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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히 이기리라 (민 13: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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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는 사학법개정으로 인하여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의 이름이 사학법개정을 반대하는 어느 단체의 성명서에 저의 동의 없이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사학법개정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학법개정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생각과 소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생각과 소신을 공적으로 표현할 때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와 같은 행동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면 최소한 당회에서 그와 같은 것을 결의한 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곧 교회인양, 내 생각과 입장이 곧 높은 뜻 숭의교회의 생각과 입장인양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겠지만 제가 가장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은 사학법개정이 이루어 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는 토론과 논쟁의 후진국으로서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폄하하며 자기가 가진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생각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다 나라 망칠 매국노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흐리멍텅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제가 보기에 사학법개정을 찬성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면을 양쪽에서 다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면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그 서로 충돌하고 염려가 되는 면을 줄이려고 서로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학법개정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사학법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이기주의자들이기주의자들이고 학교를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파렴치한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몇몇 사학의 부정을 전체적인 사학의 부정으로 매도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 경제적으로 볼 때 별 생산성이 없는 사학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생각과 사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사학법개정을 소신껏 사학을 운영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학교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숭의학원이 과거 왜정 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학교 문을 닫은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었고 용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사립학교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 미션 학교들의 경우 이번 사학법 개정으로 인하여 학교 설립의 궁극적인 목적인 기독교 교육을 원칙적으로 할 수 없게 된다면, 학교를 국가에 넘기고 손을 떼겠다는 분들의 주장을 절대로 지나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립학교에 대한 국가의 힘이 너무나 커서 제대로 저항한번 하지 못하고 굴복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별로 건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기독교사립학교에 대한 뜻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를 세우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머지않은 장래에 기독초등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기도하고 있는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교회의 담임목사인 저로서도 이번 사학법 개정의 문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있는 그런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학법개정안 중에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방형 이사 제도에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너무 안일하게, 낭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반성을 좀 더 해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서 저는 과연 개방형 이사 제도 때문에 기독교학교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은 저는 만장일치나 일사천리와 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민주적인 언어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비민주적인 것은 편한 듯 싶어 보이나 결국 인간과 조직을 나약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제게 권면해 주신 말씀 중에 하나가 당회를 만장일치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은혜스럽게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원칙적으로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장일치가 정말 은혜스러운 것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은혜스러운 나라는 북한일 것입니다. 100% 출석에 100%의 찬성으로 100%의 문제를 처리하는 나라가 북한입니다.

성숙한 나라들의 토의 문화와 법칙에 의하면 만장일치는 무효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장일치는 무효라는 말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와 서로 다른 사람과의 토론과 심지어는 다툼을 통하여 자기의 부족한 면을 채워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보다 성숙하고 완전한 결론을 도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든 학교든 사회든 건강한 조직을 운영하려고 하면 자기와 똑같은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그와 같은 조직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직을 운영하기는 쉬우나 그것이 조직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노무현정부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싫어하는 말은 ‘코드 인사’라는 말입니다. 코드가 같은 사람끼리 모여서 일을 하면 해피 할 것 같지만, 그것이 나라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 중에 한 분이 독립교회를 하고 계십니다. 독립교회 중에서도 당회 없는 독립교회를 하고 계십니다. 전에 시무하시던 교회에서 당회 때문에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많은 고통을 격으셨기 때문에 새로 목회를 시작하시면서 아예 당회라는 조직을 없이하신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그렇게 운영할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한번도 당회 없는 목회를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타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당회 때문에 한번도 고통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라고 혹시 생각하실는지 모르나 많은 분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회와의 갈등을 누구 못지않게 격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격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저는 그와 같은 갈등과 어려움 때문에 개인과 교회가 더 좋아졌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다음에 기독교학교를 운영한다고 할 때 일부러라도 개방형이사제도를 도입하여, 혹시 저들 때문에 좀 더 힘들게, 좀 더 어렵게, 좀 더 천천히 학교를 운영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결국 그 때문에 내가 목적 했던 대로의 학교를 운영할 수 없어서 학교를 포기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나와 같은 뜻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이사를 삼아 학교를 일사천리로, 만장일치로 운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저의 걱정과 염려 중에는 우리 교회가 지금 너무 편하다는데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이 팔자 좋은 소리 때문에 소원대로 되어 목회가 좀 힘들어 지고 어려워진다고 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편해지면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힘들어질 때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기독교사학만해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사학이 가장 기독교사학 다웠던 때를 저는 왜정시대 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외가 많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오히려 기독교사학이 마음껏 반대 세력 없이 거의 족벌체제로 운영이 될 때 기독교사학은 가장 나약해 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땅에 많은 기독교사학이 있지만, 왜정시대 때의 숭의 학원과 같이, 아니 왜정 시대 때의 모든 기독교 사학과 같이 정신이 살아있는 기독교 사학이 과연 이 땅에 여러분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사학을 위하여 개방형 이사제도를 반대하지만, 저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사학을 위하여 개방형 이사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도 안 된다고 하는 개방이상도 설득하지 못하고 그 실력으로 어떻게 기독교사학을 운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군대에 입대하는 둘째를 훈련소까지 데려다 주었었습니다. 차 뒤에는 둘째와 둘째의 친구가 둘이 타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야, 군대는 요령이래 집합하면 앞에도 서지 말고 뒤에도 서지 말고 가운데 숨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가가 말 참견을 하였습니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무슨 미꾸라지 새끼냐? 그런 약한 정신으로는 힘든 군대생활하기 어렵다. 집합하면 눈에 띄어 매 몇 대 더 맞는 한이 있어도 맨 앞으로 튀어나가” 그리고 계속해서 둘째에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군대에 아는 장성들이 많이 있지만 너 편한데 보내달라고 전화하지 않겠다는 것과 하나님께만 전화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좋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전화 많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둘째를 그렇게 큰소리치며 군대에 보냈지만 막상 아이가 훈련소에 들어가고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군대에 힘 있는 장성들 생각이 났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 전화했습니다.

제 전화를 열심히 받으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 둘째를 최전방 수색중대 유격조교로 보내셨습니다. 우리 둘째가 5월 달엔가 그 부대에 배치를 받았는데 1월부터 5월까지 힘들다고 두 명이나 자살한 부대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저희 둘째가 제가 한 말을 명심하고 군대생활을 한 것 같았습니다. 얼마 후 둘째로부터 참으로 근사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빠, 유격 재밌어요” 그 말을 곧이들은 우리 막내는 군대에 가서 유격조교를 자원했습니다. 죽다 살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 중에 하나는 예레미야 12장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의로운 자의 길이 험하고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한 이유를 묻습니다.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의문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너무 근사합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하여 예레미야와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 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하나님의 질문 중에 하나님의 대답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말과 경주하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도 능히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을 과보호하시어 온실에서 키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물 속에도 집어넣으시고 불 속에도 집어넣으시며 전투적으로 키우시는 분이십니다.

니이체라고 하는 철학자는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존재라며 그와 같은 신을 자기가 죽였다면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면서 니이체는 초인을 주장하였습니다. 니이체가 이야기한 신 중에는 물론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미신적인 신에 대해서는 니이체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니이체의 말과 생각이 틀렸습니다.

미신적인 종교의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신은 우리도 죽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신들과 전혀 같지 않으십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온실에서 나약하게 과보호하시면서 키우시는 분이 아니라 물과 불속에서 강하게 연단하며 키우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꼬리를 내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붙어 싸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싸워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골리앗처럼 강하고 무서워 보여도,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다윗과 같이 담대하게 맞짱뜨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12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그 정탐꾼들이 모세와 백성들 앞에서 한 보고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 정탐꾼들의 보고는 아주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정확한 보고였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2-33)

그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볼 때 매우 정확하고 옳은 평가와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적으로 볼 때 옳은 평가와 보고가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들의 현실 이해와 세상 이해는 정확하였습니다. 상황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의 편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현실과 세상과 상황도 보았지만 보다 중요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올라가자고 말합니다. 도전하자 말합니다. 싸우자고 말합니다. 능히 이기리라 말합니다.

2006년 새해를 맞이하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가장 드리고 싶은 말씀 중에 하나가 지난주일 설교한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 중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들을 조옹하게 하고 한 말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연말을 보내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린 말씀 중에 하나는 2006년도 느낌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대부분은 ‘2006년도의 세상은 좀 덜 힘들어 지려는가? 환경과 상황이 좀 나아지려는가? 경기가 회복 되려는가? 정치가 안정되려는가?’와 같은 생각을 하셨을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세상은 세상 때문에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믿음 때문에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전을 통해서 입니다. 싸움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과 도전은 우리의 힘과 능력을 힘입어 하는 싸움과 도전이 아닙니다. 그러면 백전백패할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영의 싸움입니다. 믿음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는 싸움입니다. 골리앗에 대한 다윗과 같은 싸움입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항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같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항복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2006년 둘째 주일 갈렙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이 말씀이 오늘부터 저와 여러분의 평생을 주장하는 말씀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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