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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의 수에 가입하라 (행 1: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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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가 언덕에서 굴러 여러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사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장 억울하게 죽은 네 사람이 밝혀졌습니다. 
  결혼식이 내일인 노총각
  졸다가 한 정거장 더 오는 바람이 죽은 사람
  버스가 출발하기 위해 문을 닫았는데 막 두드려서 운전사에게 핀잔 들으며 탄 사람
  96번 버스를 69번으로 잘못보고 탄사람

  성경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을 찾는 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은 아무 죄도 없이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이나 달리는 십자가 형을 받고 죽으셨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억울한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무슨 죄라도 다 용서받고 구원받는데 몰라서 못 믿고 지옥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억울 하다기 보다는 가장 불쌍한 사람한 사람을 말하려고 합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 이유는 택함 받았다가 버림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택하신 제자 12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니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도의 직무를 버리고 제 길로 간것입니다. 행 1:25절에서 유다는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제자의 수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수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제자의 수에 들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제자의 수는 축복의 수입니다. 축복의 숫자에 포함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내 뜻이나 내 실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으로 되어집니다.
  그러나 유다는 제자의 수에는 들었지만 참 제자는 되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수에는 들었는데 참 성도가 되지못한 자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수에 들었어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지 못하고서는 버림받는 일이 있습니다. 수에 드는 일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지만 참 제자가 되는 일은 끊임없는 훈련과 연단으로 됩니다.

  그리고 한 직무를 맡았던 자입니다.
  수에만 들어도 직무가 주어집니다.
  직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직무를 통하여 그의 신앙을 연단 하시고 참 제자가 되도록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않는 자는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훈련을 위해 주신 직무를 소홀히 하면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성품을 닮은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무를 주시는 것은 그 직무를 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직무를 통해 나의 인격을 연단하고 주님을 닮은 천국의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의 직장이나 어떤 단체에서는 사람에게 일을 줄 때에 어떤 이익을 내기 위한 일을 위한 일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을 위한 직무를 주지 않습니다. 직무를 자신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훈련시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직무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이 상처받으면 안됩니다.
  가룟 유다는 일 때문에 상처받다가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일을 잘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무엇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은혜로 화목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언니 마리아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서 여러 가지 음식 준비하는 일로 너무나도 바빴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 주려고는 하지 않고 주님 곁에서 주님과 대화하는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마음이 바쁘고 분주해진 마르다는 속이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와서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눅10:41절에 보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마리아에게 상처받았습니다. 자기 혼자 일하게 내버려두시는 주님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 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의 재정 관리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빈틈없이 재정을 처리했습니다. 적자가 되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그의 머리는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여인이 300데나리온의 물질을 주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대단히 기뻤습니다. 그 돈 만 있으면 모든 적자를 메우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재정을 맡은 유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엄청난 양의 보물을 주님의 머리에 다 쏟아 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가 난 나머지 그 여인을 꾸짖었습니다. 마26:8절에서는 제자들이 꾸짖었고 했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마 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요 12: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활동하고 전도와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는 예산이 얼마나 부족한데 그 많은 돈을 다 땅 바닥에 쏟아 부어 허비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여인을 향한 꾸짖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불평이었습니다. 재정을 관리하는 자신의 수고와 어려움을 예수님은 조금도 헤아려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인을 책망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마26:10절에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직무 감당하면서 많은 일을 하고 훌륭한 결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큰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에게 좋은 편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향유 부은 여인도 많은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많은 일을 분주하게 했지만 상처받았습니다. 가룟 유다도 자기 일을 잘하려고 했지만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상처 받고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이 때 부터 가룟 유다는 주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26:10절에 보면 그 사건이 있은 다음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 차라리 가룟 유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직무도 안 받은 것이 나을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직무를 주어서 인격과 신앙을 훈련시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고 일군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그의 욕심이었고 그의 완벽 주의였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음 그 자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 때문에 누구를 원망하고 상처받으면 안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불평하며 원망하고 하면 그 상급을 잃고 맙니다. 
  눅22:3절에 보면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말하였습니다. 일 때문에 시험 들지 마십시오. 모든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눅 22:3)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유다는 시험들어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기 길을 갔습니다.
  유다가 더 잘하려고 하다가 시험 들어서 버리고 간 자리를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20절에 보면 베드로가 시편 109장 8절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 대신에 다른 사람을 세울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두 사람을 택하여 제비뽑았습니다.
  맛디아라고 하는 사람이 당선되어 제자의 수에 가입하였습니다. 즉 처음에는 12제자의 수에 들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가입하게 된것입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축복의 수에 들어가는 것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라도 그 축복의 수에 들어가는 것이 복입니다. 유다가 버리고 간 그 빈자리를 맛디아를 뽑아서 채웠습니다. 처음에는 사도가 아니었으나 나중에 사도가 된 사람이 바로 맛디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중에라도 그 수에 가입해야 합니다.

  누가 축복의 수에 가입하게 될까요?
   
  ① 들어나지 않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헁1:21-22절에 사도를 보충하기 위한 그 자격을 말하고 있는데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어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는 아니었지만 사도처럼 산 사람을 뽑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뽑힌 것이 맛디아입니다. 맛디아는 그는 정말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부터 지금까지 항상 함께 다닌 사람입니다. 사도가 아니었음에도 사도 같이 살았습니다. 항상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반하여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나를 따라오라는 부름을 받은 적도 없는데 그는 부름받은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목사가 아닌데 목사처럼 사는 사람, 장로가 아닌데 장로처럼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직분 받아 충성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받지 않아도 충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맛디아입니다. 그는 사도가 아닌데도 사도처럼 살았기에 나중에 사도의 수에 들게 된 것입니다.
 
  ② 끝까지 따른 사람입니다.
  즉 변함이 없었습니다.
  행1: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부터 승천하실 때 까지 변함없이 예수를 따랐던 사람을 뽑았습니다.  선택받았던 제자들도 실망하며 낙심하는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를 따른 사람, 즉 예수가 살아 있을 때에도 그 곁에 있었고, 예수님이 죽었을 때에도 그를 버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부활의 증거자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행1:22)

  ③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은 기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나중에라도 복의 수에 가입 시켜주십니다.
  성경에서 나중에 축복의 수에 가입된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실린 기생 라합입니다.
  라합은 본래 축복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멸망 받은 여리고 성의 기생에 불과했습니다. 70인역 성경에는 그를 매춘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축복의 수에 가입되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 들었습니다.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그는 다윗왕의 고조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일개 멸망 받을 성의 기생이 일약 한 나라의 왕의 고조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라합 한 사람 때문에 여리고 성의 역사가 바뀌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46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일에 공헌한 5대 여인 중에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멸망의 백성이었지만 나중에 수에 가입되어 복을 받은 라합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를 “믿음” 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히11:31).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말로만 나타난다면 그것은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행함과 더불어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은 아는 것을 행합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바클레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쳐서 이길 확률은 1000분의 1이었다고 연구하였습니다,
  어쩌면 라합이 가진 이스라엘이 이길 것이라고 하는 믿음은 조롱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알았고 확신하였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초대 교부 크리스소톰은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느냐 ? 좋다 그러면 나도 온 세상을 반대하리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맛디아 처럼 믿읍시다.
  말없이, 끝까지 따르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라합처럼 믿음시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하나님께서 축복의 수에 들게 하십니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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