탕 속에서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씻겨야 하며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 뒤로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위해 헌신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도 서서히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내 가정이 삽니다.  내가 변해야 내 교회가 살고, 이 민족이 삽니다.

보십시오.  나사로가 변화되니까 나사로 때문에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웨슬리의 변화는 교회를 변화시키고, 영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칼빈의 변화는 스위스를 변화시켰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120명의 성령 체험은 예루살렘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나의 변화가 없이는 결코 타인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화목해 집니다.  내가 변하면 우리 나라 좋은 나라가 됩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변화의 출발점은 바로 나 자신부터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예배는 예배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어디에 좋은 설교가 있을까?  어디에 은혜로운 예배, 좋은 예배가 있을까?  가슴마다 예배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감동과 축제가 넘치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 예배는 전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시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형식과 제도를 중요시하는 예배는 내용은 간 곳 없고 빈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때문에 예배에 대한 감격과 감동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내 입맛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디자인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리지 않고는 이 어려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림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만지심을 간절히 사모하고 열망하십시오.  예배 속에서 임하시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제한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곳에 왜 왔습니까?  우리는 예배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곳에 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지 마십시오.  제한하지도 마십시오.

목사인 저는 지금까지 제도와 형식에 얽매인 예배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것이 가장 건강하고 바람직한 예배인 줄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가장 문제 거리를 만들지 않는 안전한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더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제가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제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이상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서 다짐을 했습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역사하도록 나를 성령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자주 축복의 안수기도를 해 드리고 있습니다.

혹여, 저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못마땅해하시는 분들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상하고 의아한 눈으로 보는 분들이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통 교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예배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한 전통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제도주의가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는지를 아십니까? 솔직히 원초적 전통주의는 예배의 양식이 없었습니다.  모든 예배 시간 시간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예배 속에서 방언이 터지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저도 안수 기도를 해 드린다는 것이 제게도 엄청나게 힘이 듭니다.  지난 주일에는 안수 기도를 해 드린 후에 기진맥진했습니다.  온 몸은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땀으로 젖었습니다.  꼭 이래야만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용솟음 치고 있음을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나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영적 아비의 마음으로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성장에도 지름길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  그렇습니다.  영적 성장에도 지름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갈망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시는 예배에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시는 예배는 온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다시 말해서 새생명을 얻은 믿음의 백성들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도구로 우리의 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마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외모가 아니라 언제나 중심으로 사람을 보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너희 몸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몸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명절이 되면 객지에서 생활하던 자녀들이 시골에 계신 부모임을 찾아갑니다.  손에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찾아가서 절을 올립니다.  그러면 뭘 싸왔니?  선물 보따리를 먼저 풀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얼굴을 살펴봅니다.  객지생활에서 병이나 들지는 않았는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며 고생을 하지는 않았는지.  아이들은 속을 썩이지 않는지.  자녀들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에 찾아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을 살펴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 집에 올 때에 우리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 얼굴이 예배하고 싶어합니다.  손을 들어 기도하고 찬송하므로 우리의 손도 예배하고 싶어합니다.  손뼉을 치며 찬송할 때 우리의 몸이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성령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을 요청하며 우리의 온 몸이 예배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리에 앉아서 '거룩 거룩 거룩'을 부르면서 경건의 모습을 가장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부흥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거룩을 외치지 않습니다.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서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찬양하며, 온 몸으로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예배는 다윗과 같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그런 살아있는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생명선입니다.  예배는 나무의 뿌리요 시계의 태엽이요 베터리입니다.  예배를 떠나면 생명줄이 막히기 때문에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날마다 영혼이 시들어 갑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 죽어 가는 꽃처럼 시들어 갑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도 짜증날 정도로 삶이 흐트러져 버립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예배에 승리하는 사람들, 주님 전에 나올 때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왔으나 하나님이 맡아주는 통쾌함을 경험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아픈 상처를 가지고 왔으나 피묻은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쓰다듬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어루만짐 당하고 붙들림 당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싱싱하게 살아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여기에서 '권하노니'라는 말을 어떤 영어에서는 '팔을 비틀어서라도'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기를 게을러 하고, 예배로부터 멀어져 있을 때에 팔을 붙들어서라도 다리를 묶어서라도 다리를 꺾어서라도 예배하는 자리에서 은혜 받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만큼 하나님은 우리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원하십니다.

왜요?  예배 안에 풍성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내 삶이 거룩한 삶으로 바뀌어 지겠기 때문입니다.  예배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에 은혜가 되어야 가정 살이에 은혜가 됩니다.  예배에 성공자가 되어야 사업에 성공자가 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 앞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예배 속에서 임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여기에서 '드린다'라는 말은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에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이미 짤라놓은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 이미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로 짤라놓은 시간이었습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 내 몸이 다른데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끝난 존재들이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다른 계획을 세울 어떤 여지도 없습니다.  이미 짤라 놓은 몸이었습니다.

산 제사로 드리라는 또 하나의 의미는 최상의 상태, 최상의 조건으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내 몸의 컨디션을, 내 마음의 컨디션을, 내 영혼의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몸 그대로 주님 앞에 달려나오기보다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리고 몸을 단정하게 하고 주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토요일부터 몸과 영혼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정성스럽게 예물을 준비하고 돌보고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에 나아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예배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가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제물을 주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배가 주님 앞에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제물만 버림받은 게 아닙니다.  가인이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인만 버림받은 게 아닙니다.  가인의 가족이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인의 가족만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자손 만대가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배에서 내가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셔야 합니다.  예배로부터 버림을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아벨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물이 열납 되어졌습니다.  아벨이 열납 되었습니다.  아벨의 가족이 자손만대가 주님 앞에 열납 되어졌습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 결과가 무엇입니까?  1절과 2절 사이에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이 되었습니다만 원문에 보면 '카이', '그래서'라는 말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라.  그러면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2절은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통나무라도 죽은 나무는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피래미 새끼 한 마리라도 살아있으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은 영혼들은 썩을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아갑니다.  마귀의 유혹대로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배의 성공자들은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역사를 거슬러서 살아갑니다.  시대의 가치관을 거슬러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늘의 가치관을 품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예배에 성공하지 못하면 모든 삶의 중심에 내가 서 있습니다.  모든 판단의 중심에 내가 서 있습니다.  모든 가치의 중심에 내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성공하고 나면 중심 축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의 축이 달라지게 됩니다.  비전이 이끌어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청년이 월요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문을 뻥뻥 차면서 소리를 질러댑니다.  관리 집사님이 와서 "왜 이러냐?"고 물었더니 "하나님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  "오늘 예배가 없어요."  "나 하나님 만나러 왔다구."  "하나님!"  불러댑니다.  관리 집사님이 얼떨결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분, 여기 없어요.  하나님, 여기 없어요.  빨리 가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하나님이 없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예배를 드리고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 가정이 하나님 없는 가정이면 어쩌자는 겁니까?  하나님 없는 셀 모임, 성령의 임재가 없는 셀 모임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제도와 전통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디자인하시고, 하나님이 만지심의 역사가 있는 예배를 사모하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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