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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착한 사마리아사람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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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착한 사마리아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쪄는  “나는 누가복음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율법을 읽지 않았느냐?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 율법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요약하면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해방신학자들, 좀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 같으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등식화하면 좀 위험스러워 집니다.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전적으로 모두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신앙을 윤리의 차원으로 하락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이웃 사랑만 얘기하면 되지 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별해서 언급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 사랑을 포함해서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인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어서 하나님께 드리려고도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록펠러가 지어서 바쳤다는 리버사이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감회가 깊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아름다웠습니다. 스페인의 어느 교회는 100년도 넘도록 예배당을 짓고 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드리려는 그들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어느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가 새 예배당을 짓고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한다는 말을 이 목사님의 귀에 들렸답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건축위원장 되는 장로님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만약에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면 내가 교인들을 데리고 가서 때려 부수겠다고 했답니다.

그 돈 가지고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자기 교회에서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서로들 나서서 자기가 앞장서서 그 교회에 가서 오르간 부수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국교회 살아있다, 한국교회 소망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제겐 ‘글쎄올시다’ 입니다. 정의로운 말 같으나 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라고 봅니다. 지난주 그 목사님이 어느 모임에서 전에는 자기도 좌 쪽이었는데 지금은 중간으로 돌아왔다고 합디다.  저는 금년 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부러웠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교회에도 작은 사이즈 오르간이라도 설치하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가 다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았지만,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있는 것 다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앞으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요사이로 말하자면 목사입니다. 목사 가운데서도 감독님과 총회장쯤 되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레위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레위인들 가운데 나왔기 때문에 이들도 성직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역시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세 번째 지나가게 된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서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다 그 사람을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부족한 비용은 나중에 와서 내가 지불할 것이니 정성껏 돌보라고 부탁했습니다. 자, 그러면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사마리아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사람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들이 국제결혼을 했다고 하여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도 더럽다하여 일부러 돌아서 다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를 갈 때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 더 빠른데 일부러 여리고로 돌아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그렇게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도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꾸며내어 만든 이야기였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온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근자에 있었던 사실이고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었습니다.

자, 봅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해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틸릭케 교수는 이웃 사랑의 첫 계명은 눈의 조절이라고 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부자가 나사로를 집에 못 들어오게 한 것은 그의 이나 결핵이 옮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를 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감동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머리를 굴려서 그곳을 빠져나가려는 구실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내가 예루살렘 성전의 헌금을 가지고 있는데 이 헌금을 강도에게 빼앗기면 안되지, 하고 피해나갔을 것입니다. 레위인은 오늘 저녁 여리고성에서 이웃 사랑에 관한 강의가 있는데 거기엔 수 백 명이 참석할 것인데 여기서 한 사람 때문에 지체해서는 안되지, 하고 갔을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수학자입니다. 사랑과 헌신을 하기 싫은 사람의 머리를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별의별 구실과 변명을 만들어냅니다. 토끼 사냥을 하던 사냥꾼이 왔다갔다 뛰어다녔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래서 “왜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까?”라고 물으니까 그 사냥꾼의 대답이 “말도 마십시오. 토끼의 귀가 얼마나 예민한지 가까이 가려고 하면 도망갑니다. 토끼의 촉각이 너무 예민해서 발바닥으로 진동을 느끼고 도망을 가곤 해서 결국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당신은 토끼를 못 잡는데 대한 구실은 분명한데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논리와 철학이 없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헌신하고 사랑해야 할 때에 빠져나가려면 조용히 나가지 꼭 변명과 구실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이 그러면 못씁니다. 너무 약아빠지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꾀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서도 「연탄길」이라는 글을 읽었을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서울근교의 유원지를 다녀오는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 가장은 가족을 태운 차를 몰고 자기 동리에 들어오는데 길가에 검은 물체가 보였습니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보니 한 청년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뺑소니사고였습니다. 누가 그를 차로 치고서 도망친 것입니다. 아내와 애들을 차에서 내리게 하고 그 청년을 차에 태웠습니다. 동리 인근 병원에 데리고 갔으나 너무 중상이라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합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입원시키고 결찰에 보고했습니다. 이제 일을 끝내서 그 골목에 와 보니 아내와 애들이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에 있던 처제에게 연락하여 그 처제가 나와서 픽업해준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빌라 근처에 와 보니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경찰차와 소방차도 와 있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빌라에 가스 폭발사고가 난 것입니다. 언제 사고가 난지 아십니까? 처제가 아내와 애들을 픽업하려고 나온 그 사이에 가스폭발로 빌라에 불이 났던 것입니다. 일찍 들어갔어도 죽을 뻔 했고, 처제가 식구들을 픽업하려고 나왔기에 살았지 만약 그냥 집에 머물렀더라면 처제도 죽었을 것입니다. 뒤에 경찰이 조사해 보니 102호에 살던 부부가 모두 집에 있다가 죽었는데 바로 그 102호의 남자가 뺑소니한 그 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밝혀짐으로 무두가 놀란 것입니다. 한 남자는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구하려다가 자기 식구와 처제의 목숨까지 살리고, 한 남자는 다른 이를 어렵게 만들어놓고도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쳤다가 죽은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너무 정확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실화입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이름 없는 천사가 많습니다. 미국에도 많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은 수 천 억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부금을 냈는데 언제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찾았는데 공항에서 사업을 하는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중고차를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숨겼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은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수요예배에  제가 이웃 사랑에 관하여 말씀을 전했나 봅니다. 그 설교를 듣고 어는 자매가 감동을 받았다고 제 사무실에 들어와서 두툼한 봉부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마음이 변하기 전에 왔다면서 이 돈을 원로목사님들을 위하여 써달라고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연회 원로목사님들을 초청하여 점심을 대접해드렸습니다. 그 자매는 청실 아파트에 사는 분인데 가끔 우리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오셨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권력이 있고, 신분이 높고, 돈을 가진 사람과 사귀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손을 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낮은 자의 손을 잡아주세요. 그들을 어루만져 주세요. 왜 우리들의 양 팔이 밑으로 내려져있습니까? 낮은 사람의 손을 잡아주라고 조물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는 지금도 세계인의 마음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살다 갔기 때문입니다. 찰스 황태자비 다이애나가 비명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도 벌써 세월이 만히 흘렀는데도 그녀를 추모하는 기금이 자꾸만 불어난다고 합니다. 수억 불이 모아졌다고 합니다. 그녀도 살아있을 때 불쌍한 사람들, 에이즈 환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모습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스위스에서 일어났던 이야기 입니다. 실화입니다. 오늘은 실화만 얘기합니다. 하루는 한 관광버스가 관광을 마치고 알프스산맥을 넘어오는데 관광객들은 긴 여행에 모두 지쳐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사는 마지막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에 이르러서 버스의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내리막길에는 다섯 개의 급 커브길이 운전사를 기다라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점점 가속이 붙어 요동을 치며 달리게 되자 승객들은 모두 흔들림에 잠이 깨게 되었고 차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하고는 소리를 지르고 이성을 잃고 동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운전사는 승객들에게 안정을 호소하며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커브 길을 운전하여 나갔습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커브 길을 무사히 통과하였습니다. 두려웠던 승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이제 평평한 마을  길로 접어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멀리 마을의 길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빵빵하고 경고음을 울려서 아이들에게 피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아이들이 놀다가 달려오는 버스의 경고음을 듣고는 모두 길옆으로 안전하게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아이가 피하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운전사는 그 짧은 순간에 한 아이를 살려야 할지 모든 승객을 살려야할지 결정해야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운전사는 모든 승객을 위하여 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버스가 멈춘 후 운전사는 아이에게 달려갔습니다. 다친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승객들은 살았다고 좋아하는 이도 있고 운전사를 향하여 야유를 퍼부어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 동리 아주머니 한분이 야유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저 다친 아이는 운전사의 외아들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인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피하지 않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승객들은 동리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자기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아들을 희생시킨 운전사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의 삶을 기억하면서 우리들도 이웃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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