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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의 행복 (계 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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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여러분은 기다림을 가지고 있으신지요?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기다림이든지 기다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요, 그  희망은 나를 존재케 합니다.

두 여인이 서로 자기들의 신세타령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은 과부된 여인이요 한 여인은 술주정뱅이 남편을 두어 속을 썩이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자기가 더 불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술주정뱅이 남편을 둔 여인은 “차라리 그런 남편은 없는 것이 속이 덜 썩겠다.”고 까지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홀로된 여인이 하는 말이 “당신이 나보다 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남편이 언젠가는 행여나 좋아질까 - 하고 기다려보는 기대는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그런 기다림조차도 가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은 나보다 낫습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내 삶의 의미를 값지게 해 주는 것이요,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여러분,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희망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아십시오.
‘내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내게 기다림이 있음으로 인해 나는 행복하다.’

아무런 기다림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곧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그 순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 비전에 대한 기다림, 그리고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1. 먼저 우리는 약속에 대한 기다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았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을 때, 성령께서 내게 임하셨을 때,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최초의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비전입니다.
///// 사도행전 2:17절에 보면,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을 때 환상을 보고 꿈을 꾸리라고 하십니다.
바로 비전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 안에 일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소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게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안에서 약속하십니다.
나를 통해, 우리의 가정을 통해, 이루실 일을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축복의 약속도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같이,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과 같이, 이러한 약속이 여러분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거기에 대한 기다림을 회복하십시오.
우리는 이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 그리고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실 주님,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의지해,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승천하실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함께 한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0-11)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며 계시록을 기록합니다.
교회의 현실과 장차 일어날 일들, 그리고 미래의 천국을 보여 주시며 마지막으로 내가 다시 오리라고 하십니다.
///// “이것들을 증거하신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계22:20) 이에 요한이 외칩니다.
/////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
이것이 약속이자 주님의 오심 그 자체입니다.

오늘 바울의 신앙이 의미가 있고, 이 어려운 세상 속에서 인내하며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 기다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존재하고, 그리고 계속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신앙 때문입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고 좋은 말씀을 주고, 세상 다른 곳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기에 기독교의 신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악, 고난과 고통, 슬픔과 애통, 병과 죽음....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 것도 아닌, 우리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절감하면서, 하나님께만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 가운데 오심, 그리고 그 가운데 친히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그것이 희망임을 절실히 깨닫기 때문에, 인간은 겸손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찾고 그 약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 기다림이 어떠 하느냐는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기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히 11: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느니”(히 11:13)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당장 눈앞에서 약속을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광양서 가르치신 것은 기다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시점, 하나님의 약속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세우기 위하여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의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주님 오심을 가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림의 신앙이란 이러한 것입니다.

1) 기다림의 신앙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기대와 희망입니다
신앙인의 기다림은 내 희망을 하나님께 건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사태가 어렵고 힘들어도, 어떠한 징조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앙망하게 됩니다.
‘앙망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 희망을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사야 40:31절의 말씀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여기서 앙망한다는 말은 바로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앙망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기다리라’(Wait upon the Load)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앙망한다’ - ‘하나님을 기다리라’(Wait upon the Load)

곧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곧 하나님께 희망을 둔 사람입니다.
그래서 NIV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둔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두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주님도 그 날과 그 시는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만 아실뿐입니다.
그러나 곧 오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한 의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기다립니다.
고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여러분도 주님의 그 날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기 축원합니다.

2) 기다림은 인내입니다.

인내하십시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속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이루실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 때를 기다리면서 인내하면서 살아갑니다.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사울의 신임을 얻지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백성들의 칭송을 받자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깁니다.
결국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다윗은, 사울의 곁을 떠나 광야에서 불레셋으로 전전하면서 지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 온 사울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얻습니다.
한 번은 엔게디 동굴에서요, 또 한 번은 십 황무지에서입니다.
다윗의 수하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에 절대적으로 순복합니다.
그는 교만하지 않았고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때를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날아오르도록 만드신 그 때에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기다림은 이러한 것입니다.
내가 자의적으로, 임의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때, 그리고 오실 그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게 주신 약속에 대해서,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대해서, 인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 지금 당장 손에 잡히지 않음으로, ‘주님은 오시지 않는다....’할 것이 아닙니다.
약속과 때를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기다릴 때,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애3:25)

3)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합니다.       
기다림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편법이나 의미 없이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에 대해 주님은 악하다고 하십니다.
/////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25:26절)

데살로니가 교회가, 참 믿음이 좋은 교회였는데, 그들이 범한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종말에 관한 오해였습니다.
그들은 부활 시에, 죽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으며, 그리고 ‘이제 곧 주님께서 오시니, 더 이상 일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빈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종말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한 교회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사도 바울은 따끔하게 충고합니다.(살후3:10)

우리가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 하나가 쉽게, 편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능고사를 치면서, 핸드폰을 통해 부정행위가 이루어져서, 야단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운전면허 시험을 치루지 않고도, 면허증을 딸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속아서, 손해를 본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쉽게 이루려고 하는 악한 생각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거기서 무슨 선한 열매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실과 진실, 노력하는 삶은 기다리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김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기다리는 것은, 내게 주어진 삶에, 성실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또한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를 하시는데,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차이는 바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의 차이였습니다.
그 기름이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령이 충만한 삶의 내용입니다.
단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간 그 삶의 내용입니다.
때문에 그것은 미련한 처녀들이 나눠달라 할 때 나눠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준비된 여인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약속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을 준비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을 성실히 살고 오늘에 최선을 다합니다.

은행나무의 다른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손수(公孫樹)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한자로 공(公)은 ‘너’를 뜻하는 존댓말이고, 손(孫)은 ‘손자’, 수(樹)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곧 ‘네 손자의 나무’라는 말이 됩니다.
은행나무에 이런 이상한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원래 이 나무의 성장이 더디어 심은 뒤 3대는 지나야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랍니다.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를 손자 대에서 열매를 따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손자에 대해 희망을 두고 그것을 심는 것입니다.
후손은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중국의 한 재상이 길을 가다가, 한 노인이 집 앞에 어린 감나무를 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노인이, 나무 심는 것을 보고 하도 이상하여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보아하니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으신 것 같은데 언제 그 열매를 거두시려고 나무를 심습니까?”
노인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먹기 위해서인가요, 내 손자 대에 열매가 맺힐 희망을 보면서 심는 것이지요.”

이게 기다림의 태도입니다.
희망을 보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매를 거두지 못해도.......
나는 오늘 최선을 다할 때, 그 때, 기다리는 자의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오신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내가 할 일을 하겠노라.”
이렇게 하나님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약속을 이루게 되고,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김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는 희망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기다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면 희망이 있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린 꿈나무들이 있고 젊은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렇게 살고 있으나 저들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더 큰 것들을 이룰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합니다.

교육관을 건축하려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어린 꿈나무들이, 그리고 젊은 청소년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마음껏 활개를 펴고 신앙 안에서 활동하면서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멋지게 우리 교회와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일군들로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지에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 땅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 눈을 돌려주어,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더 크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는 일에, 바탕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조금은 힘든 일들이지만, 우리의 꿈을 펼쳐나가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월, 한 겨울을 보내며, 한 학기를 마치고 새 학기로 접어들며, 또는 새롭게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우리 어린 꿈나무들과, 뿐만 아니라,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로 첫 발을 들여놓는 우리 젊은 청소년들에게, 이 희망을 심어주십시다.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그리고 인내하면서 준비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에 성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약속을 얻고 우리는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게 임하시는, 종말론적으로 오시는 그 분을, 우리는 영접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아멘-
(박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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