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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못난이의 고백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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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제가 잘 아는 사모님에게서 재미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유난히 조개 국을 좋아했는데 그 중에도 조개 국에 들어있는 조개의 뽀얀 속살을 먹을 때가 가장 맛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혼 때 조개 국을 자주 끓여먹곤 했는데 남편 최 목사님은 늘 자기 국에 들어있는 조개를 건져 사모님에게 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왜 자꾸 나 줘요? 당신도 먹어요.” 하면 목사님은 늘 “난 국물만 좋아하지 조개는 싫어해”라고 대답했다는군요. 그래서 사모님은 목사님이 정말 조개를 싫어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집에 오셨는데 사모님이 조개 국을 끓이니까 “최 목사 그릇에 조개 좀 많이 넣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모님은 “어머니, 최 목사는 조개 안 먹어요.” 했지요. 그랬더니 시어머니는 정색을 하면서 “얘, 무슨 소리냐? 우리 최 목사가 얼마나 조개를 좋아하는데?”라고 말씀했답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도 어떤 상황인지 눈치를 채야 합니다. 그래도 아직 못 알아듣는 어지간히 눈치 없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굳이 설명을 하겠습니다. 목사님이 왜 “나는 조개 싫어해”라고 하면서 부인에게 조개를 건져 준 것입니까? 정말 싫어해서가 아니지요? 자기도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부인이 워낙 좋아하니까 나는 싫어한다고 거짓말 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 나도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안 먹고 심지어 “나는 싫어한다.”며 거짓말까지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얼마든지 거짓말쟁이도, 바보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을 하게 되면 얼마든지 나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얼마든지 내 자존심이나 체면도 다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체면 따지고 자존심 세우면서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고 낮아질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약점투성이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이 고린도교회 성도에게서 받은 상처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후 2:5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읽습니다. “누가 나를 마음 아프게 한 일이 있으면, 실은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과장하지 않고 말하면, 어느 정도는 여러분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가운데 누군가 사도 바울의 마음에 큰 아픔을 준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는 일이 많은데 여러분,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성도들만 상처 잘 받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도 상처 받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이런 말을 종종 하는 분이 있지요. “나는 누가 뭐래도 바른 말을 하겠다. 목사님에게 바른 말 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냐?” 그러나 여러분, 목회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른 말’이 아니라 ‘격려하는 말,’ ‘힘이 되어주는 말’입니다. 특히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말로 인해 영적 지도자가 상처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린도교회에서는 누가 어떤 말로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것일까요? 고후 10:10에 보면 이들이 바울을 비난한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역시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봅니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별것이 아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는 그럴듯한데 직접 만나 말을 할 때는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말로 바꾸면 “우리 목사님은 글은 잘 쓰는데 설교를 너무 못해”라는 것인데 이것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설교가 가장 중요한데 성도들 사이에 설교가 약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면 목회자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바울도 이런 문제가 구설수에 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비난이 11:5에 나오는데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라는 말을 볼 때 고린도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베드로나 요한 같은 다른 ‘큰 사도들’에 비해 권위가 떨어진다는 비난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사도권’의 문제 때문에 죽을 때까지 시달려야 했습니다. 바울 서신 13권 곳곳에 이 사도권의 문제로 바울이 많은 비난을 받고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당시에 ‘사도’라고 하는 사람은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부르심을 받고 공생애 동안에 그 분과 한 솥 밥을 먹고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고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바울은 이런 조건에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적도 없고, 십자가나 부활은커녕 예수님 살아생전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바울인데 오로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것도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고 바울 혼자만 주장하는 일인데 오직 그 이유만으로 바울을 어떻게 사도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지요. 그래서 바울은 늘 베드로나 요한 같은 ‘당당하게 조건을 갖춘’ 사도들, 그래서 소위 ‘큰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비해 늘 사도권을 의심 받고 비난을 받아온 것이지요. 고린도교인 중에 바울의 설교가 너무 약하다고 비판하고, 나아가 사도 바울이 정말 사도 맞느냐는 바울의 가장 아픈 곳, 아킬레스건을 찌른 성도들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자,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바울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조금 전에도 교회에서 목회자를 비난하고 상처 주는 말을 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저도 짧은 목회경력을 통해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부목사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저의 교구에 속한 여 집사님 한 분이 아들이 군대에 가게 되었다며 예배 때 목사님 기도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그 아들에게 전화를 해서 이번 주일 몇 부 예배에 나와 목사님 기도를 받으라고 통보했는데 그 청년은 굳이 쑥스러워 안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받는 일을 취소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여 집사님이 전화를 해서 왜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기도를 취소했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이 안 나온다고 해서 취소한 것이지만 그래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기에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집사님은 계속해서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이럴 수 있느냐?”며 따지다가 급기야 “목사님, 그래가지고 목회 하겠어요?”라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실수를 해도 할 말과 안 할 말이 따로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부부싸움을 해도, 어떤 갈등이 있어도 이렇게까지 상대방의 모든 존재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 안 해보셨습니까? 교회 밖에서면 몰라도 교회 안에서, 그것도 늘 신앙생활 같이 하던 성도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특히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꼬집어서 인신공격을 해오면 정말 참기가 힘듭니다. 교회만 아니면 정말 어떻게 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밉니다. 물론 교회에서 배운 대로라면 참아야지요. 꾹 참고 용서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이라는 사실,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라야 말이지요. 인간적으로 너무 어렵습니다. 그 엄청난 아픔, 나의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꼬집는 치사함, 게다가 바울이 더 억울했던 것은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저 혼자 만났다고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믿어?”라며 내 인격과 신앙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입니다.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말인가? 내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우긴다는 뜻인가?” 내 인격과 자존심이, 존재가치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처참한 순간입니다. 아무리 목사라도,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이 정도까지 되면 정말 참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 나타나는 반응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붙어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이고 뭐고 없다. 억울하고 너무 화나니까 나는 더 심하게 비난하고 더 험하게 붙어 싸운다”는 ‘막가파’ 식 반응입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니까 어떻게든 변명을 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 마디로 ‘자기 변호형’ 반응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기변호

사도 바울은 이 가운데 두 번째 방법을 씁니다. 자기변호 방법입니다. 아니, 적어도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11:22~29과 오늘 본문인 12:1~6까지만 읽어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비난에 직면하여 자기 자신이 다른 사도들에 비해 얼마나 인간적으로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인지 열심히 설명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도는 나하고 상대가 안 된다. 내가 얼마나 좋은 배경과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 봐라.”는 뜻입니다. 고후 11:22~29를 보면 마치 사도 바울의 이력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 사도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나도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 사람이다. 나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누구보다 더 수고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고생한 것으로 따지면 나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태장을 세 번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다. 복음 전하는 여행 중에 수많은 위험과 죽을 고생을 겪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이래도 내가 그들보다 떨어지는 사도냐?” 여기 말고도 빌 3:5~6에도 이런 바울의 이력서가 나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는 당대 최고의 유대교 랍비라고 하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로마 시민권까지 가진 사람입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엄청나게 좋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까지 잘 해서 명문대학을 장학생으로 나와 박사학위 서너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오늘 본문 1절부터 볼까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아주 놀랍고 신령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말하는데 그 사람이란 다름 아닌 사도 바울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영적 체험을 했다는 사람이 있고, 천국이나 지옥에 가보았다고 간증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도 바울도 그런 놀라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는 2절에 보면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다 왔노라고 말하는데 이 셋째 하늘, 즉 ‘삼층천’은 오늘날 말로 바꾸면 낙원 혹은 천국입니다. 한 마디로 환상 중에 천국 갔다 오는 입신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명문 집안에, 최고의 석학에, 신앙생활까지 잘 하는데 심지어 환상 중에 천국을 갔다 오는 놀라운 체험까지 한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완벽한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나 이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다. 베드로 요한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나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조건은 화려하다.”고 자기변호를 열심히 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울은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세속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스스로 바보가 되다

하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컷 자기의 인간적인 조건을 이야기 한 다음 “나도 너희들만큼, 아니 너희들보다 더 잘났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못난 모습과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즉 이런 조건들을 지닌 사람으로는 자랑할 것이 많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왜 이렇게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약해져서 자신의 못난 모습과 연약함만 자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7절부터 나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육체의 가시란 아마도 어떤 큰 병, 즉 간질병이나 심한 안질이 있어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다른 조건은 다 완벽한데 오직 병 하나로 인해 바울은 정말 큰 불편을 겪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이 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렸습니다. 이 병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다고 고쳐달라고 했겠지요. 이 정도 되면 고쳐주실 만도 한데 돌아온 대답은 “그래, 내가 고쳐주마”가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9절)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으로 족하다, 안 고쳐주시겠다”는 뜻이니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런데 이 체험을 통해 사도 바울은 정말 엄청난 진리를 하나 깨닫게 됩니다. “왜 안 고쳐주시나? 내가 다른 일도 아니라 하나님 일 하는데 방해 된다고 고쳐 달라는데 왜 안 고쳐주셔?”라고 불평하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이 질병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려고 주신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의 인간적인 조건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정도면 모든 사람이 당연히 교만해지게 마련입니다. 잘못하면 복음 증거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잘나고 똑똑해서 하는 줄 착각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인간적 조건이 좀 좋다는 사람 중에 이런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만 받으실 영광을 제 스스로가 대신 받으려 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그 좋은 조건 모두 빼앗기는 일까지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도 만약 이 육체의 가시가 없었다면 나도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육체의 가시가, 그 질병이 가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0절에서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정말 강한 사람은 인간적인 조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 스스로를 낮출 줄 하는 사람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 같으면 애써 감출 그 육체의 가시, 자신의 가장 약하고 아픈 부분까지 주저하지 않고 드러냅니다. “나는 결코 잘 난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못나고 약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 크게 쓰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에 나는 진정 강한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강한 것은, 우리가 귀한 것은 절대 우리 자신이 인간적으로 강하고 귀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못나고 약하지만 우리 안에 너무도 귀한 분이 계시기 때문에 강하고 귀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던 사도 바울은 고후 4:7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못나고 약한 질그릇이지만 내 안에 참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나는 보석함처럼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정말 못나고 약해서 자기를 질그릇이라고 고백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정말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하지만 육체의 가시라는 경험을 통해 내가 겸손해지고 스스로 약한 자, 못난 자가 될 때에만 내 안에 계신 보배 예수님이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스스로 약해지고 낮추는 겸손한 사람을 찾아 쓰십니다. 왜 잘 났는데도 스스로 못난이 바보가 됩니까? 조개 국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못난이도 될 수 있는 것처럼 내 안에 계신 보배로운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기에 나는 낮아지고, 기꺼이 바보 못난이가 되고, 나는 스스로 사라지고 예수님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기꺼이 스스로 못난이가 된 사도 바울의 고백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스스로 잘난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바보 못난이가 될 각오가 된 사람들입니까?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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