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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려신학교의 한국 교회사적 위치와 그 사명 (롬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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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라는 단어, 순종이라는 단어, 그 앞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믿음이 따라오고 순종이 따라와야 합니다.
칼빈주의 신학사상 가운데 대표적인 성경표현은 로마서 11장 36절이 대변합니다. 믿음(순종, 행위)이 바로 신앙과 행위의 일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교회 설교가 다른 교회 설교와 같다고 하는 사람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전혀 순수한 백지인 상태이든지(같은 사상의 신앙줄기이기 때문에), 둘째는 아니면 전혀 다른 사상이든지 입니다(혼합된 사상).
우리의 신앙노선은 어거스틴 신학의 계승이요 바울신앙의 부흥입니다. 고려신학교 제 60회 졸업식을 마치고 2006년 고려신학교 주일을 맞이하여 민족사적 입장에서 3단계로 고려신학교의 한국 교회사적 위치와 그 사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1884년-1910년까지 제 1기 26년간입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볼 때 한말에 찾아온 망국의 시기 곧 주권상실 시기가 있었습니다. 외부적인 이방종교와(① 허무주의 불교 ② 유교의 도덕, 철학 ③ 무당종교-운명론) 정치적으로 주권 상실의 패배감으로 정신적인 허탈감이 왔던 시기입니다.

2) 1910년 - 1945년 제 2기 36년간(일제 통치 기간 : 한일합방)입니다.
이 기간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내선일체의 사상 때문에 고통당했습니다.
일제의 신도주의는 내선일체를 하기 위함입니다.
일본인의 개인의 소장품이 경주 박물관 보다 더 많습니다. 저들은 묘지까지 파헤쳐 갔습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는 우국지사들의 노래입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면"은 불신자들에게는 일종의 애국가였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눈물 머금고"는 신자들의 노래입니다. 이러한 유행가는 신자나 불신자나 그 고통을 대변하는 것은 동일하나 불신자는 괴로움과 고통을 노래만 했지 처방이라는 단계가 없습니다. 불신자는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과 헤쳐 나갈 돌파구를 모릅니다.
당시에 성도들은 조선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기독신자가 고난당하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환난을 감수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고통을 같이 받았습니다.
스가랴 13장 7절에, 마태복음 26장 31절, 마가복음 14장 27절에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법입니다. 지도자를 치면 끝납니다(금족령, 거주제한, 찬송의 선곡, 설교선별). 법을 만들어서 위법하면 기독교 지도자를 투옥합니다. 주일에 근로 동원 합니다.
각 교단 통폐합(일제 시대에 사용하던 말이다)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한국 기독교 박해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단체가 장로교회입니다.
감리교는 문서로 참배했습니다. 1938년에 제 27회 장로교 총회가 "신사 참배는 국가 의식이고 죄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총회 결정, 노회 결정이 중요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중요하지 아니했고 총회, 노회 결정이 성경보다 앞섰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Westminster 신도 개요서에는 "공의회가 과오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회개 안하는 것이 죄다."라고 했습니다.
문창 제일 교회는 10년 전 주기철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 시무시(경남 노회)에 신사참배는 죄니까 신사참배 않기로 가결했습니다. 이러한 정신 때문에 고려파에서 순교자가 많이 났습니다. 경남에서 박해가 심했습니다. 장로교가 갈라지고, 송도 앞바다에서 미소이바라이로 새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앞에 충성만 한 자는 국가에 대해 충성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의미에서 다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친일파 목사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시국강연을 했습니다. 환영식은 부산에서 평양까지였습니다.
신사참배는 절대 죄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의 '권세 잡은 자에게 복종하라'가 환영식의 주제였습니다. 미소이바라이를 주도한 목사는 특별대우를 했습니다. 예외 없이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목사는 환난을 당했습니다.

3) 제3기 1945년 8월 15일부터 지금까지 약 40년 동안 유물론 공산주의와 왕조역사에서 자유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시기였습니다.
기독교적 사상의 도전은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제 1기 시기는 이방종교의 도전입니다.
제 2기 시기는 군국주의 신도이즘입니다.
제 3기 시기는 민주주의, 다수주의 유물론적 공산주의가 40년 동안 대적했습니다. 그 바탕은 무신론 주의입니다.
나라를 잃고 갈 데 없는 우국지사들이 교회 앞에 모여서 망국의 한을 다스릴 때 저들의 가슴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저들은 나라까지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사랑, 애국애족이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나온 말이다."라고 했습니다. 일제는 천주교를 간단하게 굴복시켰습니다. 감리교는 간단히 넘어졌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볼 때 자유, 평등, 사랑, 이것이 무엇이냐?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결론짓고 기독교 중에서도 장로교라고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장로교회를 잡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평양신학교의 복구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천주교라는 산맥을 뚫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고려신학교는 당시 근본주의 신학운동으로 평양신학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는 1938년 폐교 되었습니다.
세계 여론을 감안한 나머지 일제는 종교 박해라는 말을 들을까봐 1939년에 태동되어서 1940년에 정식 발족한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마침내 일제의 비호 아래 자유주의 조선 신학원을 허락했습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박형룡 박사를 도전한 사람들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신학교를 허락한 일 자체가 범상한 일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해 온 사람들입니다.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1914년, 1925년, 1930년, 1934년 이렇게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 박형룡 박사는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만주 봉천 신학교에 있었습니다. 정통 선교사들은 추방당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국제적인 감각을 최소한 가진 자들입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에 조선 신학원이 개교된 뒤에 1945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일제는 1945년 8월 17일, 18일에 한국의 감옥에 있는 자와 반항자를 제주도에서부터 평안북도까지 수천 명을 다 죽이기로 특명을 내렸습니다(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죽이기로).
하나님께서 환난의 날을 감하시기 위하여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 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에 반대하지 못한 목사나 반대하고 감옥에 간 목사들도 모두 연대책임으로 하고 장로, 목사, 전도사 이상 자숙 기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자숙기간에는 강단에 서지 않고 자숙기간이 끝나면 새로 청빙하기로 결의 했습니다.
친일파 목사들이 이 자숙기간에 동조할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투표라도 한다 하면 신사 참배한 목사는 쫓겨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일로 진통을 겪고 있던 중 소련으로 인하여 서서히 38선에 검은 구름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승동 교회당에 모여 남부총회 38선 이남에 있는 목사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여기서 조선 신학원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신학원을 조선신학교로 개칭(1946년 4월 20일)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만주에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자들은 실권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결정한 목사는 다 친일파 목사들로 주로 교권 장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신사참배 못지않게 큰 죄악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장로회 이른바 기장측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두 번 죽었는데 신학적으로 한번 죽고 정치적으로 한번 죽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역사가 급회전 할 무렵 주기철 목사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남선(거창), 한상동(부산 다대포), 손양원 목사(마산 함안)는 성경을 생명시 하던 분들이었습니다. 이때 박윤선 목사님을 모시고 진해 경화동에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했습니다. 1946년 9월 20일 조선 신학교 설립 6년 후에 일신여상(금성 고등학교)에서 평양신학교의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고려신학교가 설립(박윤선 박사 교장 서리)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 신학교의 1차 분열이었습니다. 장로교의 분열은 조선신학교와 고려신학교의 분열이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와는 상관없이 ①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 ② '자유주의 신학이냐 근본주의 신학이냐'라고 하는 진리 문제로 갈라졌습니다.

고려신학교는 신행일치를 파수하는 순교적 정신으로 출발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행동적인 고백이 곧 예배, 주일 성수로 나타납니다. 바로 믿은 것이 곧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려신학교 사상입니다.
박해가 올 때는 멈추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행위가 죽음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음까지 이른 행위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행위가 따라와야 합니다. 고려신학교는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순교사상을 강조합니다.

남부 총회 안에는 경남노회가 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그곳에 속해 있었습니다. 조선신학교가 볼 때는 난데없이 사설 신학교가 하나 설립된 것입니다. 출옥한 무식한 사람들이 저런 일을 하고 있느냐 라고 서울 목사들은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경남노회에서는 서울의 조선신학교로 보내느냐 고려신학교로 신학생을 보내느냐는 것이 당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너희는 예배당 놓고 감옥에 갔지만 우리는 일본 사람들과 교회를 지켰다."는 것이 신사참배 목사들의 괴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석에서 "옥중 성도는 개죽음이다."라고까지 했습니다. 절대 다수가 믿음 없는 친일파 목사들과 뭉쳤습니다.
경남 전체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가 동조하니 그것이 고려파 탄생의 발단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1992년 6월 18일 템플톤(John Templeton)상을 받고 63빌딩 대강당에서 축하 모임을 하는 자리에 그분의 인사말 첫마디가 "나는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참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분의 이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옥중지도자들은 부산 태종대 일본 군사 기지 창고에서 두 달 동안 자숙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이 시무하는 초량교회 양승봉 장로(경남 도지사, 이승만 박사 양아들)가 한상동 목사에게 "너무하다고 했습니다. 적당하게 안하고 바리새인 독선주의자"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은 초량교회를 양승봉 장로님에게 맡기고 자신은 초량교회 주영문 장로님 사과 창고에서 예배했습니다. 이것이 삼일 교회 출범입니다.

당시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 목사님을 모셔 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s남영환 전도사를 보내기로 햇습니다. 당시 남영환 전도사는 주남선 목사 밑에 있었습니다. 박형룡 목사님은 남쪽에서 자기를 데리러 온 남영환 전도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박형룡 목사가 어떻게 남영환 전도사를 믿고 따라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후에 송상석 목사(일제 형사출신)가 다시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왔습니다. 박형룡 박사가 왔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조선신학교에 취임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마침내 박형룡 박사가 부산으로 내려와서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조선 신학교 학생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조선신학교가 이상했습니다.

① 모세 오경은 단일 저작이 아니고 ②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도 있고 사람의 말도 있으며 ③ 동정녀 탄생은 거짓말이라고 가르치니 이상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조선 신학교 학생들 중 50여명이 보따리를 싸가지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① 조선신학생이 보따리를 쌌다고 해서 나온 말인지? ② 이사를 너무 많이 해서 나온 말인지? ③ 너무 가난해서 나온 말인지 모르지만 당시 고려신학교는 보따리 신학교로 통했습니다.
자유주의는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은 믿는 데 정신적인 부활을 믿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부활은 믿지 않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초기 고려신학교 경건회 시간에는 한국 교회가 지은 공죄로 우는 학생들 때문에 오후 수업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S.F.C. 출발입니다. 신학생이 우니 목사가 울고 장로가 울고 집사가 울고 학생들이 울게 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신학생들이 서울에서 오긴 왔는데 서울 학생들은 고려신학교에 적응하기에 힘들었습니다. 박형룡 박사가 영향력 있는 자유주의 비판의 글을 썼습니다. 한국 교회는 대단한 파동이 있었습니다. 박윤선 박사가 파숫군을 통해 한국교회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 박형룡 박사와 한상동 목사와의 신학교 운영에 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박교장은 서울로 옮겨서 불을 붙이겠다고 했습니다. 한목사님은 신학교가 멀다고 해서 안 되는 것은 아니니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서 신학교를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미국 북·남장로교 선교부, 호주 선교부, 캐나다 선교부에 원조를 받자고 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은 과거에도 자유주의 신학교의 돈을 받으니 자유주의 신학으로 넘어 갔다고 하면서 자유주의 단체에서 오는 돈을 받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와서 볼 때 당시에 한상동 목사는 장소를 옮겨야 했고 박형룡 박사는 잘못되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1948년 4월 봄 학기에 장로회 신학교(사당동 총신대학 전신)를 세웠습니다. 광나루 장로회 신학교는 1960년도에 넘어와 가지고 세워진 학교입니다(통합측).

사당동 신학교와 고려신학교의 차이는 대답하기 어려우나 행정문제입니다. 신학이 정통이냐 그러면 행정도 정통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 계통의 달러는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이지만 큰 것입니다. 남부 총회의 조선 신학교, 박형룡 박사 신학교가 한 지붕아래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리가 되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1970년 12월 31일부로 죽었습니다. 고려신학교가 고신대학으로 승격한 것입니다. 이때 고려파내에 교단 주도권문제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송상석 목사는 교단 실권을 갈라서 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130여 교회가 세상 법정에 가자고 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상동 목사님이 고소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산 경남노회 130여 교회가 교단을 나가는 것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의 주석은 불신자와 신자는 소송 가능하지만 신자와 신자간의 불신법정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미 이것은 1953년도에 문제가 된 사건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고린도전서 6장 1절에서 11절을 해석했습니다. 첫 번째 희생타가 박윤선 박사였습니다. 송상석 목사는 한상동 목사를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박윤선 박사는 한상동 목사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도 하지 말고 송상석 목사는 나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박윤선 박사는 서울로 올라가서 박형룡 목사님과 함께 합동신학교를 개교했습니다. 참으로 고려신학교는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총회적으로 결정한 것을 결정하지 아니하고 송상석 목사를 처리하는데 시간을 끌고 있으니 박윤선 박사가 탈퇴했습니다.

1973년도에 고신대학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 목사와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헤게모니(Hegemonic, 정치운동에 있어서 주도권 싸움) 싸움입니다.
명분과 재산권 문제 때문입니다. 마침내 한상동 목사측의 교수들이 고소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소송할 수 없다하는 석원태 목사는 본의 아니게 송상석 목사의 주장을 따르게 된 셈이 되었습니다. 반대했다는 이유로 소송해도 좋다는 한목사와 고신 교수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 마산 송상석 목사측은 석원태 목사가 자기 주장을 변호한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석원태 목사는 한상동 목사를 배신하고 송상석 목사편이 되었다고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던 고려신학교로 되돌아 올 때까지 본 회원은 탈퇴합니다 하고 석원태 목사는 경향교회를 행정보류하고 탈퇴했습니다. 그 후 서울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했습니다. 이 때 반고소는 우리의 전매특허품이 아니라고 하면서 반고소에 뜻을 가진 자는 뜻을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이 말이 전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산측 송상석 목사측에서 합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반고소와는 동상이몽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2년이 못되어서 우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학교가 바로 오늘의 고려신학교입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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