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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 계신 주님 (계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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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2종류의 백성을 말한다. 하나는 이 땅의 백성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땅의 백성은 이방인으로 고임(ם󰖹וֹגּ)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암(ם󰘞)이라고 한다. 고임(ם󰖹וֹגּ)은 게바(ה󰕯󰕂, 올라가다, 높아지다, 흘러가다)에서 왔다.

  고임(ם󰖹וֹגּ)은, “스스로의 힘으로 높아지고, 올라가려 하다가, 역사의식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맘(ם󰗫אָ, 함께 하다, 울타리에 거하다, 모으다, 결합하다)에서 왔다. 하나님의 울타리에 거하며. 함께 하며, 백성이 선민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 안에 거한 자이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이겨야 한다.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하고, 고통을 같이 당한다는 말이다.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다른 사도는 전부 순교 당했고, 오직 사도요한만 순교 당하지 않았다.

그는 밧모섬에 유배당해서, 요한계시록을 썼다. 지금이라도 믿지 않겠다고 하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예수님과 환란을 당하는 자리에, 끝까지 동참하였다.

  하나님의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했고, 함께 고난 당했다. 주님을 위해 함께 고난 당함이, 형제 됨의 증표다. 이런 증거를 가지시기 바란다. 요한계시록을 쓸 때는, 도미티안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기억될 만한, 로마 황제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디도 황제의 동생이었다. 디도는 A.D.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유명한 황제로서, 뛰어난 전략가였고 대단히 지혜로운 정치가다. 디도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결코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도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도미티안은, 형에게 자격지심을 느꼈다.

  그래서 형과는 달리 매우 잔인했고, 기독교를 대단히 반대하였다. 바로 이 도미티안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로마 황제를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이 아니더라도, 로마의 통치가 미치는 곳에서는 누구나 “시저는 나의 주님이다”고 서로 인사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나의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일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순교의 제물로 희생당했다. 물론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의 재물이 되었다. 이들이 이렇게 순교한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깊은 실망을 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마지막이 아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고 부활하셨다. 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다가, 사도 요한은 붙잡혀, 밧모 섬에 귀양 왔다. 그는 이 무인도에서 살아 계신 주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며 지냈다.

  그리고 18절에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중요한 말씀을 받는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 살아 계신 주님은 무엇을 하시는지, 요한은 게시를 보고 편지를 썼다.

1. 교회를 다스리신다(11-16).

  11절에 7교회가 등장하는데, 2장과 3장에도 등장한다. 그 당시 소아시아에, 이 일곱 교회 이외에도 많이 있었다. 이 교회들보다 훨씬 큰 교회들도 있었는데, 왜 7교회만 뽑았나? 그 이유는 이 7교회가,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대표하기에, 이 편지를 보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이 교회를 다스리시며, 심판하시고, 주관하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구약의 촛대는 7가지를 가진 촛대이지만, 여기는 7개의 금 촛대를 말한다. 이 촛대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20절을 보면 교회라 했다. 왜 교회를 촛대로 상징했는가? 촛대는 빛을 발한다.

  이처럼 주님의 몸인 교회는, 세상에 빛을 발해야 한다. 교회를 다스리시는 살아 계신 주님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신가? 그 촛대들 사이로 다니는,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12-13).

(1) 인자 같은 이
요한은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눈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모습과 전혀 다른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는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단7:13-14)의 예언 같이, 요한은 촛대 사이에 서신, 그 분의 영광스런 위엄 앞에 놀라며 감격했다.

더 이상 고난의 종이 아니라,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고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과 영광 중에 존귀한 자리에 앉으셨다.

(2) 발에 끌리는 옷
옛날 제사장들의 옷은, 발에 끌리는 옷이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신다. 대제사장의 책임은, 사람들의 문제와 죄와 고통과 염려를 대신 짊어지고, 해결자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오면, 모두 책임지신다. 주님은 교회 사역을 통하여, 세상의 짐과 성도들의 짐을 해결하신다.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는, 이 세상의 무거운 죄 짐을 짊어지고,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

(3) 가슴의 금 띠
금띠는 왕이 띤다. 예수님은 제사장이실 뿐만 아니라, 왕이 되신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기에, 우리의 생활과 생각까지 모두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이른바 예수님의 주권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확립할 때,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다.

(4)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머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임을 말씀한다. 또 희다는 말은, 지혜를 뜻하기도 한다. 전지하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아신다.

(5) 불꽃같은 눈
주님은 우리 마음 속까지 꿰뚫어보신다. 주님은 모두 다 아시기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아무리 은밀히 죄를 지어도, 주님께서는 다 보신다. 또한 불꽃같은 눈은, 심판하시는 눈을 말한다. 죄악을 보실 때, 그냥 두지 아니하시는, 전지 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6) 풀무에 단련한 주석 같은 발
풀무에 단련한 주석은, 질그릇이나 도자기나 쉽게 깨뜨릴 수 있는 심판의 발이다. (롬16:20) ‘사단을 그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했다. ‘발로 밟아 버려’는 정복자, 승리자를 말한다. 발은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 통치를 말한다. 주님은 진정한 정복자요, 진정한 승리자이다.

  세상에서는 네로가 승리자요, 도미티안이 승리자다.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은 패배자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세상의 정복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7) 많은 물소리와 같은 음성
나이아가라폭포가 떨어질 때, 큰 소리가 나기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는 권세 있는 말씀을 상징한다. 교만할 때 파도소리처럼 철썩 하면서, 우리를 경고하실 때가 있다.

  또한 개울물처럼 세미한 음성으로, 감미롭게 다가오는 주님의 음성도 있다. 이렇게 주님의 음성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때론 우리에게 사명감을 촉구하며, 새 명령을 지시하시는 음성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때론 위로하시는 음성으로도 나타날 때도 있다. 형편과 처지에 맞게 말씀하신다.

(8) 오른손에 있던 일곱 별
별은 교회의 사자를 상징한다. 오른손이라고 한 이유는, 2가지 의미를 갖는다. 옳다는 의미다. 오른 편에 앉은 자는, 옳았기에 상 받는 자다. 또한 오른손이 더 힘이 있기에, 권능을 말한다.

  교회가 연약하고 부패함이 있어도, 하나님의 종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주님께서는 교회와 종들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교회인데, 교회를 붙들고 계신 주님으로 인하여, 용기를 얻으시기 바란다.

(9) 그 입에서 나온 좌우에 날선 검
좌우에 날선 검은, 그 당시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는 단검으로, ‘식카르’라고 하였다. 라틴어 식카르와 식칼과 발음이 비슷하다. 조금 길게 발음하면 같아진다. 로마는 이 검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고 했다. 또 (계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고,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이와 같이 검은, 심판의 사역을 상징한다. 주님은 심판의 주님이시다.

  마지막 날에 열방과 민족과, 온 세계를 심판하실 바로 그 주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인간의 언어도, 창조력이 있고 파괴력이 있기에, 우리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마12:36).

(10)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얼굴
생명과 영광스런 얼굴이다. 이 놀라운 생명의 주님, 영광의 주님이 교회들 가운데 다니신다. 주님의 빛 앞에는 아무도 설자리가 없다. 그 당시 교회는 미약하고 연약했고, 이방의 신상은 아주 컸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교회였기에, 용기 백배하여 힘있게 싸울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이방 신전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죽은 신이기에 커도 소용이 없다.

  죽은 고래는 물결에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 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2. 죽음을 다스리시는 주님(17-18).

영광스러운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말씀하셨다. “곧 산 자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영원히 살아 있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 주님은 “내가 전에 죽었노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 계신 분이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염라대왕이나 사단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한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허락이 없이는 죽을 수도 없고, 지옥에 갈 수 없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 개인의 성공과 실패의 열쇠를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다. 인간이 가진 최대의 공포는 죽음이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다면, 죽음은 그렇게 두렵지 않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었다 살아나셨기에, 우리도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다. 저 유명한 콘스탄틴 황제 때에,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됨으로,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핍박이 일단락 되었지만,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AD. 360년대 ‘줄리안’이란 황제가 등장한다.

  그는 콘스탄틴의 조카 뻘 되는 황제로, 별명이 ‘배도자’였다. 도미티안 이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어떤 무명의 성도가 원형 경기장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줄리안 황제가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황제는 “어째서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의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줄리안 황제는 비웃으면서, “네 주님이 살아 계신다고?, 그러면 지금 그 나사렛 목수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때 무명의 성도는 줄리안 황제에게 “폐하, 내 주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폐하 같은 사람을 위하여 관을 짜고 계신다”고 했다. 얼마나 당당한가? 이것이 361년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는 얼마 못 가서, 전쟁터에서 죽는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유명하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진정한 승리자다” 이처럼 예수님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죽음을 다스리신다.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비록 우리는 죽음 앞에 서 있어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에게도 죽음은 있지만, 죽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알기에, 낙심할 수 없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는, 죽음 앞에서 염려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살아 계신 주님, 역사와 사람과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 저도 군대에 있을 때, 죽기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으로 위협할 때에도, 군사작전 지역에서도 북한 사람들이 듣고, 깨달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3.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19-20)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시록 1장의 시점에서 사도 요한은 이미 본 것이 있었고, 보고 있는 일이 있다. 또 보게 될 일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이미 본 것은 1장의 내용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살아 계신 주님이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다. 처음에 주님을 보여주고, 바로 주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아야 할,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의 모습을 언급한다.

  2,3장에 교회에 대한 비전이 나오는데, 이는 현재의 일이다. 그리고 4장부터 마지막까지 장차 있을 일이다. 그 내용은 역사 속에 임할, 하나님의 보좌에서 심판과 영광, 주님의 재림이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불러, 사도 요한에게 그 비밀(미스테리온)을 다 보여 주셨다. 그러면 무엇이 비밀인가?

  그리스도가 비밀이다. 세상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기 때문이다. 또 영적인 진리가 바로 비밀이다. 아무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비밀이다. 교회는 신비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안 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가 아니다.

  하늘 나라가 비밀이다. 은혜가 비밀이며, 하나님의 경륜이 비밀이다. 이렇게 모든 비밀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 이 말은 주님께서는 역사를 다 아신다는 말이며, 주님의 계획 아래 있다는 뜻이다. 주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는 역사의 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6장 이하에 이 땅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그 역사 속에서 어떻게 간섭하시고 다스리는가 보여주신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세워 놓은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심판하시며, 마침내 역사 속에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그러한 비전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자들로 하여금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변을 보기 전에 먼저 주님을 보아야 한다. 세상에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연약함 때문에 울어야 한다.

그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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