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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발을 씻으라 하셨습니다 (요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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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구속역사를 위해 오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을 잠시 빌렸습니다. 예수님이 가운데 앉으셨습니다. 양편에 여섯 명씩 앉았습니다. 사실 어떤 모양으로 앉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는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란 그림에 그렇게 그렸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입니다.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차례가 시몬 베드로에게 왔습니다. 그는 “주여 제 발을 씻으시다니요. 내 발은 절대 씻지 못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때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시다면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셨습니다.

다시 앉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이 광경은 퍽 낭만적이지요. 그러나 그 밤은 매우 심각한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의 마지막 밤입니다. 또 배신과 상처가 있는 밤입니다. 그러나 그 날 밤 이루어질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날 밤 만찬이 마지막인 줄도 모릅니다. 그냥 해마다 맞는 유월절 만찬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입니다. 흔한 일이 아닙니다.

1879년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탑정리란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는 섬을 떠났습니다. 김제의 갑부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 집에 머물던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1906년 주인과 같이 세례를 받습니다. 이듬해 교회의 영수가 됩니다. 1908년 교회에서 장로를 세웁니다. 응당 조덕삼 영수가 되리라 했습니다. 결과는 마부였던 이자익이 되었습니다. 때에 조 영수는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라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과 같이 공부하도록 하고 그를 평양 신학교에 보내어 학비는 물론 가족 생활비도 책임져 주었습니다. 그는 191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24년 13회 총회장과 1946년 대구제일교회에서 두 번이나 총회장을 하셨습니다. 조 영수님 훌륭하시지요.

Ⅰ. 발을 씻는 사람이 됩시다.

발은 더러운 부분입니다. 더더욱 당시는 천한 사람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천하는 사랑이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거창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 아닙니다. 예수님도 어린아이에게 찬 물 한 잔 주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발 씻는 것 대단히 어려운 일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삼총사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는 예수님이 발을 씻어 주실 때까지 그냥 있었습니다. 참 버릇없는 사람이지요.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대접은 치대접(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접하는 것) 사랑은 내리사랑 이란 말이 있습니다. 헌신이 딴 데 있는 것 아닙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종종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이렇게도 무능한가?” 그렇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정성을 담아 외칩니다. 별로 변하는 것 같지 않아요. 답답합니다. 저는 누구를 탓하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저는 예수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위로도 받습니다. 60년 가까이 우리교회가 대구의 심장부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변화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변해야 삽니다.

성경에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으로 구분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입니다. 그가 왜 어리석습니까? 그는 성공한 모델입니다. 부자였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왜요? 그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이웃이 없었습니다. 이웃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는 돈만 많았습니다. 물질주의자였습니다.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답답합니다. 물질만 있으면 성공한 것 아니지요. 돈 많고 넓은 집, 높은 빌딩만 있으면 일등시민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제 나름대로는 제법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약점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이상한 두 장면이 벌어질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의 변입니다. “하나님 제가 왜 지옥 가야 합니까?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청춘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종”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너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내가 목마를 때 물 한잔 주지 않았다. 내가 병들었을 때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갇혔을 때 와 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주님 언제 제 집에 오셨습니까? 주님이 그런 일 당하신다면 제 가진 것 다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자, 지위 높은 사람이 어려우면 자주 찾아 갑니다. 꽃도 보냅니다. 돈 봉투도 내놓습니다. 맛있는 것도 해 드립니다. 이와 같이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천한 사람, 장애자를 돌봐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보세요. 그들에게 사랑이 필요합니다. 슈바이처 목사님, 성 테레사 수녀, 다미엔, 한국의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환자들을 위한 한 생애를 바치신 분들이십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이 분은 좀 교만했습니다. 겉보기는 겸손해 보입니다. 그러나 행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구원에 대한 목마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명을 지킨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그도 결정적으로 돈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땅의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만 가지다 보니 중심을 잃은 것입니다. 성경에 겸손이란 말이 있습니다. 또 교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만이란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주인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위험천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인본주의자라고 합니다. 정말 엉터리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제로(0)인생입니다.

성경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왜 교만합니까? 무서운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럴 위인이 아닙니다. 제자들 꼴 좀 보세요. 선생님이 땀을 흘리시면서 발을 씻어 주십니다. 당연한 것처럼 앉아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교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Ⅱ. 낮아집시다.

낮아지면 해결됩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어떤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앞으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면 예수님이 당연히 왕이 되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 두 아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장관 자리에 앉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제자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야단났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라 하지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다들 좋은 자리를 탐냈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 힘들지요. 권력, 재력, 명예, 다들 쉽게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 곧 죄 사함 받은 사람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우리는 늘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한 달을 행복하려거든 말을 사라. 한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사라. 그러나 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정직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할까요? 아마도 한 번도 안 하시는 분이 대부분이시겠지요?!

미국의 서던 California 대학에서 연구 발표한 것입니다. 로이 경에게 작은 녹음기를 부착하여 조사했답니다. 하루에 200번 이상 거짓말을 하더랍니다. 8분에 한 번꼴로 거짓말 한 것입니다. 룻소는 “하나의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곱 번의 거짓말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결코 권세나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엉뚱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대단히 무딘 상태였습니다. 그는 흔들렸습니다. 더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물론 전들 다르겠습니까? 저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성령님이 지켜주신 것입니다. 2003년 말로 세계 각 나라의 부패지수를 뜻하는 국가별 부패지수 CPI (Corruption Perception Index)를 발표했습니다. 가장 깨끗한 나라가 핀란드, 2위 아이슬란드, 3위 덴마크, 4위 뉴질랜드, 우리나라는 50등이었습니다. 좀 부끄러워요. 그건 가진 것에 대한 만족과 감사가 모자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울분과 원한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람은 지금 자기가 대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니 위험하지요. 옛날 느부갓네살 왕의 예를 듭니다. 그는 세계 최대강국의 왕입니다. 그는 왕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신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금으로 자기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온 백성들이 절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러지 않으면 불못에 던져 죽였습니다. 네로 황제도 그랬습니다. 자기가 신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교만했습니다. 인간의 공든 탑을 하나님이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너무 오만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지은 궁전에서 바벨론의 화려한 밤을 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 위대하다. 나의 힘으로 나의 군사력으로 나의 권력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없구나. 나는 참 위대하구나.”그 말을 보세요. 전부 자기가 다 이룩한 공적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비뚤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지극히 낮으신 모습인 것입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유월절 만찬을 하시는 것입니다. 꼭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입니다. 접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으십니다.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내가 주도 되고 스승도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겸손하신 섬김의 본이 되신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낮아지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집에 초대 받거든 아래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를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낮은 데로 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하나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6.3.12-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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