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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피 (벧전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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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례의 의미

기독교는 성찬식과 세례식, 이 두 예식을 일컬어 성례(聖禮)라고 합니다. 곧 거룩한 예식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는 물속에 몸을 잠그는 침례를 의미하는데, 몸을 물에 잠그는 것은 옛사람이 죽는 것을, 물에서 나오는 것은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와 더불어 세례는 교회의 정식 회원이 되는 입교식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성찬식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물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행위는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죄 사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5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58)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고 하셨던 것입니다.

교회가 세례와 성찬을 성례로 정하고 시행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이 두 예식을 행할 것을 믿는 자들에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에 관해서는 “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고 하셨고, 성찬에 관해서는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예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저는 성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피의 제사를 명하신 이유

먼저,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중요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기독교 신앙은 구약의 유대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제사 중심의 신앙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여러 종류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의 종류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 등이 있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제사이고, 속죄제와 속건제는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이나 전자는 주로 하나님께 범한 죄를, 후자는 주로 사람에게 범한 죄를 사함 받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화목제는 속죄제를 드린 후에 죄 사함 받은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제사입니다. 이 때 화목제의 제물 중 일부를 백성이 되돌려 받아서 가족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소제는 곡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로서 다른 제사들처럼 독립되지 못하고 주로 다른 제사를 드릴 때 함께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제를 제외한 모든 제사는 반드시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가축을 제물로 드렸는데 이 때 반드시 제물의 피를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를 속죄를 위한 제물로 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현대의 의학책에도 “혈액은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물질로 생명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즉 혈액은 생명을 의미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의 역할은 영양소를 몸의 각 조직에 운반해 주고, 폐에서 산소를 받아 몸의 각 조직에 보내고 탄산가스를 폐로 이동해서 몸밖으로 배출하게 합니다. 또 몸의 각 조직에서 생긴 노폐물을 신장이나 여러 배설기관으로 운반합니다. 그뿐 아니라, 몸에서 생산된 호르몬을 필요한 곳으로 보냅니다.

이처럼 피는 운반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수분이나 체온, 체액의 ph를 조절하고, 핏속에 있는 백혈구는 몸에 침투하는 세균을 잡아먹음으로 몸을 방어합니다. 우리가 피의 기능에 대하여 알지 못할지라도 지금도 피는 일 분에 우리의 온몸을 한 바퀴 순환할 만큼 빠른 속도로 돌면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를 과도하게 흘리거나 순환에 장애가 생기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수술도 수혈할 피가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피가 중요하기 때문에 헌혈을 일컬어 생명을 나누는 행위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인은 자기의 목숨으로 값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꾄 뱀을 저주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 말씀은 뱀에게는 파멸의 선고이지만 아담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최초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언급하신 “여자의 후손”은 곧 동정녀의 몸에서 나실 메시야를 가리킨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메시야가 오셔서 마귀를 멸하실 것을 의미한 것이며, 뱀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메시야가 대속의 고난을 당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시대의 희생제사가 상징하는 것

그러나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는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속죄 받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제사 제도는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것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밭에서 나는 곡물을 제물로 바쳤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바쳤는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벨은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가인은 불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양을 제물로 바친 것은 그가 혼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제 생각에 좋은 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피가 있었으나 가인의 제사에는 피가 없었습니다. 아벨이 바친 어린양은 곧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그는 어린양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메시야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곡물을 제물로 바친 가인에게서는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제사제도는 모세 시대에 이르러 율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세 번째 책인 레위기는 제사법을 기록한 책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피의 제사입니다. 짐승의 고기도 불살라 바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의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유월절 사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어 선민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라고 하셨으나 바로는 거절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아홉 가지의 재앙 곧 피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생축이 죽는 재앙, 독종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는 재앙이 임하면 모세를 불러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히브리 민족을 내보겠으니 재앙을 물러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재앙이 물러가면 다시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약속을 어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열 번째로 장자가 죽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는 이 재앙을 피할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곧 재앙이 임하는 날 저녁에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우슬초 묶음에 적셔서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집 문밖에 나기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그 집에 들어가서 히브리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밤에 애굽인들의 집집마다 장자가 죽임을 당했으나 히브리인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유월절에 희생당한 어린양을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세례 요한 역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증언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은 모형이고 신약은 실체입니다. 또는 구약은 상징이고 그림자요 약속의 증표이고, 신약은 실체이고 약속이 실현된 것입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피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사람의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 때 짐승이 피를 흘리며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사를 드린 백성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짐승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백성의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물의 피는 대속의 피라고 부릅니다. 이 희생 제물로 바친 짐승의 피는 곧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구약 제사의 한계와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

그러면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을 구태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형과 실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구약시대의 희생 제사는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만일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속한다면, 그것은 짐승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동등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과 동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죄를 지은 것이 생각날 때마다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으며, 대제사장은 매년 온 백성을 속죄하기 위해서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그릇에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만일 짐승의 피가 완전한 속죄의 효력을 갖고 있었다면 대제사장이 매년 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에 보니, “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죄를 사하려면 죄 없는 사람의 생명이 희생되어야 합니다. 죄인은 죄인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아담의 혈통 곧 부계를 통해서 전가되는 것이 성경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으므로 죄가 없으십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셨으므로 죄가 없으시며, 죄가 없으시므로 죄인들의 구주가 되실 자격을 갖추신 분이십니다.

생명을 희생하신 그리스도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습니다. 대속물은 곧 죄인들을 대신한 희생 제물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이 죽임을 면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 사함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정작 십자가에 달렸어야 할 사람은 범죄한 우리들이지만, 예수님께서 대신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선뜻 내어놓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한번 죽을 목숨인데도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제 목숨을 연장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원해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속죄 제물로 내어 놓으셨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무슨 자격이나 아름다움이 전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을 반역한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범죄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귀하신 목숨을 버리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5장 6절로 8절에는 이 같이 감탄합니다.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자기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을 노래하고 갈구하지만 정작 주는 사랑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저 받는 사랑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복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곁에 있는 분에게 “성도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해 줍시다. 이번에는 “성도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해 줍시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죄 사함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불화하고 원수가 되고서 어찌 행복한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니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심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와 사망에서의 해방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은혜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파격적인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 이하에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아야 하므로 ‘율법의 종’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贖良)이란 남의 종 된 사람을 값을 주고 사서 양민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유가 없이 지내던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것이 속량입니다. 전에 우리는 율법의 종이요 동시에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므로 율법과 죄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가 아닌 의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니,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을 보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이처럼 영광스러운 특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살핌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구원은 영원불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번만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속죄일이 아닌 다른 날에 지성소에 들어가면 대제사장이라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셨을 때,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쳐 놓았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갈라져 두 조각이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감히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가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손수 휘장을 찢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자기의 피로써 인류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리신 마당에 모형에 불과한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할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짐승의 피가 아닌 자기의 거룩한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리셨으므로 지상의 지성소는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성소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소 휘장이 둘로 갈라진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19절로 20절에 이르기를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성전의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데, 십자가에 달려 주님의 몸이 찢겨짐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이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언제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특권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에 대하여 만민 제사장 직이라는 신학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신부들만 제사장 직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신부를 사제라고 부르는데 사제(司祭)는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미사 시간에 포도주는 신부가 다 마시고 신자들은 떡 조각만 받아먹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도 직접 하나님 앞에 고하지 못하고 신부에게 고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제사장으로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간구함으로써 은혜로운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월절 밤에 죽음이 어린양의 피를 문에 뿌린 히브리인들의 집을 피해 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 받은 성도들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억만금을 준들 어찌 구원을 살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불못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찬식은 이 같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떡 조각은 그리스도의 살을 상징하고 마시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이 같은 의미를 알고 나서 성찬을 대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찬은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7절로 29절에 보니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찬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떡과 잔을 대할 때 대속의 은혜를 깊이 알게 됩니다.

끝맺는 말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가 없는 기독교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부인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속받은 자답게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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