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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가 넘치는 예배(2): "말씀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느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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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종교, 기독교>
어느 시골 성당에서 신부님의 미사 집전을 돕고 있던 복사(服事) 소년이
실수로 포도즙이 든 병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성미 급한 신부님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소년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당장 제단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이 소년은 나중에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 지도자가 된 티토(Josip B. Tito, 1892-1980)였습니다.

큰 도시의 대성당에 또 한 명의 복사 소년이 미사를 돕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 역시 주교님의 미사 집전을 돕다가 그만 실수로 포도즙 병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꾸짖는 대신에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소년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애야, 너는 언젠가 훌륭한 신부님이 될 거야."
나중에 이 소년이 자라나 미국 카톨릭 교회의 대주교가 된
풀톤 쉰(Fulton J. Sheen, 1895-1979)입니다. 

말은 이다지도 중요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말은 참 중요합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을 듣거나 감미로운 음악소리를 듣고 자라난 화초가
매일 저주와 욕설을 듣고 자라는 화초보다 훨씬 더 싱싱하고 건강하다는
실험보고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매일 쓰는 말의 힘은 참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말만 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말씀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말씀 한 마디로 온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각색 병자들을 고치실 때 주로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무엇보다도 개신교회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카톨릭 교회가 예배 형식과 예전을 중시하는 '보는 종교'라고 한다면
개신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는 '듣는 종교'입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서 사람의 인격이 변화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설교자는 하나님의 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代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도 중요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요?
오늘 저는 「은혜가 넘치는 예배」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말씀을 듣는 자세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곳 예배당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도 중요하고 찬송도 중요하고 봉헌도 중요하고 성도의 교제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아마 세상적으로 말하면 설교보다 더 재미있고 더 감동적이고
더 유익한 연설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늘 예배당에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서라면 여기 목사님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재미있고 유익하고 감동적으로 말 잘하는 말쟁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말들을 제쳐놓고 교회에 나온 것은 설교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곳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인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것입니다!

스펄젼(Charles Spurgeon, 1834-92) 목사님은 19세기 영국 사회를 뒤흔든 명설교가였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대개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소감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설교가 진행되는 내내 스펄젼 목사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 분이 전한 그리스도만 생각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가 끝난 뒤 나이를 묻는 사람에게 한 그의 대답도 유명합니다.
"저의 나이보다는 제가 전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신경을 쓰십시오."

오늘 여러분들도 저의 인간적인 말을 듣기 위하여 이 곳에 온 것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제가 아무리 탁월한 강연을 한다고 할지라도
저보다 더 유식하고 똑똑한 분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은 강연을 듣기 위해서 이 곳에 오신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사역은 가장 고상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님들은 20분 짜리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20시간을 쓰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목사님이 예배가 끝난 뒤 "목사님, 그 설교 준비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은 뒤 "몇 시간이라니요? 45년이 걸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가 설교 한 편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는 고백이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설교는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 없이는 제 아무리 많은 시간을 바쳐
최고 수준의 설교를 준비했다고 할지라도 설교자 자신부터 허전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설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대언(代言)한다는 자세로
항상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떠는 자"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7가지 자세>
자,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의 매일 마다 들으시는 여러분들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본문 말씀에서 설교를 경청하는 일곱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대대적인 재건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등 회복과 재건운동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지요.
이제 어느 정도 예루살렘 재건운동에 가닥을 잡은 뒤
느헤미야는 신앙부흥 운동에 불길을 붙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재건과 회복은 바로 말씀 회복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느헤미야는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한 후
율법학자였던 에스라로 하여금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큰 소리로 읽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 7가지 원리가 나옵니다.

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한 곳으로 모여야 합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느라고 바빴습니다.
저마다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성벽보수 공사에 뛰어들었던 것이지요.
이제 어느 정도 성벽 재건 사업이 궤도에 올랐을 때 영적인 문제에 눈을 돌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재건과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데 있음을 안 것입니다.
그리하여 느헤미야는 제일 먼저 여러 마을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곳에 모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수문 앞 광장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수문 앞 광장은 예루살렘 성전 동문과 성벽 사이에 있는 큰 공터를 말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백성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로 모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한 곳에 모여야 합니다.
사탄이 득세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가장 뚜렷한 징후는 잘 모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해도 안 모이고 음악회를 해도 안 모이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세상은 사탄이 그만큼 위세를 떨치기 때문이 아닙니까?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한 군데 모여서 다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열심히 성전에 모입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자 귀를 기울였습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만한 사람은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다 나왔는데
그 말씀에 귀를 쫑긋 기울여 경청했다는 말씀이지요.
여기 보면 새벽부터 정오까지 약 6시간 동안이나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제가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설교를 해보니까 교회마다 말씀 듣는 자세가 다릅니다.
어떤 교회는 아무리 감동적인 내용을 전해도 도무지 반응이 없습니다.
허공을 쳐다본다든지 졸든지 주위가 산만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설교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교회는 잔잔하게 은혜를 사모하는 분위기가 역력하고
조금만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잘 웃고 조금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도 잘 웁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설교하기가 얼마나 신바람 나고 쉬운 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잘 경청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그 어떤 설교도
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올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에 존경을 표해야 합니다.
5절을 보세요.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는 임시로 만든 높은 단 위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쳤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말씀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율법책을 펼 때 모든 백성들이 일어섰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일어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표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분이 들어올 때 자리에서 다 일어나지 않습니까?
존경의 표시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에서도 주일 대예배마다 말씀을 들을 때 온 청중들이 일어섭니다.
바로 본문 5절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존경하는 마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군대에서 지휘관이 연설할 때 모두 일어서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온 정신을 집중해서 듣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더욱 두렵고 떨리는 존경의 마음으로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④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온 백성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을 잘 해야 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진실로 그런 줄로 믿습니다." 하는 긍정과 시인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 말씀이고 하나도 그름이 없다면 언제나 아멘으로 화답하십시오.
그리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여러분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고후 1: 20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언제든지 아멘으로 화답하셔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영어로 된 말들 가운데 가장 차가운 말은 "No!" 라고 합니다.
무엇을 부탁했을 때 "No!"라는 말을 듣게 될 때 얼마나 차갑게 느껴집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No!"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실망하십니다.
적어도 설교를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라면
"Yes!" "아멘!" 하면서 기꺼이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⑤ 하나님의 말씀에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다같이 보세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지파 사람들이
오늘은 거룩한 성일이니 울지말라고 타일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일에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나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하도 울어대니까 목사님이
"오늘은 기쁘고 좋은 주일이니 울지 마십시오!" 하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울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상의 영화나 연극이나 연속극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덤덤하게 아무 감동도 없이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흘리는 눈물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눈물보다도 빛나고 아름다운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십시오!

⑥ 하나님의 말씀에 기뻐해야 합니다.
본문 9-12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자
느헤미야와 에스라, 레위인들 등등 모든 지도자들이 나서서 백성들을 위로합니다.
오늘은 주일이니 슬퍼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 먹고 마시고 즐겁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눈물은 아름답고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마냥 눈물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친 슬픔은 죄악입니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오고 겨울 뒤에 봄이 찾아오듯이 눈물 지난 후 웃음이 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회개의 눈물을 흘린 후 용서와 평강의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눈물과 슬픔에 젖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웃음과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10절 후반부에서 느헤미야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눈물과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웃음과 기쁨으로 끝납니다.
눈물과 슬픔은 더욱 의미 있고 찬란한 웃음과 기쁨에 이르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찾으십시오!

⑦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사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가 20년 넘게 목회하면서 계속 좌절하고 실망하는 것 중에 하나는
말씀을 듣고서도 생활 속에 도무지 변화가 없는 성도들을 볼 때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은혜를 잘 받는 것 같은데 삶 속에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주옥같은 말씀을 듣고 울고 웃으면 뭐 합니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은 뒤, 무엇인가 우리의 나쁜 습관이 바뀌고
부정적이고 불평하던 입술이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입술로 바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이럴 때 설교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허공을 메아리치는 인간의 소리가 되고 맙니다. 

본문 10절과 12절 말씀을 잘 보세요.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나누어준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즐겁고 복된 성일에 홀로 먹고 마시며 즐기지 말고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함께 나누라는 것이지요.
즐거운 날 가난해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그들을 기꺼이 볼보라는 이웃 사랑의 말씀이지요.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을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었으면 조금이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해보세요.
조금이라도 여러분의 습관이나 성품이나 삶의 자세가 변화되도록 해보세요.
그리할 때 히 4: 12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 있는 말씀이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변화되기를 사모하세요!
 
기독교의 위기는 말씀의 위기요 강단의 위기입니다.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 위에서 선포되고 있지만 참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설교학자 스피어(H. J. Spier)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은 대사가
자신을 파송한 분의 뜻을 이탈하지 않을 때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무오한 말씀을 바르게 해석함으로
그 말씀에 철저하게 복종할 때 진정한 설교가 된다."

우리 내리교회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입이 되어서
생명과 진리만 선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내리교회는 설교 30분이 죽은 자를 일으키는 30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내리교회는 온 성도님들이 말씀으로 은혜 받고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만일 어떤 목사가 강단에서
하나님의 영화로움과, 십자가의 풍성한 은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실낱같은 빛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 토니 사전트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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