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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해답이신 예수 (요 11: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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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항상 세 가지 숙제를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인생이 숙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지 못하면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첫째가 허무의 문제입니다. 솔로몬은 해 아래에 있는 인생의 삶에 대해서 한 마디로 허무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삶이란 아무리 잘 살아도 지나놓고 나면 허무하다는 느낌에 공감을 가집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해 아래에서 얻은 모든 것이 사람에게 보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둘째 인생에게는 모순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나는 착하게 살고 싶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속에 착함도 있지만 내 속에는 누구보다도 악함도 자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다 평안을 누리며 살고 싶은데 실제로는 고민하고 상처받으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셋째는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도 항상 죽음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생은 죽음에 대해서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끝이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도 두려운 일이지만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더 큰 이유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 때부터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시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싫컨 해 본 후에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인이 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죽은 자에 대한 권리를 가지신 주님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죽음으로써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이 죽음에 대해서 분명한 믿음이 있으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해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바른 믿음이 없으면 숙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주님의 가르침은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산다해도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예비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육체로 보면 모든 죽음은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죽음은 일반이라 고 했습니다.
(전 2:16)'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죽음과 일반이로다'
(전 3:19)'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죽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불신자의 죽음이요 또 하나는 성도의 죽음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죽음에 대해서 표현할 때 성도의 죽음과 불신자의 죽음을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고 난 이후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뉘어 진다고 요한복음 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 116:15)'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똑 같다고 말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다른 것은 세상이 아니라 죽음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상황과 인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마음 편하게 찾으실 수 있는 집이 바로 베다니 나사로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급하게 오셔서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틀을 더 지체하신 후에 나사로의 가정에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만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섭섭함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마르다와 마리아는 상황을 보는 마음이 달랐습니다. 서로 다르게 표현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해석되어 지는 것입니다. 우선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병들었나이다 고 했고 주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려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인간의 불행들을 보는 시각에 새로운 것을 보게 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상황과 자신을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은 상황과 하나님의 뜻을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상황 인식이 필요합니다. 내 감정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자세가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을 팔았던 사실밖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나를 먼저 이 곳에 보내었나이다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팔린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하나는 육체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고 하나는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보는 것입니다. 그 곳에 영적 세계가 보여지는 것이고 새로운 세계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써 장례식을 집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례식에 가면 두 가지 사실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천국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만 보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러한 두 가지 현실 앞에 서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주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오라버니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24절 말씀에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고 했습니다. 분명히 마르다에게는 두 가지 사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죽은 자 앞에서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보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현실 앞에서 붙잡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덤에 가는 것을 보고 곡을 하러 무덤에 가는 줄 알고 따라 가더니(31절)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마음에 통분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라가서 나사로가 부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은 현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보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것에만 목적이 있었다면 일찍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것입니다. 사실 주님 앞에서 나사로가 살고 죽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서 주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했을 때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나사로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가족들의 정성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그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은 생명이 되고 그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이어라는 성경학자가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만약 주께서 그냥 나오너라 라고 했으면 그 동산에 있는 모든 시신이 다 일어날 뻔했는데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지칭했기 때문에 나사로만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사로 생명의 주인도 나사로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누구라도 인생의 생명은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 것은 내 생명을 살릴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돌문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위대한 일을 하실 때에도 언제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사람으로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놀라운 가르침이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돌문을 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돌문이 저절로 열리기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돌문을 여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이고 믿음입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채 주님이 하실 일만 하시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그 순종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의 처음도 순종을 요구하셨고 기적의 나중도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순종한 이후에 나중에 순종에 실패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에서도 남은 것을 거두라고 했고 거두니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는 어렵고 힘들 때에는 잘 순종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충성을 하다가 문제가 해결 된 후에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누리는데 급급하다가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다 잃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나중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는 일에 사람이 순종하면 주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 메고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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