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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고후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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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2월 첫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어제는 봄에 들어서는 입춘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입춘대길’이라는 글을 대문에 써 붙이고 봄이 오면서부터는 뭔가 일이 잘 풀려가고 형통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는 여러분의 삶 속에도 봄이 오는 소리와 함께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의 역사들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읽어드린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쁨은 인생의 행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돈보다도, 건강보다도, 명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기쁨의 종교’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쁨이라는 말이 수없이 나옵니다.
시편 16장 11절에는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2장 4절에는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 처럼 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얼마전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다시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면서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의 최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배의 침몰과 함께 서서히 죽음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행동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침대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끝까지 발버둥치며 죽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사람, 돈으로 구명보트를 사려고 애를 태우는 사람, 나름대로 기도를 드리며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는 사람, 바로 그 때 카메라는 배 위의 악사들을 줌업하여 화면 가득히 비추고, 스피커는 감동적인 연주소리를 토해냈습니다. 너무도 우리 귀에 익숙한 찬송가 364장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 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과연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과연 악사들처럼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라고 찬송을 부르며 장엄하게 그리고 경건하게 이 땅의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본능은 내 삶의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서도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하고,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먼저 주님의 기쁨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되므로 여러분 자신도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자세이고, 소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화요일 오후에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현대 홈타운에 사시는 우리교회 박길자 집사님의 딸의 전화였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뇌수술을 받았는데 5일만에 방금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셔서 자초지정을 이야기했더니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 주셨다고 하면서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기도를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이름도, 목사 이름도, 전화번호도 다 잊어 버리셔서 딸이 114에 전화를 걸어서 현대 홈타운 근처에 있는 교회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서 저에게까지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박집사님은 금년 58세의 젊은 나이로서 평소에도 건강한 분이셨는데 친목계를 하다가 어지럽다고 하면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 후 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았는데, 뇌수술 후 5일만에 깨어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병원에 가서 기도해 드리고 나서는 ‘집사님,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으니 남은 여생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세요’라고 권면을 드렸습니다. 목사로써 바램은 앞으로 집사님께서 전도하며, 교회 일에 충성을 다하셨으면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복음성가 중에 이런 곡이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노래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이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이 기쁨이 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자세이고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10절 말씀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시험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인 할버튼(Hiding Halveston)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느날 내 아들과 이웃집 아이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을 잘 안다’고 했다. 이때 내 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대꾸했다. 갑자기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서재로 들어가 나는 실컷 울었다”라는 고백입니다. 만약 자녀에게 이런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아버지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가까이에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창세기 5장 24절 말씀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행복함이 넘쳐흐르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도 동행하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동행하고, 원수한테 쫓겨 헐떡거릴 때도 동행하고, 머리에 기름이 철철 흘러넘쳐 존귀한 지위를 차지할 때도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을 만나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하고, 사고를 만나기도 하고, 쓰라린 좌절과 실패와 배반을 맛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어려움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프랑스에 ‘샤르’라고 하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샤르 황제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시인으로 굉장히 명성이 높은 ‘따소’라고 하는 사람을 불러 놓고 “내가 한 가지 고민이 있어서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오?”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시인 따소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거야 하나님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화가 났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하나님을 물었나?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보시오.” 이번에도 따소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뻔하지 않습니까? 가장 행복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그리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황제도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이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해야겠구나’ 하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과 동행하려면 평생에 걸친 모험과 경건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더 의지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다가 쓰라린 좌절과 배반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주님의 기쁨이 되기 원하는 삶의 목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무엇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 뿐 아니라 삶의 모습과 질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부자는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권력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높은 권력의 자리에 있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언젠가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에는 인생의 참된 행복을 맛보지도 못한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란 분이 쓴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에 보면, 현대인의 삶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 했습니다. 하나는 충동에 이끌리는 삶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명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충동에 이끌리는 삶은 하루하루 충동적이고, 본능적으로 감정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고, 상처받고, 상처를 주면서 인생을 상처투성이로, 전쟁터로 만들어 놓고 갑니다. 믿음이 연약한 분들이 때때로 교회를 다니다가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보면,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앞장서서 일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굉장히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성장이 안 된 앉음뱅이 신자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교회는 오래다녀서 아는 것도 많고, 직분만 높지 내면적으로는 자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명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남부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장성한 네 아들을 둔 어머니가 병원에서 임종을 하게 되었는데 그 어머니는 아들들을 다 침대에 둘러서 모이게 하고 난 다음 큰 아들부터 차례로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러데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에게는 차례로 “애들아, 엄마가 이제 죽었다가 천국에서 깨어나니 굿나잇! 하면서 키스를 해 주렴”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내 아들 앤디에게는 “앤디야, 엄마에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라고 말했습니다. 엔디는 이상해서 “엄마,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고 왜 나에게는 굿바이 인사를 하라고 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마지막 힘을 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앤디야, 너희 형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죽음의 밤을 지나 부활의 영광스러운 아침에 깨어나서 이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너는 아무리 전도를 해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네 고집대로 세상을 따라 살기 때문에 너와 나와는 영원히 이별 할 것이 아니겠니? 그러므로 내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 그러자 막내 앤디가 무릎을 꿇어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나도 굿나잇 키스할래요. 나도 예수님 믿고 저 죽음의 밤을 지나 천국의 아침에 깨어나서 엄마와 같이 만나겠어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앤디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어머니에게 굿나잇 키스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를 믿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제목의 책에 보면 인생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에 이끌린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5가지 유익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적을 아는 것은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귀중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을 알면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이 단순해집니다. 목적을 알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헛된 것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셋째, 목적을 알면 초점을 맞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에 힘이 있습니다.
넷째, 목적을 알 때 삶의 동기가 유발됩니다. 목적은 열정을 만들어 내고, 그 목적을 향한 열정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목적을 앎으로써 영생을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면 세상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흔히 딩크족이나 퉁크족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딩크족이라는 것은 ‘Double Income, No Kids’라는 말입니다. 부부간에 서로 취직을 해서 수입을 배로 불리고 아이는 낳지 말자, 우리 둘이 오순도순 살아보자는 것을 일컫습니다. 퉁크족은 ‘Two only, No Kids’로 나이가 늙어가면서 우리 둘이 벌은 돈은 꼭 자식들에게도 주지 말고, 손주도 주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딩크족이나 퉁크족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잘못되니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창조된 첫 번째 목적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하고 첫째 가는 목적입니다.

  지난 주간 기독교 계통의 신문에 실려 있는 포천 중문의대의 이병욱 박사의 『새해에 흘린 눈물』이라는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의대교수이며 의사인데 연말에 몸이 많이 아파 큰 수술을 받았는데 사경을  해맸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통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가 치료해 오던 암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랐으며 ‘낫는다면 더 잘 해 드려야지’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송구영신예배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드린 후,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두 아들을 앞에 앉혀두고 새해 권면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아빠가 사경을 헤매면서 너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한 가지 한다. 지금까지 아빠와 엄마로 인해 너희들에게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면 먼저 다 용서해 다오. 이 아빠가 부족해서 너희들에게 준 잘못이지. 이 부족한 아빠가 너희 곁에 없어도 너희들은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단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참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거라. 아빠도 참 공부를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매달리고 의사가 되기를 소원하니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단다. 너희들도 늘 깨어서 기도하고 공부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바란다. 그러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단다. 새해에는 매일매일 말씀 두 절씩 암송하고 영어로도 꼭 암송하여라. 예배에 최선을 다해라.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목사님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니 꼭 실천하여라. 하나님의 비전과 소명을 알아서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깨닫기를 바란다. 누군가 너희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풍성하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거라. 십일조를 철저히 하거라.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주님께 감사하고 반성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거라.

사랑하는 아들들아!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아빠의 아들이다. 너희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새해에도 늘 형통하고 강건 하거라. 너희 모든 가문의 권속을 수천배 수만배 축복한다. 아빠는 너희들이 늘 같이 있어 행복하단다.

  그날 삼부자는 서로 안고 새해 첫날부터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분명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려면 믿음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 줄 믿습니다. 말 잘한다고 믿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것을 실천하는 능력이 삶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지난해 12월 5일 국민일보에 파키스탄 지진 현장의 기적 보도가 있었습니다. 파키스탄 파타카에서 지진 피해 이재민들을 돕던 기아대책 긴급구호팀은 죽어가던 한 청년을 기적적으로 흙더미에서 끌어냈습니다. 10명으로 구성된 구호팀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 한 청년을 끄집어내어서 보니까 그의 몸은 죽은 사람처럼 싸늘해서 얼어붙어 있었고 맥박도 거의 뛰지 않았습니다. 구호팀은 청년의 몸을 맛사지하고 임시방편으로 침을 놓아 피를 빼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구호팀 중 한 분인 목사님이 합심기도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청년을 붙잡고 청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후에 목사님이 청년을 향해서 되든 안 되든 해보자고 하면서 “청년아! 일어나라!”라며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자 꿈쩍도 안하던 청년이 눈을 번쩍 뜨고 부시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청년이 말하기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나를 만지고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를 듣다 몸에 힘이 생겨 눈을 뜨고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마른 골짜기에 널려있던 뼈다귀를 향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하나님이 아시나이다” “생기로 명하여 이 뼈들에 들어가 살게 하라!” 에스겔이 순종했을 때, 그 뼈에 힘줄이 돋고 살이 돋아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를 전파하고 축복기도하고 명령하면 생기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려면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 원하는 삶이 되려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한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을 주님이 기뻐하시므로 여러분에게도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명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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