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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방이 평안케 되는 축복 (대상 1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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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전에 한국 갤럽에서 <한국인의 종교의식>에 관해 설문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 가운데 이런 게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종교가 있다면 왜 종교를 믿습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 내세에 영생을 얻기 위해서, ... 등 다양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67.9%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이유 중 단연 1위는 ‘평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설문 조사를 뒤집어 보면 어떤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평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평안을 얻기 위해 종교를 추구한다는 겁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행복한 인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행복의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평안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평안을 얻기 위해 종교를 갖지만, 과연 세상의 종교들이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소유나 조건도 인간에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세상의 종교도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단지 ‘유사품 평안’을 잠시 제공할 뿐입니다. 그것은 온전한 평안이 될 수 없고, 잠시 후 사라지는 평안입니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절대 권력과 부귀영화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불안했습니다.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고민하던 중 소문을 들으니까 한 남자가 빚더미에 있는데도 평안히 잠을 잘 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서 거금을 주고 그 남자가 사용하는 침대를 사들입니다. 하지만 거기 누워 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평안은 오직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항상 평안을 축원합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엡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롬 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살후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과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평안의 축복을 풍성하게 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유다 왕국의 아사 왕에 관한 기록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고질적인 문제는 혼합주의(Syncretism) 신앙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분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는 순수한 신앙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우상신(바알, 아세라 등)을 더불어 섬겼습니다. 세상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토속 신을 믿어야 잘 먹고 잘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이렇게 불순한 신앙을 갖고 있는 한 평안이 없었습니다. 늘 주변국의 침략을 당하고, 이런 저런 문제와 근심거리로 고통을 당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극복하고,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평안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모든 고통과 재앙, 근심이 떠나가고, 평안이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평안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평안을 얻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여지없이 평안을 상실하고 맙니다. 아사 왕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이런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가 백성들을 잘 지도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면 평안했습니다. 반면 그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 마음이 세상을 향하면 이내 평안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아사 왕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되는 원리입니다. 아니, 오늘날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이런 원리를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1] 평안의 축복을 얻는 비결 : 하나님을 찾는 것

  한 선지자가 아사 왕을 만나 권면했습니다. 1절에 보면, 그는 오뎃의 아들 아사랴입니다.  그는 아사 왕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면합니다.(2절) 그 말씀을 들은 아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8절을 봅니다. 여기 보면 선지자 오뎃이라고 했는데, 1절과 불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어법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들에 관해 언급할 때도 흔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오뎃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아사랴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아사 왕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내서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예루살렘에 백성들을 모으고 성회를 개최합니다.(10절) 전쟁터에서 얻은 전리품을 감사 제사로 드립니다.(11절) 그리고 하나님을 찾기로 맹세합니다.(12절) 그 맹세가 얼마나 결연했던지 하나님 찾지 않는 사람은 아예 죽여 버리겠다고 공언합니다.(13절)

  이렇게 맹세하며 하나님을 찾자 이스라엘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졌습니까? 15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사방이 평안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사방이 평안케 되는 것이 영적인 원리요 축복의 원리입니다. 

  이런 원리는 대하14:1~4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시대에 그 땅이 십 년을 평안하니라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아사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은 10년 동안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사 왕이 말년에 실수를 합니다. 그 시대는 남북 분열 시대였는데, 그는 북 이스라엘 왕국을 제압하기 위해 이방의 아람 왕 벤하닷과 동맹을 맺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대신 인간의 힘을 의지한 불신앙적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하는 아사를 선지자가 책망하자 그는 오히려 선지자를 감옥에 잡아 가두며 핍박합니다.(대하16:10) 정신을 못 차리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발병이 나게 함으로써 그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그런데도 그는 인간 의사만 의지하고 하나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대하16:12) 결국 그는 발병으로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평안의 비결, 형통의 비결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굳게 의지하는 겁니다. 시편 기자(다윗)도 뭐라고 말합니까? 시73:27~28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모든 게 회복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꼬이면 만사가 꼬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풀리면 만사가 풀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막히면 사방이 막힙니다. 하나님께 열리면 사방이 열립니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멀어지는 데서 기인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합니다. 인간 관계가 망가지고, 물질 관계도 망가지고, ... 모든 게 망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게 최선입니다. 이것이 모든 비극과 고통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2] 하나님을 찾는 방법 : 회개, 말씀과 기도, 재점검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늘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편재하시는 분이므로 공간적으로는 항상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 망가뜨리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가까이 해야 합니다. 거울의 원리와 같습니다. 거울 앞에서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거울 속의 영상이 두 걸음 가까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며 가까이 가려고 애쓸 때 하나님이 성큼 우리 앞에 계신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방법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① 회개 :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는 것은 바로 죄악입니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우리가 죄를 품고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리고 평안이 상실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살피고 죄악을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사해 주시고 만나주십니다.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우리는 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십자가를 믿음으로 통과할 때 나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것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② 말씀과 기도 :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느끼는 방법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1:1~2은 복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무슨 말씀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합니다. 그 방법이 곧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와 임재하십니다. 또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시145: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하면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의 전술? 이스라엘의 군사력?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닙니다. 출33:11 보면 그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 하니라” 여호수아는 모세의 비서로 있을 때부터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회막을 떠나지 않은 것 그것이 승리와 평안의 비결입니다.

  ③ 재점검 :
  우리는 연약한 인간인지라 가만히 두면 나태해지고 풀어집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또 얼마나 분주합니까?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흘러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만사가 꼬일 뿐 아니라 평안이 상실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벌어진 것이나 틀어진 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마치 악기를 무턱대고 연주하는 게 아니라 미리미리 조율하는 것처럼, 자동차를 그냥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수시로 정비하는 것처럼 영적 재점검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늘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축복 : 외적 평안, 내적 평안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외적인 것도 있고, 내적인 것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사방이 평안케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① 외적 평안 : 형통
  아사 왕이 하나님을 찾을 때 10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우리 앞에 거칠 것이 없도록 형통케 해 주십니다. 이것이 외적인 평안입니다. 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주의 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장애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고난이 닥쳐와도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디디고 일어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고난조차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됩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창세기 39장) 그는 애굽에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그러다가 보디발 아내의 애매한 모함으로 감옥살이까지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계속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더라.” 종살이가 어떻게 형통입니까? 감옥살이가 어떻게 형통입니까? 형통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니까 고난 같은데 나중에 보니까 더 잘된 겁니다. 요셉이 오히려 종이 되고 감옥에 간 것을 계기로 적직 고위관리를 만납니다. 그 후 그의 소개로 바로 왕을 만납니다. 마침내 애굽 대제국의 총리가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화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요 동적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요셉에게는 고난이 걸림돌이 아니라,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② 내적 평안 : 환경을 초월하는 평안
  외적 평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적인 평안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이런 저런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적 평안을 주시면 환경을 초월해서 평안을 누리고 승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2장 보면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무얼 하고 있습니까? 잠을 자고 있습니다. 평안하지 않으면 절대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인한 평안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역시 감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또 무얼 하고 있습니까? 뭐가 좋은지 한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며 찬미합니다. 내적 평안이 없다면 그 고통스런 현장에서 어떻게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찾으며 의뢰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사48:18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 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 ” 그 평안은 얼마나 놀라운지 마치 강물과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상황이 어떨지라도 심령 속에서 평안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안이 바로 그런 겁니다. 갈릴리 바다를 제자들과 항해하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큰 광풍이 일어나고 난리가 났는데 예수님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당황한 제자들이 흔들어 깨우자 별일이 아니라는 듯 일어나 바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도가 가라앉았습니다. 막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바로 이런 평안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C. C. C. 총재였던 빌 브라이트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미국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 참석했을 때 대학 동창생을 26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해군 장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크게 출세한 겁니다. 그런데 얼굴에 그늘이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으니까, 가정불화가 있고, 막내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빌 브라이트가 복음을 제시하며 위로했고, 그 친구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후 다시 만났는데, 이야기를 들으니 이번에는 딸이 암에 걸려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 믿고 얼마 안 됐는데 그런 일이 생겼으니 얼마나 실망이 클까 염려되어 물었습니다. “그래 얼마나 슬픈가?” 그런데 그 대답이 놀라웠습니다. “아니, 괜찮아. 물론 딸아이를 생각하면 무척 슬프지. 하지만 놀랍게도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내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평안 주셨네.” 이해할 수 없는 평안! 환경을 보면 당연히 낙망해야 될 텐데, 이상하게 평안한 겁니다. 이것이 곧 환경을 초월하는 내적 평안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평안을 얻지 못 할까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평안을 얻으려고 노력합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방이 온갖 좋은 조건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하나님이 평안을 주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사방이 형통케 됩니다. 설사 사방에 답답한 일이 생겨도 우리 영혼에 강물 같은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혹시 고난 중에 처한다 해도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세상 것을 가까이 하다가 하나님의 평안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래서 모쪼록 하나님을 찾으시고 그로 인해 사방이 평안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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