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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들의 은혜로운 확신 (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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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저는 빌립보서 1장 6절에 근거하여 “성도들의 은혜로운 확신”이라는 제목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서,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시작하신 착한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입니다.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인종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다 한 조상 아담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많은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벌써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냈고, 화성에는 로봇을 실은 우주선을 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다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고, 지상 5백 미터 이상 되는 고층건물을 짓습니다. 암을 치료하고 심장을 이식하고 뇌수술을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죽음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영웅도, 달에 다녀온 우주인도, 암을 치료하는 의사도, 철학자나 종교인도 다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과학자들은 언젠가 인류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염을 토하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죽음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심각하게 취급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를 보면, 만물의 창조 다음에 곧바로 인간의 타락을 다룹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성경이 죄를 그토록 집요하게 다루는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를 다룹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말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 뿐인 아들을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 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체가 되시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처한 비참한 실상에 대하여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인간의 전적 무능(全的無能)이라고 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중에 광폭한 코끼리를 만나 쫓겨 다니다가 빈사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우물을 발견하고 가보니 넝쿨나무 하나가 있는지라 그 줄기를 타고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로써 그 사람은 넝쿨나무에 매달려서 어려운 고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고 우물 위를 올려보았더니 흰색과 검정색의 쥐 두 마리가 넝쿨줄기를 갉아먹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네 마리의 독사가 금방 집어 삼키기라도 할 듯 머리를 쳐들며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발밑에는 커다란 이무기 한 마리가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막바지에 몰려서 어떻게 할 수 없어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몇 방울의 달콤한 꿀이 어디서인가 흘러 들어와 사람의 입술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달콤한 꿀맛에 취해 두려움도 괴로움도 모두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코끼리는 인생의 무상(無常)을 의미하고, 넝쿨나무는 인명(人命)을, 흰색과 검정색 쥐는 낮과 밤을 상징합니다. 발밑의 이무기는 죽음(死)을, 그리고 꿀은 인간의 오욕(五慾)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는 불교에서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서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비참한 실상을 파악한 현자입니다. 그가 욕망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죄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다만 욕망을 버리면 고뇌도 사라진다고 가르칩니다. 불교가 말하는 구원은 불법을 깨달음을 통해서 얻습니다.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고 합니다. 부처가 된 사람은 열반(涅槃) 또는 적멸(寂滅)의 상태에 이릅니다. 그것은 생명의 불꽃이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생명이 있으므로 욕망이 생겨나고 욕망이 생겨남으로 고뇌가 생기는 것이므로 생명의 소멸을 통해서 불행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죽음의 원인인 죄를 해결함으로써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막 12:27)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내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의 공로로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받은 구원은 언제까지 유효한 것일까요? 혹시라도 구원이 상실되는 일은 생기지는 않을까요?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원이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면 그 구원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결심은 자주 바뀌고 우리에게는 구원을 지켜나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하셨다면 사정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처럼 변역치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결정하고서도 후회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후회할 일을 절대로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11장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확실하며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되는 법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어떠한 시련과 핍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단코 성도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시험에 넘어졌을지라도 다시금 용기를 내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잊고 살 적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귀가 아무리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헤맬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해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우리를 통해서 착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할 적에 우리는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디도서 3장 3절에 보니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다’고 했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후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 어떻게 지금은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성도들이 존재적인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볼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선, 우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는데 이제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마음이 기쁘고 불순종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반면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즐거워합니다.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변화된 삶에 대하여 로마서 14장 7절로 8절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먼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통해서 천국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로 9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지체되는 이유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합니다.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기회를 얻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 힘쓰는 성도님들은 불신 가족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먼저 믿은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가족 구원을 위해 애쓰는 것은 착한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구원이 개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가족 모두가 구원에 동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준 일로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그 때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말하기를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리고성이 함락되던 날, 라합의 집에 모인 사람은 부모, 형제, 일가친척 모두가 죽임을 면하고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옥에 가두고 지켰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 역시 혼자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그의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해서 복음을 듣기 위해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렸고, 그 날 베드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중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고 구원에 참여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가족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각 사람의 관계입니다. 내가 믿으면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내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과 대화하던 중에 예수 믿으라고 하자, “저의 아내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습니다”라고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아내의 믿음으로 남편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한편, 구원 받은 성도들은 개인 차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교회의 지체는 곧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말과 같습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고, 많은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성도들은 교회의 일원이 될 때 영적 생명을 지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 나 혼자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은 마치 지체가 몸을 떠나 혼자 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지면 살 수 없듯이, 우리 역시 교회를 떠나면 불행한 결과를 자초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성도들은 저마다 교회의 지체로서 맡은 사명이 있습니다. 몸에 눈과 귀와 코와 입을 비롯해서 팔과 다리, 손가락, 발가락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몸속에도 심장을 비롯해서 수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지체라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체라고 해서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도 개인이 아닌 교회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습니다. 또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고전 10:32).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일에 동참해서 자기의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선교와 구제와 교육과 같은 착한 일은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교회 차원에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성도들을 돌보는 일도 혼자 하기 보다는 교회 차원에서 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직분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능력이 없어서 직분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사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교회의 직분은 우리 개인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직분을 감사함으로 받아서 순종하면 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기독교인에게 “천국 갈 것을 믿으시지요?”라고 물어보았더니, “저 같은 것이 어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도님의 구주가 되시는 것을 믿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성도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 믿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더니, “그야 믿고말고요. 예수님이 저 때문에 돌아가셨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성도님은 믿음이 있지만 확신이 부족한 경우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이 성도님이 구원을 받은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어서는 행복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갈는지는 죽어봐야 알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는 주님의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확신이 없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명하기를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고 하였던 것입니다.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배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자주 들어야 확신하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 속에 시작하신 착한 일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강림은 이 세상의 종말과 새 세상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죄악과 마귀를 대적해서 영적 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도들은 부활의 몸으로 영생에 들어가고 마귀는 영원한 불 못에 던짐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가까운 시기를 살아갑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강림이 임박한 사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서 영원한 상급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가 등불을 들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그 중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기름을 다 준비해서 나갔으나 미련한 처녀들은 당장 쓸 기름만 담은 등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가는 데도 신랑이 오지 않습니다. 등잔의 기름이 점점 없어져 갑니다. 그래도 신랑이 오지 않습니다. 다들 졸며 잡니다. 얼마쯤 잤는지 모르나 “보라 신랑이니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열 처녀는 황급히 일어나 등불을 돋우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은 기름이 떨어져서 꺼져갑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하였으나 “너희와 우리가 쓰기에 다 부족할 것 같으니 차라리 사는 자들에게 가서 사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고 혼인집의 대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달라고 했으나 신랑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밤중을 지나 새벽이 가까운 때를 살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을 보십시오. 복음의 진리는 듣기 싫어하지만 허탄한 이야기를 듣는 데는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을 통해서 이 시기가 어느 때인가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가진 은혜로운 확신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셨으니 주 강림하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직분을 감당할 때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마다 주님 강림하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은혜로운 확신을 가지고 활기찬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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