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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가 되라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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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사회는 신용사회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머리 좋고 학벌 좋고 능력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신용과 정직이 필수입니다. 신용이 좋으면 믿고 몇 십억씩 하는 물건도 외상으로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신용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에 가본 사람들은 신용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 것입니다. 신용에 따라서 금리가 달라집니다.

한 나라의 경제를 평가하는 일에도 경제규모나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등급으로 평가합니다. 나라도 신용등급으로 평가하고, 회사도 신용등급으로 평가합니다. 신용등급이 높다 낮다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 의 말입니다.

공산주의가 왜 무너졌습니까? 공산주의 사회가 무너진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기술도 있고 자본도 있습니다. 능력도 있고 다 있는데 신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아무도 안 믿습니다. 불신사회입니다. 아버지도 못 믿고 아들도 못 믿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비밀경찰이 있습니다. 서로 의심하고 상부에 보고 합니다. 결국 이런 공산주의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불신의 문제”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것,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노사가 서로 믿지 못하여 늘 분쟁합니다. 심지어는 정부가 국민을 믿지못하고,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합니다. 형과 동생이, 동생과 형이, 형제간에 믿지를 못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부모와 자녀까지도 그렇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부간에도 믿지 못하여 병원에 가서 친자식인지 침이나 지문에서 DNA를 추출하여 친자를 확인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못 믿고 세상도 못 믿고 누구도 못 믿고 아니 나 자신도 못 믿는다? . . . .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인생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신뢰란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망나니 같아도 참된 부모는 그를 믿어 줍니다.
서양 사람들은 ‘Seeing is Believing,’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속담을 만들어 냈습니다. 자연과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현대인들은 직접 자기 눈으로 확증하지 않는 것은 잘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언제나 “증거를 대라,” “직접 보여 달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고, 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못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본문에 보면 열 제자가 모여 있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감격하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팔일 만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번에 나타나신 것은 전적으로 도마를 위해 나타나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의심많았던 도마를 그토록 사랑하신 것입니다.

열 제자들이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에게 말하기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라고 하니까 도마는 아주 고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어! 말도 안돼!’ . .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일축 해 버립니다. 열 사람이 보았다는 데도 믿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10명의 부정적인 사람들이 반대할 때 가나안땅을 하나님이 주신 복된 땅이라고 믿음을 가지고 주장했습니다. 밖에서 이런 두 그룹의 사람들을 보면 다 똑 같은 사람들이라고 취급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분명히 다릅니다. 질적으로 다릅니다.

도마가 참 잘난 것 같지요? 아닙니다. 제일 못난 사람 중의 못난 사람이 의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은 의심과 불신이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분명히 의심은 좋지 않습니다. 사단의 도구입니다.
의심은 영적인 질병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마음의 질병 중의 하나가 ‘의심’이라는 병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고 의심입니다. 믿음과 의심은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담 하나 사이입니다. 금방 보기에는 의심이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미움과 증오, 살인 같은 무서운 죄가 의심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가정불화의 가장 큰 원인도 의심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의처증, 의부증도 의심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사단이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의심이라는 병에 걸리면 그때부터 기도도 안 되고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이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도 바로 이 의심 때문입니다. 사단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때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하면 될텐데,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지만 . .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이 말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때 사단은 이런 의심하는 마음을 곧 바로 공격합니다. ‘아니야. 죽지 않아 . .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어.’라고 유혹합니다. 결국에는 여자가 죄를 범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곤 했는데,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객주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많아서 작은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묵어야만 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두 사람은 서로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또 다른 나그네는 그 사람대로, ‘혹시 저놈이 내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식사기도를 하고 막 수저를 들었을 때,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저는 **교회 장로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국의 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한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는데 그가 생각하기를 이것은 이웃집에 있는 아이가 이 도끼를 훔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를 보나 그의 안색을 보나 그가 말하는 것을 보나 그 행동거지를 볼 때 틀림없다고 저 어린아이가 도끼를 훔쳤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산골짜기에 나무하러 나갔다가 잃어버렸던 도끼를 찾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에 그 집 아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의심하던 아이를 보았더니 그의 행동이나 태도나 얼굴이나 어디를 보아도 도끼를 훔칠 그런 아이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순진한 아이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이가 변한 것이 아니고 아이를 보는 자기 눈이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심은 병입니다. 의심은 불치병입니다.

도마가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도마는 은혜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19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당시 모여 있던 제자는 열 명이었습니다. 까닭은 은 30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창자가 터져 죽었고, 도마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20:24에 보면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 그 시간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할 도마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의심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은 다른 죄로 발전합니다. 의심이 불신앙으로 바뀌면, 분명히 불신앙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함께 모이기를 싫어했습니다. 이것이 의심이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의심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도하게 많아지면 그것은 사단이 틈타기 좋은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마처럼 혼자 있기를 원하고 모임에 가기가 싫어집니다.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와 성도들을 싫어하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자리를 멀리하고 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말세가 다가올수록 이런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히10:24-25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기예배에 모이기를 힘서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면 우리의 신앙이 더욱 뜨거워집니다.

성도는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드려야 할 시간에 다른 곳에 있으면 안됩니다. 은혜 받아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성도가 은혜 없는 곳에서 방황하면 안됩니다. 마귀의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또 다른 죄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이기를 힘씁시다.
믿음은 말씀에서 옵니다.

사람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으며 사는 사람, 믿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 또 하나는 의심하고 오해하며 비판하는 태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소망의 방향을 향하고 있고 소망적인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두움을 향하고 있고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파괴적이고 불행한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믿으려는 본성, 믿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믿게 되고, 믿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결국 안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으려는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된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벧전1:23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말만 들어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보아야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보려고 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자꾸 보여주려고 합니다. 뭔가 화려하게 꾸미고, 기가 막힌 디자인을 합니다.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가짜일수록 더 진짜처럼 화려합니다. 너무 화려하고, 너무 멋있으면 오히려 일단 의심해봐야 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말씀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고, 놀라운 체험을 많이 하면, 더 잘 믿고 신앙이 성숙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착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바로에게 행하시는 10가지의 재앙을 직접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습니다. 메추라기를 먹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많은 기사와 이적을 많이 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 모두가 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지도자 모세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 살다보면 우리 마음에 의심과 절망이 얼마나 많이 찾아 오는 지 모릅니다. 그럴수록 모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의심이 들수록 우리가 할 일은 예배의 자리, 은혜의 자리, 말씀의 자리에 더욱 열심히 나아가서 말씀을 듣고 믿음을 회복해야 할 줄 믿습니다.

도마에게 예수님은 “도마야, 만져 봐. 그리고 믿는 자가 되라.” 아무런 꾸중도, 비판도 하시지 않고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의 말씀을 듣는 순간 도마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물러가고 믿음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상식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고 자기생각도 아닙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의심은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간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의심이 생기면 가까운 친구도 가까운 부부도 멀아지고 간격이 생깁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간격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언제 그 간격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파스칼은 “믿음이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이성과 자기경험과 자기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의심의 단계에 머물렀던 성도들은 이 시간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심 많던 도마가 다행스럽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어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창에 맞아 죽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어느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비를 뽑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도마에게 떨어진 선교지는 인도였습니다. 도마는 처음에 자기는 몸이 약하기 때문에 인도까지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예수님의 설득으로 도마는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오늘날 남인도 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마는 쉽게 확신이 서고, 쉽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무슨 일이든지 확실하게 해내는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지금도 인도에는 도마교회가 곳곳에 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책임을 다하고 자유의 나라로 가오니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도마가 순교할 때 남긴 기도로서 외경인 도마복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믿음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지 아니하고 믿는 믿음은 더욱 더 복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귀중하게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일이 다 확인해보고 믿는 것은 복된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믿어주는 것 만치 귀한 일은 없습니다. 1858년 뉴욕에 어느 가정에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소아마비요 시력도 약하고 천식까지 있어서 촛불을 끌 기력도 없는 허약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리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면 오히려 장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하게 될 것이고 신화와 같은 기적을 낳게 될 것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 이 아이가 자라서 스물세살에 뉴욕주 주의원이 되고 28세에 뉴욕 시장 출마하고 주지사와 부통령을 걸쳐서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미국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입니다. 믿어주는데서 큰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심에도 큰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고 의심에는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예배실 안에도 영적인 전파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파와 사탄의 전파가 흐르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내시는 전파를 받을 수 있는 사이클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약속의 말씀들을 믿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반대로 의심이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사탄의 전파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서는 거대한 용량의 잠재의식이 내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느 과학자는 인간에게는 150억 정도의 세포가 있는데 그 중에 136억 5천 300만개가 잠재의식에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잠재의식은 신비할 정도로 놀라운 기능을 가집니다.

로렌츠(Lorenz:1903-1989)라는 박사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동물행동학자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새를 시험하였습니다.
로렌츠는 어미 오리가 낳은 알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서 다르게 부화시켰습니다. 한 집단의 알은 어미가 부화시키고, 다른 집단의 알은 로렌츠가 부화를 시켰습니다. 로렌츠 박사가 부화시켜깬 새끼 오리는 로렌츠 박사를 어미처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로렌츠 박사는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를 따르는 추종행동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새끼 새가 태어날 때 제일 먼저 눈으로 보게 된 대상을 늘 졸졸 따라다니면서 자기 어미인 줄 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진짜 어미 새가 나타나도 따르지 않습니다. 다른 새들도 조사해 보니 그런 현상이 나타나더랍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지금도 가마우지를 이용한 물고기 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용되는 가마우지는 어부(?)가 알에서부터 직접 부화를 시키고 먹이를 먹여서 기른 가마우지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각인이 된 가마우지는 절대 도망가거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부터 가정이나 부모, 친구나 학교에서 영향 받은 모든 것을 잠재의식에 입력 저장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그의 성격, 그의 태도, 삶의 질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린 아기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때라도 젖을 먹이면서, 혹은 잠을 재우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일생 신앙의 큰 영향을 심어준다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믿는 자가 됩시다.

1. 의심은 영적인 질병입니다. 2. 도마가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은혜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3. 믿음은 말씀에서 옵니다. 4. 보지 못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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