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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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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는 범행 당시 어떤 사람이었고, 왜 잔혹한 범행을 하게 됐을까요.
최근에 국민일보에서 우리나라 사형수 63인 리포트라는 기사를 시리즈로 실었는데 그 중에 첫 번째 로 다룬 것은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에서 그들의 성정과정을 심층분석하여 다루었는데, 63인중 성장 과정이 파악되지 않은 4명을 제외한 59명 중 42명은 편부, 편모, 고아 또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등 71%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파악됐으며, 범행 당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57명으로 90%에 이르러 성장기 신앙이나 종교 활동이 극악 범죄 억지와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주보참고)

사형수 63인 중 일정한 수입이 있는 직업을 갖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며, 대부분 돈 부족에 허덕였고 교도소를 드나들면서 범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으면, 50세가 넘어서까지 가족을 이루지 못한 사형수도 있는 등 여성 관계도 대부분 불안했고, 풍족한 삶에 대한 갈망, 기회를 주지 않는 주변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 등으로 황폐화된 정신상태는 이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애기 들으면 사형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 나쁜 놈들은 죽어도 싸! 빨리 사형시키지 않고 왜 살려두지! 밥만 축내는 것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들의 배경을 모르고 그들의 범행만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들의 불행한 과거, 사랑받지 못하며 자랐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들이 저지른 나쁜 범행으로 인하여 분노하기보다 “참 불쌍하다”는 동정의 마음이 생깁니다.
옛날에 아버지가 마실갔다 돌아오셔서 가끔 하시는 말이 떠오릅니다. “알고 보이 억시기 불쌍한 사람이더라!”
그렇습니다.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질렀을지라도 그 사람에 대하여 알고 보면 “참 불쌍타!” “오죽 했으면!”하면서 눈시울을 적시거나, 그 사람 앞으로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동정의 마음이 생깁니다.
성도 여러분! “알고 보니 참 불쌍타!”라고 하였을 때 “불쌍타” 즉 불쌍히 여겨지는 마음 이것이 곧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팔복 중에 다섯 번째 복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입니다.
저는 이번주간에 이 긍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에 대하여 깨달았습니다.

1.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봅시다.

요한일서4:8에서 사도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4:9-10)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 사랑이 바로 긍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긍휼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알고 보니 참 불쌍트라!”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와가 어느날 사탄에게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주어 선악과를 먹게 하였고, 그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되어 그들은 이제 죽음이라는 큰 불행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칼을 들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면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워 주었고, 곧 바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창세기3;13-15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이 말씀이 최초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너 따먹지 말라는 석악과 따먹으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대로 너희는 죽어라’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유혹한 사탄을 저주하고 곧바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시므로 장차 오실 여자의 후손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원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므로 사람을 구원하실 것을 선포하십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먹으면 죽이겠다고 하셔놓고, 막상 먹으니 살려주겠다고 하시고, 그러면 처음부터 사람이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하시지! 도대체 뭐야!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따 먹으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그만 한 입 쓱 배먹는 것을 보시고, 사탄이‘따 먹으면 너무 좋단다’‘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단다’하는 말을 듣고 보니 과일이 얼마나 먹음직스럽고, 보기가 얼마나 좋던지, 먹기만 하면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우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손이 저절로 가는 것입니다.‘에이 먹자’하고 따먹으니 뿅 가는 맛이고, 내가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생각보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나 혼자 먹을 수가 없지!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런 남편에게 먹이고 싶어, 얼른 가져가서 먹으라 하였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유혹에 빠져 참지 못하여 먹고 죽는 줄도 모르고 자기 남편에게 먹였으니, 그런 과정을 생각하니‘알고보니 참 불쌍타!’ 죽어 마땅한 일을 행하였지만 죽이기에는 너무나 불쌍합니다.

그러면 여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의 소행은 죽어 마땅하지 않는가? 여자가 그러더라도 남자는 안 그래야지! 여자가 먹으란다고 덥석 받아먹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남자 또한 불쌍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랑스런 아내가 ‘자기! 아~ 이거 먹어봐 너무 맛있어!’ 하며 과일을 내 미는데 보니 벌써 아내의 입이 오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담이 어떤 남자입니까? 아내 하와를 보고 “당신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라고 고백 할 만큼 사랑의 남자입니다. 그런데 입에 선악과를 오물거리며 먹으라는데, 자기 혼자 살겠다고’ ‘당신 그것 왜 먹었어! 이제 당신은 죽었어! 하나님께서 죽는다고 하셨잖아!’ 하면서 거절할 수가 있습니까! 아내가 죽는데, 나 혼자 살겠다고, 여자라고는 달랑 하나밖에 없는데! 거절할 수 없지요.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먹자. 마누라 없는 세상 어떻게 살아! 죽어가는 마누라가 불쌍해서 그냥 볼 수가 없어! 먹고 같이 죽자!’ 그래서 두말 않고 받아먹었습니다. 알고 보면 남자들 불쌍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불쌍하게 안 보였겠습니까? 얼마나 불쌍히 보였겠습니까! 마누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내 놓는 남자가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알고보니 남자가 불쌍타!”
하나님은 ‘먹으면 죽으리라.’ 이미 선포한 상태에서 번복할 수는 없고 죽이자니 넘 불쌍하고 ‘그래 내가 대신 죽고 저들을 구원해야지!’ 하셨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시니, 지나가는 양을 잡아 피를 흘리며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혀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이시어 사람의 모든 죄를 사하심은 바로 이 긍휼하심 즉 사람을 불쌍히 여기심에서 출발이 되었습니다.
그 긍휼함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변함이 없습니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23:34).‘알고보면 저들이 불쌍합니다’입니다

2.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심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내게 미운 짓하고, 불이익을 주고, 아프게 하는 자들, 속 썩이는 사람들 알고 보면 불쌍하지 않습니까!
사형수들이 괜히 살인한 것이 아니고,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던 것처럼 속 썩이는 남편도, 자라난 환경에서, 처해진 상황에서,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죽어라. 일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보고,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풀 때는 없고, 그런데‘머 저런 인간이 다 있냐! 핏줄은 못 속여!’하며 무슨 짐승 쳐다보듯 하지! “알고 보면 불쌍타!”
남편들! 누구의 마누라는 보니 싹싹하드만, 내 마누라는 허구한 날 바가지나 긁고, 앙탈이나 부리고, 나도 질렸어! 딴 여자가 살아봤으면! 하는데, 마누라 “알고 보면 불쌍타!”
자식도, 이웃도, 얄미운 오리새끼 같은 아무개 성도도 “알고 보면 불쌍타!”
생각해 보세요. 알고 보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복중에 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내가 남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계시는가를 깨달으면 얼마나 감격해지는지 모릅니다.
둘째는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계속 입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허물과 실수를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럴 때에 다시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 좋은 복 중에 “긍휼히 여겨 긍휼히 여김 받는 복” 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시고, 어떤 사람이든지 “알고 보니 불쌍타!”하고 보복하거나, 미워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강재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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