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울을 벗어라 (출 33:21~23, 고후 3:14~17, 눅 9:28~31)

  • 잡초 잡초
  • 474
  • 0

첨부 1


제가 지난 번 설교했던 1월 두 번째 주일은 주현절이 시작되었던 날입니다. 주현절이 시작된 날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다음 주일은 주현절이 끝나는 주일로,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위에 올라가서 얼굴이 변모했던 날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여성학자 도로테 죌레는 예수님의 일생을 ‘왕로(가는 길)’, 즉 요단강에서부터 산에서 변화한 것과 ‘귀로(돌아오는 길)’라고 표현한 광야의 시험에서 십자가의 죽음까지의 고난의 길,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그의 얼굴과 옷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와서 서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너무나 기뻐서 이 세분을 모시고 속세를 떠나서 영원히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곳에 장막 세 개를 짓고 세 분을 모시고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 ‘너희는 내 사랑하는 아들의 말만 들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야와 모세는 사라져 버리고 예수만 혼자 남았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종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광야로 데려나오고, 호렙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가장 하나님 가까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 온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섬겨 온 하나님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던 야훼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명상, 가부좌, 기도를 하고 결국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전에는 볼 수 없습니다. 상향적이 아니라 하향적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의 깊은 본능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은 종교적인 리비도(libido)가 있습니다. 이런 본능으로 여러 가지 종교가 발생했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되어 과거에는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우주공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노공학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매우 작은 것들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은 볼 수 없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 앞에 나타났고, 예수의 얼굴이 햇빛처럼 빛납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의 얼굴이 보여진 것입니다.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logos)에 의해 창조되고, 율법이 주어지고, 예언으로 나타났지만, 그 말씀이 나타난 것은 바로 ‘예수’입니다. 즉, 로고스가 성육신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조차 그 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 보면 빌립이라는 제자가 예수께 하나님을 한 번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는 이에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구원의 역사를 받기 위해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1)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말씀이 예언만 했던 구약, (2)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에 대한 복음서, (3)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인 사도들의 증언, 이 세 가지를 합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고, 예수의 사건도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라디오나 TV에서 유명한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을 때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이루어진 구약의 약속, 예수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는 복음서의 말씀, 그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말해주는 사도서신을 모두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개 성경을 한 군데만 읽는데, 이런 설교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이나 율법은 마태복음 5장 17절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가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장막을 짓고 세 분을 모두 모시고 싶다고 하자, 모세와 엘리야는 사져 버리고 예수만 남았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산에서 모시고 살면서 속세를 떠나서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것,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고 신비한 무엇을 보고 좋아만 하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는 산에서 환하게 빛난 후에 결국 산 아래로 내려와 수많은 고난의 길을 걷고, 햇빛처럼 빛나던 얼굴은 십자가에서 피땀으로 얼룩진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기독교신자 중에는 세속을 떠나서 산 속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 세상 속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만 지는 운동권의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반쪽 신자들입니다. ‘왕로’와 ‘귀로’를 함께 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이러한 성경의 진리를 보면서 가장 잊지 못하는 사람이 미국에서 흑인해방운동을 해다가 총을 맞아 죽은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그가 노예취급 받는 흑인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워싱턴을 향해 20만 명의 흑인들과 함께 행진을 했습니다. 그때 했던 설교의 제목이 ‘나는 변화산에 다녀왔다’입니다. 나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흑인들을 이대로 둘 수 없고 이들이 백인들과 얼싸안고 노래하는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 행진해 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그 길에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전민족적으로 그의 생일을 공휴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에는 전직 미국 대통령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얼싸안고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설교를 하며 미국의 역사를 만들던 이 킹 목사의 정신은 미국에서 아직까지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던 바로 그 변화산 꼭대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햇빛같이 변했던 예수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얼굴에서 나오던 태양 같은 빛을 내가 받아들일 때 내가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여러분께서 이곳에 오실 때와 나가실 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예수의 햇빛 같은 얼굴을 보고 그 빛을 받아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이 빛은 어떻게 반사됩니까.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이 빛을 받을 때 얼굴에서 너울이 벗어진다고 했습니다. 너울을 쓴 얼굴은 생각은 완고해져서 모세와 옛 약속인 율법을 읽을 때 그들의 말이 그 너울에 벗겨지지 않으며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다고 할지라도 크리스천이 아닌 것은 얼굴에 너울을 벗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린도후서를 쓴 사도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율법학자였습니다. 그가 율법을 깊이 공부하다보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없애버리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나 눈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면서 율법을 통해서 보던 예수에서 환하게 변화된 그리스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신약성서의 13개 서한을 쓴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경동교회 이 자리에서 빛나는 예수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 증거는 내 얼굴의 너울이 벗겨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너울이 벗겨지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입니다. 내 삶의 초점은 변화산에서 환하게 변한 예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얼굴이며, 이 빛이 반사되면서 내 너울이 벗겨집니다.

너울을 벗었다는 의미는 자유가 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랑이 생깁니다. 내가 내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봐서는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내 너울을 벗고 예수 얼굴의 빛에 반사된 눈으로 볼 때에 비로소 사랑과 평화가 생겨납니다. 예수의 태양빛 같은 얼굴, 겟세마네동산에서 피 흘리던 얼굴, 갈보리산에서 가시관을 쓴 얼굴은 결국 부활로 나타납니다. 환한 하나님의 얼굴로 나타나서 승천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주전체가 그의 죽음, 부활,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되어지는 ‘우주적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꽃 한송이를 보아도 예수의 얼굴을 보게 되고, 길거리에서 돼지를 모는 이를 보아도 예수의 얼굴을 봅니다. 우리가 이 예배를 마치고 역사의 현장에 나가서 산다는 것은 너울을 벗은 채 세상을 보고 많은 고난을 겪는 사람들 속에서 고난을 함께 겪어 가는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대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 난 기독교인이고 너는 우상숭배를 하므로 나는 가까이 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둘째, 나는 기독교인이고, 너는 불교인으로서 서로 다른 점을 이야기 해보자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은 기독교라는 너울을 벗어 버리고 불교도를 불교도로서 대하는 태도인데 이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듯 미식축구의 영웅이 된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는 기지촌에서 흑인하고 같이 살고 흑인아이를 낳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건너가 아들을 키우는데, 가는 곳마다 천대를 받았습니다. 교회에서도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아이를 키워낸 이 여성의 말들이 도인 같습니다. 올라가면 내려올 때가 있다, 겸손하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그 어머니의 얼굴과 하인스 워드의 얼굴에서 항상 웃음을 보았습니다. 한국말도 잊은 워드가 제일 먼저 했던 말은 “어머니 사랑합니다” 였고, 상금으로 한국인 유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위해 어머니 성함으로 재단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기지촌의 이 여성을 바라보았던 시각은 천대 아니면 동정이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 여성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창녀의 벗”이었습니다. 스승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벗’이었습니다. 창녀를 내 눈으로 보면 너울이 썼으므로 창녀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정치를 보십시오. 장관 다섯 명을 임명하면서 청문회를 했습니다. 야당은 전부 부적격하다고 하고, 여당은 전부 적격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대통령은 그 다음날 다섯 명 전부를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청문회는 왜 합니까? 여당사람들은 열린우리당이라는 너울을 쓰고 보고, 야당은 반대하는 너울을 쓰고 봅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너울을 벗어버린 얼굴로 보는 것입니다. 나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내 눈을 변화산 위에서 햇빛처럼 빛나는 예수의 얼굴만 보고 그 눈의 반사체로써 교회, 사회, 역사, 정치의 모든 것을 봐야합니다. 그렇게 가는 우리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은 고난의 길입니다. 앞으로 6주 동안 그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내 너울을 벗어버리고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사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일한다는 것은 이 교회에서 예수의 얼굴과 예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예수가 간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로 향하는 고난의 길이지만, 부활과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길을 사순절 기간 동안 함께 가는 신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원용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