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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성숙한 신자의 모습 (고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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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숙한 신자는 어린아이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인격이 주님을 닮은 모습을 가진 신자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대할 때 신령한 자를 대하는 것 같이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 곧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대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1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교회안의 신자들 가운데 신령한 신자 즉 성숙하고 성장한 신자가 있는 가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성장하지 못한 미숙한 어린 같은 신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미성숙한 신자 즉 어린아이 같은 신자의 모습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미성숙한 신자의 모습을 살펴보면 성숙한 신자의 모습을 알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숙한 신자의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숙의 단계로 나아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숙한 신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1) 젖만 먹는 먹으면 미숙한 신자입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즉 밥을 먹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밥은 딱딱한 음식입니다. 여기서 밥 즉 음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 신자는 말씀을 잘 받아 먹지 못합니다. 자기 입맛에 맛는 음식만 찾습니다. 딱딱한 음식은 먹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딱딱한 내용의 설교도 들을줄아는 귀가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 신자들은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에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이나 부담을 주는 말씀에는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칭찬 격려 위로와 같은 내용의 말씀에는 아멘도 크게 하고 감정이 열리면서 은혜를 받은 듯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딱딱한 음식 즉 책망, 꾸중 같은 말씀에는 오해합니다. 거룩한 부담을 요구하는 십자가 설교나 고난 설교 등에는 흥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강조할 때 그들은 시험듬니다. 헌금 설교에 시험 들고.... 높은 수준의 훈련이나 연단 그리고 순종을 요구할 때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젖만 먹겠습니까?
  이제는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시기 분쟁을 일으키면 미숙한 신자입니다. 
  3절에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분쟁이 끊이 없이 일어났습니다.
  고전 1:11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
  당시 고린도 교회는 서로 당파를 지었습니다. 서로 시기와 분쟁에 시끄러웠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한 몸이 서로 시기 질투하고 분쟁하면 결국 병이 납니다.
  교회는 일치와 화목이 중요합니다.
 
  3) 사람보고 믿으면 아직 미숙한 신자입니다.
  4절에 보면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은 사람을 보고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의 선배나 믿음의 친구들의 좋은 모습을 본받는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신앙의 대상도 아니요 신뢰의 대상도 아닙니다.

  괜히 사람을 보고 믿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만이 신뢰의 대상이요 신앙의 대상입니다. 사람을 보면 인간 냄새가 나고 약점이 보이고 부족한 부분이 보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성도님이 스스로 고백하였습니다.
  담임 목사를 흉보는 일에 가담했다가 스스로 이건 아닌데 라고 깨닫고 고백하였습니다. 목사님의 흉을 보고 기도하려고 하니까 기도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차해서 마음을 바꾸었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을 때 감사했습니다.
  우리 교인들 모두 저를 다 좋다고 하는 거 아닌 것 압니다. 당연합니다. 왜냐면 저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약함이 있고 실수가 있고 무지함이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주님을 닮아 보려고 주님 흉내도 내 보고 모방도 해보지만 온전하신 우리 주님을 닮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저 자신을 향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저를 흉보고 비난하고 하는 소리가 싫은 게 아니고 주님을 보아야 할 사람이 괜히 약한 나를 보다가 실족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픕니다. 저를 보지 마시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을 보십시오. 저의 겉모습이 아닌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보고 믿으면 아직 어린아이 신자입니다.
  이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성숙함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뭐라든지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변함없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는 신자가 성숙한 신자입니다.
 
  4) 자라지 못하면 어린아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사역자들을 세워 심고 물주어 가꾸어서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아무리 물주고 가꿔도 자라지 않는 신자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안자랍니다.
  사역자들이 불성해서 그런가요. 아니요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불로는 물을 주었으되 ... 그러면 하나님이 성장하지 못하게 막으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십시오. 수없이 설교를 듣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에 따라 지금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왜 신앙의 성숙도가 아직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까?

  신앙의 성숙함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 11:1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성숙한 신앙이 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빌 2:5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마 11:29절에 친히 온유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온유와 겸손이 바로 성숙한 신앙의 인격입니다.
  성숙한 신앙 인격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성숙한 신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빛을 발합니다.
  성숙한 신자는 모든 일의 전체를 볼 줄 압니다. 미숙한 신자는 모든 일을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해석하지만 성숙한 신앙은 전체를 보고 전체의 맥락에서 모든 것을 해석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마지막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생의 마지막에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기억되며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성숙한 신앙은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목적이 있어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 목적이 바로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삶이 성숙함에 이르는 삶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유연합니다. 휘어도 꺾이지 않고 넘어져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양보하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결국은 모든 것을 이루어 갑니다. 약하지만 강하고 강해지면 강함을 감출 줄 압니다. 약함 속에 강인함을, 강함 속에 약함을 품고 삽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숙함의 경지를 예수님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적 지향적인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연하셨습니다. 부드러우셨지만 목적을 이루는 데는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약하지만 강하셨고 강하면서도 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전체를 보고, 영원을 보며 사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을 기꺼히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헌신할 줄 압니다. 이해인 씨가 쓴 몽당연필이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댓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는 헤픈 말 버리고 진실만 말하며 묵묵히 살아갑니다. 자신의 사명을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묵묵히 아플 줄 압니다.

  이제 어린아이의 미성숙을 버립시다.
  젖만 먹는 신앙에서 딱딱한 음식도 먹고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시기 분쟁 다툼이 아닌 화목과 화평을 일구어내어야 합니다. 사람을 보고 믿지 말고 주님과 십자가만 바라보고 믿읍시다.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성장하는 신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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